[ 평창강에서 겨울철 얼음을 깨고 고기 잡기 ]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강물이 합강이 되며 처음 얼때엔 얼음이 투명하며 그 두께가 약 10cm정도이다. 얼음위에 올라서면 쨍쨍 마치 금이가고 깨질듯한 소리가 나는데 그것은 깨지는게 아니라 더 얼면서 부피가 증가되며 기존 얼음들이 터지는 소리입니다. 계속 아래쪽 강물은 더 얼면서 부피증가의 터짐으로 얼음은 투명에서 백색으로 변하죠. 또한 물속에 고기가 변온동물이지만 물이 차가우면 비엉비엉 하죠. 친구야... 어디 붕어를 잡니...삼지창이 아깝네 그랴~~ 붕어치곤 대어이지만, 약 25cm정도 될겁니다. 어이, 그냥 그대로 알렁 집에 가셔...와이프 무척 좋아 할걸세,,, 붕어 보약한다고,, 후배죠.
천연 기념물 누치인데 함부러 막 잡는기야~ 아마 행사일에 수명이 다하는 대어만 잡는 모양입니다..7~80cm은 족히 돼죠. 택... 너그들 제대하고 모여 여만리 뚱순네 집앞에서 꽝(TNT)터쳐 8마리 잡을때 난 말이다. 한 30m쯤 멀리 물속에 서있다가 터친다 하길래 이정도 거린데 괜찮겠지... 던지면 그거린 대각선으로 50m는 넘을테니...늘상 보아온 거니... 왠걸 꽝 하는 순간 물속에 있는 다리는 수압에 의해 갑자기 마비가 되는...죽는지 알았지 씨껍했네... 이제 꽝 터친단 야긴 옛말일테지... 미국간 재송이 보고 재송아,,, 3천원 택시비해 쏘가리 잡으러 가자 하면,,, 3천원이면 꽁치 사다먹고 말지.... 방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그게 현명할까??
건데 이 후배들은 어부가 아니야... 아까운 몸통보다 못 먹는 머리를 찔러야지. 난 말이다,,, 공기총으로 외탄넣고 느릅지기 머리를 맞쳐 죽이는데....
<사진 ; 평창포토뉴스>
심했다 그려~ 너무 많이 잡았군,,,씨를 말릴 참인가?? 난 평창강 쏘가리 먹는데 1등일 걸세.. 옛날 참 많이 잡아 먹었지?? 댓병 소주 하나 들고 오다리 오늘 어데로 갈래?? 둘이서 오늘은 시루목,,,,50cm 두마리 찔러잡고 오다리 하는말. 오늘은 둘이 먹는 양식,,, 이만하면 충분하제,,나머지 고기는 그냥 하루 더 살게 놔두지... 다음날 잡아먹지,, 누가잡아,,, 다 내것이지. 나는 물속 2m 잠수하니 귀가 터지도록 아프던데,, 그 뿐인가 고무장갑이 탈색되 허옇케 마치 손목이 잘린,, 그걸 보는순간,,, 누가 다쳤지 하고 옛 전설이 머릿속을 아프게 한다. 겁이 덜석. 그러니 오달 잠수실력 알아줘야. 요즘 자식덜 장가간다고 한 30년만에 만나니 그 친구 날보고 첫마디가,,, 후세야 울 옛날에 쏘가리 많이 잡아 먹었제...
그넘 사천강 30여리 물속 언 바위는 동쪽이 떠서 쏘가리가 들고,,, 유동 너럭바위는 아래만 보면 되고 머릿속에 네비가 그래서 담배 한대 피고 총은 나두고 물속에 들어간다. 다시 올라와 날 보고 총좀 던져 달라면 방아쇠 고무줄 몇겹 빳빳하게 댕겨서 물안에 던져 준다. 그리곤 다시 잠수하고 올라온다.. 물속에서 가뿐 호흡중인데 잡았나 하고 물으면 어 찔렀어, 아주 커,, (이 총은 활대가 1,5m를 각목에 부착하고 고무줄로 팅기는 원시식 활대이다)
그는 바윗속 고기를 이 총으로 찌르고 숨이 차서 총을 바위 안으로 너 밀어 넣고 올라온 것이다. 총에 찔린 고기는 총열 길이가 길어 바위속 터널에 여기저기 걸려서 쏘가리는 꼼작도 못한다. 한참후에 고기를 건져 올리려 다시 들어간다. 이때가 가장 중요하다. 고기는 버들껑 거리지 고기 등날 뼈는 바쭉서서 잘못 팔에 스치면 면도칼에 비듯 그냥 쫙 나간다... 잡은 고기가 크긴 크다,,,, 서울서 놀러온 사람들이 입을 딱 벌리더니 차에가 줄자를 가지고 와 재어본다. 94cm이라나...젤 큰넘 잡았지.
건데 그넘 쌍방을 뺀스에 수경하나에,,, (누군 뭐 쌍방울 없나...그래서 난 PAT(그래서 난 독립문만 입지만,,,) 귀는 쑥으로 막고 온 평창강을 전부,,,하일 큰 바위 아래엔 소뼈들이 잔뜩 있다나.. 그래 내 또 가만있질 못하지. 이묵이(구렁이 묵어 하늘로 승천하는,,)가 승천하다 주인없는 농가에 암소를 보고 그냥갈수 없제,,, 그넘 잡아 물속 깊이 몰고 들어가 다 먹고 힘을 보충하여 승천하였다네,,, 너무 새빨간 거짓말인가?? 응암 절벽아래엔 시퍼런 물이 마치 굴처럼 안쪽으로 깍아 먹었다나... 그래 내 또,,,그게 깍아먹어서 옛날 임진왜란때 저 위에 굴에 피신중인 평창군수를 잡으로 왜구들이 절벽을 오르다 떨어져 물속 절벽안으로 빨려들어가 다 뒤진거야.,,, 이것도 시뻘건 거짓말일세. 오다리 그넘 하는말,, 후평 허강소가 젤 깊지. 후일 내동생 친구들이 이 허강소에 산소통메고 들어가 반시간이 되도 한마리도 못 잡고 않나오는기라... 난 또 말하지,,, 평창 쏘가리는 인명구조대 산소통이 다 잡아 먹었어... 야들아,,, 거 깊이가 얼만고 하고 물으니 7,9m란다. 어,, 옛날 오다리도 눈은 있군,,, 젤 깊네.
어 하고 말하면 아 하고 알 친구들에게 괜스레 너절구레쓰는 이유는 우리문화 자체는 기록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어떤 절에 가면 당간지주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강릉 옥천동 주택들 숲에 있다.
이 당간의 지주 화강암이 높이 5m를 두개 세웠는데 그 사이에 드럼통 굵기만한게 아마 30m는 올라 갓어야 비례균형이...
공주 갑사의 철 당간을 보면 쉽게 이해 가지.
그런데 스님들이 글을 모르겠냐만 이 재원산출이나 용도등 제반 어떠한 글도 한 줄 없다.
울 나라에 당간지주가 현재 50여기 존재하는데 그 어떤 스님도 자기 도 닥기만 바빴지,,이갈 어디서 구했으며 주물은 어떻게
녹였는지... 젤 중요한 것은 이 당간의 철들은 왜 없어졌는지??
이 후세의 추정으로는 일본넘들이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 당시 탱크 만들려 고철로 강제 철거 해 갔슬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큰 역사앞에 스님들은 가져가든 말든 분개하는 스님 하나 없다.
그져 내 혼자 도를 닦아 글락가면 되지 하는 소극적 자세가 후일 역사에 지대한 손해를 끼친 것이다.
스님들,,, 율곡선생님 가라사대 맨날 스님들은 아무것도 없는 無자만 찾는다고,,,
그래서 우리는 먼 후일 젊은이들 잊혀진 문화의 한 도막이라도 이해하기 쉽게 이해 하도록 써야 한다.
아마 먼 후일 어느 소설가가 소설을 쓸때 필요한것 찾아 보란듯이...
그러구 나의 모든 글들을 동창카페에 올리는건 동창들 보면 좋고 또한 보관용이다. 나의 블럭이 망가지거나 다음 주식회사가
부도나면 나의 모든 글들은 하루 아침에 날아가 버리니... 그래서 이중체계로,
나의 글중엔 월정사 팔각 구층이 아닌 13층 석탑이 원형이었다라는 글들,,,
문화재청에 신문고 싸이트에 올렸더니 개인은 않 되고 지자체에서 합의되어 도 지자체에서 다시 심의회의를 거쳐 문화재청에
올라오는 방법이라나,, 그리고 하는 말이 월정사 8각9층석탑은 60년에 국보 48호로 지정된 것을 사료하라나,,,
사료라니... 정확한 출처 문서와 문화재청에서도 학계 수십명 똥떵어리들이 왈가왈부해서 이겨도 국보를 수정 못한단 말인지??
먼 후일 어느 능력있는 사가가 나와서 나의 말이 옳다해야 증명이 될텐데,,,
그래서 나의 그런 이야기들 수십편 책으로 만들 계획이다..
친구덜,,,
숭례문이 불탈때 난 그런 복원계획엔 모금에 한푼도 낼 돈이 없다 하였지만,,
언제 이 후세가 출판 모금운동하면 적선좀 하게... 맨 뒷장에 14p 활자로 적선자들 이름 크게 적어 놓을테니.
그게 노블레스 오블리쥬일세,,,, 언 정치가가 1천5백억 사회에 환원한다면 자기 자신을 노블레스 오블리쥬라의 겸손이라 하던데..
환원도 않 했지만 지가 스스로 자랑하는 푼수,,,세상으 스스로 잘났다고 푼수떠는 위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교양이냐곤 빵점이 아니라 백점이지... 마이너스 백점 말일세...
난 그러지 않네,, 친구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쥬라 하쟌??
여러 친구들을 위인으로 맹글어 줄 셈이지,,,, 알았나이까?
그럼 구드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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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덜,,,그런데 이런 댓글 함 팔아주라...
그리고 혹 누구이시든지 약77년쯤 강원일보사에서 발행한 강원의 설화(江原의 說話)란 책을 갖고 계신분 연락
부탁드립니다. 어려운 것 없어요, 두쪽만 폰으로 찍어 올려 주시면 된 일입니다.
이번 고향을 갔더니 시골집에 그 책이 닷권 한질일텐데 제5권만 남아서,,,4권째 평창군 설화편에 역사 기록 한
줄만 보면 되는 것인데...이는 평창역사에서 아무도 모르게 잊혀진 역사입니다.
후세백작 14.02.17. 22:08
그리고 또한 420년전 임란때 권두문 군수님의 12대 종손 "권태하" 님이 당시의 평창 임란 전서(戰書)를 일본
측 서술에서 일본역사가에게 찾아줄 것을 부탁하여, 고니시 유키가와(소서행장)의 문중기록을 뒤져보기로 헀
는데 지난 5월 타게하심에 아쉽게 되었습니다.
역사기록은 없는데 제가 이해하는 평창임란사는 가등청장의 주력 지대장격의 장수가 함경도에서 왕세자를
체포하지 못하고 남하시 아마 강릉에서 재 집결하여 정선을 넘어, 정선군수는 싸우지도 않고 넙죽 항복하고
그래서 정선은 모든 물자를 공납하고 그 부대는 미탄에서 영월로 가며 4,000명 왜구들 중 과반이 않되는 숫자
가 멧둔재를 넘어 평창 노산리에서 종부를 거쳐 약수초교쯤에 본영을 차리고 노산으로 대피한 군수이하 관군
(70여명중 40명은 신립의 문경새재 전투에 지원명령으로) 30여명의 관군과 주민들이 노산에 올라 항전하다가
뒷 절벽을 로프등으로 내려와 조각배로 응암굴로 피신 하였던 것입니다.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창의 제 1의 기상은 임란때 중과부적의 숫자로도 불구하고 왜구에 맞서 대항한 불굴의 정신 입니다.
당시 정선군수는 왜구애 넙죽 절을 하며 항복하였고, 영월엔 군수가 부재 상태인데 아마 38계 줄행랑을 쳤던듯,,,
그래서 고씨동굴의 고종경 어른 (저는 13세 손)은 미완의 혁명장으로 평창으로 압송되어 형행하였던 것 입니다.
이 영월과 평창을 점령한 왜구들은 다시 합세하여 강원도청인 원주본영을 쳐 들어가 영원산성(치악산)전투에서
원주시장 김제갑옹 부자는 목이 베이고 패하는 것입니다.
후세백작 14.02.17. 22:25
좀더 쓴다면,,
임란의 총 본대장격의 서서행장은 신의주에서 왕을 못잡고 후퇴하며 서울을 다시 공략하죠.
이때 광주목사의 문관인 권율은 수원 독산성에서 올라와 행주성 전투를 벌입니다. 권율은 장군이 아닙니다.
그는 행주산성 전투에서 서울을 사수하란 왕명과 함께 도원수(전투전술과 물자, 인력 징집등 왕명을 대신하는 ...
그래서 전시의 물자조달등은 무조건 왕명이란)자격으로 전투에 임하여 아군 2,600명이 왜구 3만중 2만 4-5천을
죽이는 세계 전사에도 유래없는 대승을 하며 소서행장은 서울 재 탈환을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당합니다.
아베는 역사를 모르는지 이 소서행장을 잔밤으로 제일먼져 신사에 올려놓아야지...
후세백작14.02.17. 22:32
여기서 평창 설화란 책에서 읽은 듯한 한줄의 역사는 이 임란 항전 댓가로 평창읍내 5백여호중 성인남자 250여
명을 송기산 정상아래 수직동굴 두개중 아랫굴에 내 밀어 집어넣고 위에서 흙을 덮어 생매장하였단 끔직한 기록이..
현 평창사람들은 이 역사는 물론 송기산 정상아래쯤 이 두개의 동굴의 존재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아마 두개 다 입구가 메꾸어져 그런지 아니면 그 절벽을 안타봐서 그런지 알 수 없군요.
이 까펜 산악회원님들이시라 언제 송기산 오르면 유심히 봐 주십시요.
이 생매장당한 이 고장 선인(先人)들의 그 희생 댓가는 평창의 후예들로서 진혼제는 물론이거니와 노산의 충의제
시작 서두에 묵념이랄까. 예를 표시하여야 함이 도리 아닌가 생각됩니다.
노산에서 올리는 충의제는 결국 임란때의 항전의 평창 제1의 기상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말고 우리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으로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댓글치고는 관련도 없고 본 글보다 길고 따분해도 저는 원래 이렇게 아무곳에서나 마음이 와 닿으면 막 쓰는 버릇
이해하시고,,,終)
그런데 오늘 우리 평창에서 벌어졌던 아찔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접합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사실들....,
송기산이란 이름도 처음 듣네요. "평창의 설화"가 무척 궁금합니다. 꼭 4권을 찾기바랍니다.
좋은 글 입니다 ....
그리고 그 책은 아마 평창지역엔 50-100부 하달되어 각 기관등과 시중에서 구매 되었기에 아직 충분히 있슬 것입
니다. 그리고 윗 글에서 부연 설명하면 과거 신작로라는 현 도로들은 임란 당시엔 없었슬 터이니 당시엔 하평 미륵
땅의 도로는 산길쯤으로 말이 가긴 힘들 것이고 왜구들은 상리 송어장에서 종부로 넘어 하평아래 여울을건너야 빠
른 길이고 유동에선 이 여울을 건너 종부로 올라와 남산앞 여울을 다시 건너야 읍내로 진입하는 길 이란점 참고하
시고, 노성산은 요새로 행주산성보다 더한 절벽과 물을 뒤로 하고 있는 점은 아래에 글" 양말 선생님의 배수지진이
란 글에" 그리고 고씨굴의 고종경 어른은 미완의 의병장입니다.
이로서 문경새제를 넘어서는 왜구들이 강원도영 원주로 진격시 이를 한강을 건너는 것을 방어하라는 명에 제시간에
출정을 하지 못한 사유로 당시 영월은 작은 군이라 군수가 궐석인지 평창으로 압송 , 권두문군수는 할 수없이 형을
행하였던 것인데, 이는 출정은 못했지만 강원도백의 부당한 명으로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책임으로군율에 의하였다
면 그는 혁명장인 것입니다.
이도 아래에 당시 권 군수의 "호구록'에 의한 그 글이 있습니다.
영월 군수 친구가 운영하는 까페에 이 글을 올린적도 있고 그 이해의 글도 썼지만 인식력의 전환이없었습니다.
아마 82년 영월문화 향토 사학자로 영월 문화원장을 하신 박영록 선생님이 계셨다면 찼아뵙고 이해를 구 할 수도 있
었슬 텐데...
그 분은 하동면의 자그만 묘 하나가 김삿갓의 묘라는 이야기에 고증들을 찾고 무지 답사를하여 학계에진정을 내고
인정되어 이제는 김삿갓면이라 하는데...
영월은 나의 13대 선조 유종경어른의 혁명장으로 기치를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 맏형 후일 문곡파의 고종원 어른의 부인은 왜구들이 고씨굴로 들어오 굴속 샘물에 뛰어내려 자결을 합니
다. 이 애련의 한을 달래기 위한 진혼제등 이 지역민들은 이 예로 진혼제도 올려야 할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가상의 성 춘향으로 남원은 이름을 날리는데 정절의 조씨부인과 평창 매화리 앞산의 응암굴에서 왜구
때문에 투신 자살한 권 군수의 소실부인,,,(당시로선 부인으로 인정이 되는 제도하란 점).
이들의 지조와 정절을 지킨점은 이 시대 모랄의 한 지표임에 더욱 빛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창인들은 강소사라 칭하는데 그는 후일 영조때인가 절부의 명칭을 추존 받았기에 강 절부라 칭하는게 예
의 입니다. 마치 충무공 하는 것처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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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눈소식은 낭만을 넘어서지만 그래도 눈은 겨울 풍경의 대명사죠...
눈이 있어 살아가는 곳도 있고 눈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고 눈 때문에 삶의 에너지를 얻는 사람도 있고요.
봄기운이 느껴지는 한주를 시작하는 월욜, 즐건한주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