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통하여 내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또한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만난 사실이 없어 얼굴조
차 모르는 분들과 비록 문자로나마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누고 그로 인해 우의마저 느낄 수 있음은
즐거운 일이며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로그 나들이를 하다가 우연히 내 조상과 연관이 있는 강원도 평창에 사시는 두분, ‘조PD’라는
닉을 가지신 분과 ‘후세백작’이라는 닉을 가지신 분을 알게 된 것도 나로서는 큰 기쁨이요 크게
감사할 일이다.
그 두 분은 자신들의 고향인 강원도 평창을 사랑하시면서 평창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관심을 지
니신 분들로서 특히나 역사나 문화사 분야에 대한 지식이 무척 해박하신 분들이시기도 하다.
그동안 내 불로그에 올린 글들을 꾸준히 읽으신 분들께서는 혹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조선왕조
제14대 임금인 선조대왕 때인 1592년, 만력 임진년 4월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이른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해 음력 8월에 왕세자를 잡기 위해 함경도
에 진출했던 고니시 유키나카 휘하 모오리 요시나리(森 (毛利라고도 씀)吉成)가 강원감사가 되
어 임지인 原州로 부임하면서 강원도 平昌에 진출하게 되어 그가 이끄는 4천여 명의 왜병이 조
총을 들고 물밀듯이 쳐들어오게 되는데....
인근의 타 군과는 달리 평창군수 權斗文(號;南川)은 항복을 권유하는 문서를 가지고 온 사람을
단칼에 처단하고 평창입구인 노성산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군관민이 힘을 합쳐 3일간 왜병 4
천을 대적하여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인근 응암굴(자연동굴)로 피신하고, 결국 군수가 왜병에
게 체포되어 원주로 이송되었다가 38일 만에 폭우가 쏟아지는 야음을 틈타 원주감영의 감옥을
탈옥하여 임지인 강원도 평창으로 몰래 돌아가 병부(兵符)를 수습하고 의주에 피난 간 선조대왕
을 알현하여 훗날 호종공신 대열에 오른 내 12대조 할아버지 권두문군수의 임진왜란 난중일기
인 호구록(虎口錄; 규장각 원본소장)의 번역본을 읽으셨을 것이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조PD님과 후세박작님은 바로 그러한 평창의 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시면
서 얼마 전에는 권두문군수의 소실(小室)로서 군수가 왜병에게 체포될 때 왜병이 자신의 몸에 손
을 대자 앞으로 그들 왜놈들에게 당할 본인의 수모를 예측하고 천인절벽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
하여 훗날 열녀로 정려되어, 광해군 때 정려각을 지어 역사에 기리게 된 강소사(康召史; 康節婦)
님의 넋을 추모하는 추모제를 금년 7월 중순에 평창의 샘골마을(泉洞里) 주민들께서 제1회 행사
로 지내셨다는 소식을 불로그에 올려주신 분들이시다.
직계후손 중의 한사람으로서, 더구나 직계종가집의 대종손인 내가 그런 추모제사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불로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나로서는 부끄럽고, 또한 조상
의 묘를 남이 낫을 들고 와서 벌초를 해준 것 같아 샘골마을 주민들께도 심히 죄송스러운 일이지
만 올가을에 그분들을 찾아 사례를 하고 내년부터는 우리문중과 상의하여 앞으로 그 제사에는 후
손으로서 필히 참석할 생각을 하고 있다.
사실은 언젠가 내가 집안 어르신들과 함께 매년 10월6일부터 8일까지 평창군에서 개최하는 노성
문화제 오프닝 때 그곳 호국영령비 앞에서 임란 때 그곳에서 싸우다 돌아가신 고혼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낼 때, 유족대표로 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평창의 노성산 아랫동네 이름이 ‘피꼴(핏골)’이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행사
에서 50만원의 후원금을 내고 군수의 후손으로서 제사에 잔을 올린 바 있었지만 왠지 나도 모르
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고, 군수의 후손으로서 자랑스럽게 여겼던 내 마음이 동네이름이 ‘핏골’이
라는 소리에 얼마나 아프던지 착잡한 심정으로 눈물이 글썽해서 차를 운전해서 돌아온 적이 있었
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기에 그 피가 흘러 마을이름을 ‘핏골’이라고 하였을까?
시산혈해(屍山血海)라고 하더니.....죄 없는 양민들이 오로지 항전하자는 군수의 명에 따르다가 하
나 뿐인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는데.....
정작 내 할아버지는 그들과 함께 전사하지 않으시고 이름마저 역사에 남았는데 싸우지 말고 일단
피신을 했다가 후일을 도모하자고 권유한 사람들과 군수의 항전하라는 명을 따르던 군관민들은 이
름조차 없이 꽃처럼 스러졌지 않은가.
과연 내가 후손으로서 그것이 자랑스러운 일인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내 조상이신
권군수께서 그들과 함께 싸우다가 돌아가셨다면 나 또한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그곳에 당당하게 섰
으리라.
그 생각에 나는 괴로웠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며 운전을 하여 오다가 그 한가한 시골도로에서
차사고까지 냈던.... 내게는 참으로 아픈 기억이 있다.
내가 만약 호구록 번역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평창의 임란싸움에서 돌아가신 분들,즉 지
사함. 이인서, 우응민, 지대충 그분들의 이름마저 몰랐었더라면... 또한 ‘핏골’이라는 동네이름을
그날 가서 몰랐더라면 아마도 그런 죄스러운 마음 대신 후손으로서 자랑스러운 마음만 가지고 나
는 계속하여 그 제사에 참례를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오히려 평창군민들, 돌아가신 그분들 후손들에게 지금까지도
죄인 같은 기분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내 12대조 어르신 권두문군수의 묘소는 내 고향 영주에 있고, 매년 시월상달에 우리 문중들이 함
께 모여서 시제를 올리고 있는데 해마다 대종손인 내가 시제를 주관하면서 묘소에 절을 하며 잔을
올릴 때마다 비석에 쓰인 숙부인(합품)을 뵈면서 무덤조차 찾을 수 없는 소실 강소사님의 영혼 앞
에 늘 죄스러운 기분이 들곤 했는데...
이번에 평창의 샘골(泉洞里) 주민들께서 강소사(절부)님과 이름 없이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제사
를 지내주셨다니 그저 감격할 따름이다.
내가 노성문화제의 노성산 제사에는 참례할 마음이 아직은 못되고, 비록 소실이셨지만 강소사님
과, 이름 없이 돌아가신 고혼들 제사에는 필히 참석하고 싶어 하는 이 간절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평창군민들,특히 조PD님과 후세백작님이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가져본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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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인 저의 답>
선생님의 과찬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역사가는 아니지만, 선생님의 속죄스런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만 저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고니시 유키가나<소서행장>은 함경도까지 선조 임금을 쫓아갔지만 허사로 회군을 할때 고니시
유키가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큰 질책을 받고 아마 부하 왜구들에게 각별한 다짐을 받은 상태로
가장 큰 목표는 한양 정벌이었습니다.
이때 행주산성의 2,600명의 부하를 거느린 권율 장군은 3만의 왜구중 2만 4-5천명 사살하여 완패를 시키고
이에 분개하는 왜구들은 악에 차 있었슬 것입니다.
그리고 강원도 임란사는 왜구 4번대의 시미즈 가문과 규슈지방 다이묘들의 군대가 합하여 1만 4천명의
왜구가 강원도 정벌길에... 그들은 1, 2번대의 뒤를 이어 한양에서 강원도로 회전하여 김화, 춘천, 고성,
간성을 기점으로 삼척까지 접수하고 4번대 중 총대장 모리의 1번 부대 4,000명은 백봉령을 넘어 싸움도
안하고 항복한 정선을 접수하고 평창의 항전에 평창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강원도를 배정한 4번대 시미즈 가문의 부대와 그 총대장 모리 야스나리는 전령에게 무조건 항복문서를
내 밀고 이에 강원도 일대는 모두 무릎을 꿇었고 ,,,,,,
그런 상태라는 것은 그 현의 명령권은 왜장에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약탈보다 수탈의 상태가
되어 현감은 겨우 숟가락 들 수 있슬지 모르나 백성은 유린 되는 것입니다. 아마 굶어 죽고 그 상태도
무정부적인 수탈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평창군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권두문 군수아래 뭉쳐 왜구들에게 대항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강원도에선 군 단위의 유일한 임란의 항전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영원산성(치악산 전투)에서
원주시장 김제갑의 부자는 패하여 강원도는 적의 손에 들어간 것입니다.
물론 노성산엔 피맛골이란 지명도 있고, 아직 평창인들이 모르는 송기산 정상부 수직 쌍굴 중 윗굴에 시내의
남자들 약 250여 명의 남자를 생매장하였다는 기록을 저는 35년 전에 어느 역사서에서 읽은 적도 있습니다.
이것이 왜구에 대항한 항전의 댓가인 듯,,,
왕건이 신라 침공시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은 약탈자와 부녀자 폭행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명령이 후일 신라
가 고려 왕건에 투항하는 대가를 지불받는 이러한 전쟁 규범의 스토리는 동서 고금에 다시 없는 미덕인 것이다.
아마 이런 침략자는 앞으로도 다시 없슬 듯합니다.
이 아래 저의 글 < 징키즈칸> 에 보면 우리는 드랴큐라가 무서운 사람의 대명사이지만 헝거리에선 징키즈칸
온다면 울던 아이도 뚝 그친답니다. 800년전의 징키즈칸이 아직도 서양의 드랴큐라가 되고 있듯이 전쟁이란
참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군의 세가 부족하다고 겁에 질려 항복을 하고 현감은 목숨 부지를 하지만 백성은 인권유린을 당하
는,, 당시의 전쟁에 물자 수송,,,똰 그들은 일본떠난지 1-2년 이상된 청년들의 생리적 현상,,,모든 수모를
앉아서 당하는 게 항복입니다.
우리 평창에선 권두문 군수님이 항전으로 분연히 일어서서 주민과 함께 생과 사를 같이하려는 그 기개는
시대를 넘어서서 앞으로도 모든 목민관의 지침이 되어야 할 것이고, 시민들의 표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윗줄에 썼듯이 전란시 목민관의 지표를 가르쳐준 권두문 군수님의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 이것이 오늘 제가
느끼고 앞으로도 이어져야 할 민족의 얼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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