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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임진왜란사

Re:강소사 죽음은 사라질 뿐인가--- 우리는 평창을 변화시켜야 한다.

 

Re:강소사 죽음은 사라질 뿐인가--- 우리는 평창을 변화시켜야 한다.

 

                                                                                             후세백작 09.02.05 09:31

                                                                            

 

좋은 지적 감사 합니다.

응암에 아카시아 제방사이에 돌 무더기가 무덤이었군요, 저는 군 입대전에 두 굴 모두 올랐는데 그 두개 굴의

정확한 내용은 이제 알았습니다.

 

강소사가 아무리 후실 부인이라 우리가 그의 미덕을 칭송하지 못 한다면, 논개는 출신성분이 무엇이었습니까??

강소사의 이야기는  인간 존엄과  생명이 달린 문제 입니다. 후실이라 앞으로 못 내세운다면 는 우리 스스로가  

이조의 유교주의만 앞세운 탐관오리들 같은 작태이란 생각 듭니다.  

 

만약 그분이 구국의 일념으로 잔 다르크 같았다면 이런 핑계가 통했겠습니까??  아마 성웅 이순신 대열에 올려

놨겠죠. 

 

생명은 누구나 다 존엄합니다.

이 존엄한 생명을 아름답게 다할 수 있슬때 이는 우리의 귀감이며 우리의 거울이 되는 입니다. 스스로의 목숨을

행할 수 있는 이 아름다움은 논개와 춘향과는 비교될 수 는 인간사의 영원한 존재 의미를 가르쳐 주는 미덕입니다. 

신 사임당과 같이 도덕적 모럴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이를 외면한다면 신사의 도덕률은 가치

잃게 되는 것 아닙니까??

 

현실적으로 일본인이 평창의 순례의 참배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우린 우리의 양식의 기준으로 강소사의 이야기를 다시 재고 하여야 할 것 입니다.

<신사임당은 강릉에서 태어났고, 신사임당 연수원은 주문진에 있습니다. 70년대 말에 강릉시는 예산이 없다하니

주문진에서 연수원을 지었습니다. 지금 여성의 교육으로 연수원은 주문진에 있게 되 연유 입니다. 우리도

 이런 우는 없어야하겠지요> 

 

그런데 신 사임당은 강릉에서 태어났고 봉평에서 18년 살았습니다. 성장하여 출가하봉평과 강릉을 오갔겠지요. 

그러면 그의 사상과 철학과 그의 성품에 소박하고 단아한 깃품은 상류사회인 한양이나, 그런곳 보다는 백옥포리에서

순박하고 질박한 농촌의 정서에서 영향 받지 않았나 하는 저의 느낌이고  그래서  사임당은 출생은 오죽헌이고 

사회생활은 평창인이라야 하는 생각들의 전개도 해 보심이 바르지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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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강에 선사유적은...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나라는 구석기 유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조선의 일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이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역사기록이다. 역사시대의 오천년 역사뿐 아니라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의 오천년 역사도 가지고 있때문이다. 그러나 그 물증들은 찾지 못했는데...

 

동두천서 10여분 가면 전곡이 나오는데 다리를 하나 건너며 구릉의 언덕에서 어느 미군 병사가 데이트 중 강가에서

돌팔메 하던중 이상한 돌멩이를 발견하곤 그 돌을 미국 모교의 자기스승 고고학자에게 내 밀었다.

( 그 미군병사는 고고학 전공중 학비를 벌기위해 군 입대를 했으며 그는 평생에 누구도 못하는 구석기 유적을 발견하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 그는 고고학 선생이 되었으며 그의 파트너는 한국 여성이다)

 

스승이 보자마자 이 돌을 구석기 시대의 다듬 돌로 확인 하였었다.

어느 학자이건 이런 고고학의 지평에선 발굴은 평생 한번도 찾지 못하는 것을 발굴한 기쁨과.그로 인하여 지금 현존하는

우리나라 구석기 최고의 유물인 것이고 한반도 역사를 입증하는 자료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대 학자로부터 서울대로 연락이 왔다. 그 돌은 구석기 유적이라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국 고고학의 거장 김 원룡 선생은 곧바로 구석기 유적지인 전곡으로 향하였다. 일단 강 언덕을

모조리 차단시키고 강변일대를 발굴 확인 하였다.

서울로 돌아오는길에 김원선생께서는 인생 최고의 기쁜 마음이었다고 회고 하시더군요. 신라 금관을 찾고, 백제

무열왕이고  발굴하신 사학자인데,  강 기슭의 돌 하나에 희열을 ......

이는 우리 역사의 천년과 삼천년을, 그리고 태고의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이 아무리 고고학자이라도 엄숙함을 느끼실 일입니다.

 

일전 어느 선생님의 기록, 리포트와 사진을 본적이 있습니다. 

주진강 어디쯤의 선사적은 전곡리의 유적의 시대와 같은 시기이나 같은 사회시대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아마 아흔 고령의 손보기 선생님에게 찾아 뵙고 자문도 좋치 않을까 합니다.

저의 기억으론 손보기 선생님은 또 하나의 구석기 유물인 충주와 또 제천의 구석기 물을 연구하신걸로 압니다.

그러기에 제천의 구석기 문화권의 확장선이란 의미를 가질런지도.

 

우리나라에 구석기 문화 자료들이 상당합니다만 우리나라 역사학자들 중 이 두분만 구석기 유적을 발굴한 것

이외엔 없다. 그만큼 논지 입증이 어려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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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는 타제와 마제 석기 시대로 구분되며 철기 문명이 이전의 원시 생활이지요.

여기서 철기란 그 제련법에 나무를 이용하는 화력으론 철을 녹이는데 약 200도 모자라 철기시대 다음의 청동기

문명이 싹 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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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실크 로드에 금, 은, 비단이 서역으로 간 것보다 철기 수출이 더 많았다.

1,000년에서 200년간 중국 중원의 송나라에서는 철을 녹여 주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세계 모두는

화력이 모자라 주철이 아닌 알갱이 원심분리로 알갱이 철을 모아 달구어 붙이는 편철법만 사용할 뿐, 송나라 시대에

철기생산이 3/4으로 철기가 많이 서역으로 수출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은 중세때 까지 철 알맹이를 키로 쳐서  철을 달구어 때려 붙이는 편철을 사용하였는데 송나라는 철을 녹이는

주물을 주철을 생산 하였습니다. 당시 나무 이외엔 다른 화력도 없는데 어떻게 철을 녹였슬까요???  ,,, 

이 재미있는 이야기는 혹 다음에 쓰겠습니다.

우리가 배운 실크로드와 중세 역사를 뒤집는 이야기이다.

 

서양에 신화처럼 여겨지던  트로이 전쟁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야드에 서술된 것처럼 정말 역사에 있던 도시인가

의문에 쌓였는데 독일의 슐탄이란 고고학자도 아닌 역사의 야심가의 집념으로 그의 가산을 전부 탕진하며 트로이섬에

중요 장소를 파 내려 갔답니다.

 

일곱번째 유물 층에선 금은 보화등 트로이 이전의 문명이 나오더랍니다. 후대 역사 학자들은 트로이 전쟁의 트로이는

슐탄이 파 내려간 세번째 층의 문화라고 지적 합니다. 

슐탄은 자기가 파 내려 가면서도 그 문화를 이해 못 했던 것입니다. 

고고학은 그만큼 어려움이 있으니 우린 이 선사유적을 지금이라도, 최고의 권위자에게 다각적으로 문의함이 좋치

않을련지요. 

 

이글 또한 평창을 사랑하는 일이라 여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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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소사의 죽음은 사라질뿐인가?...까페글 주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