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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나리의 사유적 사색에서

2015, 벌초를 다녀오면서,,< 기성세대의 공통적 고민은??>

지난 토요일 일찍 시골에 벌초하려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벌초를 하려 서울을 빠져나가는 차들이 무척이나 많은 듯 평상시엔 평창까지 두 시간 반 내에 도착하는데

무려 네 시간 반이 걸렸다.

 

이젠 교통과 도로가 발달하여 여름 피서철에 강원도나 또는 명절에도 그래 밀리지 않는데 조상 산소의 벌초는 제한된

시간이라 언젠가는 벌초후 상경길에 구리 코스모스 축제에 도로가 막혀 덕소 삼패 리까지 약 30리 길이 정체된 진 풍경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 민족에겐 조상의 예법과 산소의 벌초에 대한 각별한 마음들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번에 시골가니, 어느 선배는 자식들에게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뼈를 갈아서 부모님 산소 옆에 뿌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참으로 섭섭한 마음일듯 하지만 우리는 이 시기를 냉철히 판단해 시대의 변화에 맞는 생활과

풍습을 바탕으로 옛 전통을 수정함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기에 이 글을 쓴다.

 

아마, 우리 세대나 이전의 모든 기성세대는 이에 관하여 유교주의적 전통의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누구나 조상 제사등

차례상에 즐거움을 가지고 있으리라.

그러나 앞으로 자식들의 다음 세대에서도 우리들 기성의 마음과 같은 유교적 문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풍습의 우리의 전통의 맥이 끊어지리라는 예상이 우리 세대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집안도 유학자 가문은 아니지만 나는 아버님으로부터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유교적 풍습과 특히 삼강오륜등을

배웎고, 하다못해 책받침 등에도 삼강오륜의 요지가 적혀있었다.

이러한 유교적 생활과 풍습은 나만이 아닌 모든 기성세대의 동일한 환경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다음세대를 이어갈

자식들에게 이러한 삼강오륜을 이야기 한번 한적이 있는가??

 

우리는 대가족 사회에서 성장했지만, 또한 우리는 자식들에겐 핵가족을 부양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의 자식들은 마당이 넓은 단층집보다는, 마치 서구사회 같은 시멘트 블록의 아파트먼트의 단위 블록단위의

핵 가족사회와 인스턴트 사회를 선호하는 등 서구사회를 모방하며 자랐다.

 

또한, 혈연적 향촌 사회가 아닌 농촌보다는 공업화에 의한 도시적, 이기적 사회에서 성장한 자식들에게 우리가 성장하던

그 시절의 대 가족적인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제사와 벌초 등의 유교주의적 풍습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은

어폐가 큰 죄악스런 경우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혈연적인 가족 공동체의 유교적 풍습은 나쁜 것은 아니다.

 

소련의 뻬테스트로이카 당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핵 가족화 문제가 서구의 몰락원인이고 앞으로는 동양의 시대가

도래한다 하였다. 물론 가부장적인 사회이지만 혈연중심의 노동력과 인본위주의 동양의 대 가족사회가 사회생활상에

더욱 유리하다는 이론으로 그의 예견 이후 지금까지도 이 논리는 계속 진행 중이지 않는가??

 

이렇듯 우리의 풍습이 나쁜 것은 아니라 오히려 보존하고 확대 해석함이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베이비 붐 세대를

지나며 산아제한과 핵가족화 모델을 지향하였기에 우리의 자식 세대는 이러한 대가족 사회와 유교적 풍습에는 이질적

경향을 나타낼 것인데, 부모의 제사를 지내고 또,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산소의 벌초나 성묘를 다니는 것을 바라는

것은 현실적 논리에 맞지 않는 점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사회적 현상으로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에 살았지만 이제 스마트폰 패러다임을 기점으로 디지털

사회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십 여 년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앨빈 토플러도 디지털 사회의 다가옴을 이야기 하였지만 그 사회의 환경의 변이 등을 정확히

예견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디지탈 사회의 속도가 빠르고 파장 등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패러다임이란 우리의 일상이 스마트폰의 구조에 몰입하여 생활하게되는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마누라 손을 잡아보는게 아니라 제일먼저 스마트폰에서 무엇인가 변화가 있었는가 뒤져보고, 길을

걸으면서, 운전중에도, 화장실에서도 스마트 폰을 뒤척인다.

 

이제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스마트 폰에서 시작된다. 그러길래 지하철에 신문팔이가 없어졌고, 어느 벤취아래 두꺼운

책을 읽는 모습도 사라졌다. 즉, 사회의 기능과 일상의 시간등 우리 주변의 모든것이 스마트폰 위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10여 년 후의 미래엔 스마트폰의 세상이 보편화 하여 지나가면 로봇시대가 올 것이라 한다.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 시대가 다가옴을 예지하며 세계의 석학들은 인공지능의 군용로봇 개발을 금지하자는 제안을

하는 등 이제 로봇 각종 로봇 개발이 다가오고 있다.

 

로봇 시대가 다가오면은 청소용 로봇, 환자는 자기 신체의 불편함을 대신하는 특수적 로봇등 1 인 1 로봇 시대가 다가올

것이라 예상하는데.. 이 후세백작은 어떤 로봇이 필요할까??

그야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또 일등 적중 로봇이 필요하리라. 일등 한~ 세번만 당첨되었으면...

 

하지만, 로봇이 인공지능을 장착하는 날에는 인류는 멸망하리라는 위기감도...

그래서 스티븐 호킹, 머스크, 스티브 위즈니악, 촘스키 등 세기의 석학들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자동화 무기,

일명 킬러 로봇 개발을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용로봇이란 인간의 조종없이 생명체를 추적 살상할 수 있는 병기란

점이다.

 

“자동화 무기 발전은 화약과 핵무기를 잇는 ‘제3의 전쟁 혁명’”이라며 “자동화 무기가 개발되면 암시장을 통해 테러리스트,·

독재자·군벌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기 때문에 국제 협약으로 개발을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데..

그러면, 앞으로의 사회는 핵 폭탄 개발의 규제뿐 아니라 군사로봇 개발에도 국제적 규제를 가해야 하는 것일까??

 

또 다른 면에서 사회 현상을 보자.

바이오 IT 기술에서 인간의 수명 연장이다. 지금 평균수명이 88세라 하는데 인간의 수명은 150년을 살 수 있다 한다.

그러기에 이 부분에 진일보하여 장수세대가 온다면, 이를 즐거워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젠 나이 60에 육십갑자 한바퀴 살았다고 회갑을 하며 에헴거리는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슬것이다. 60갑자는 옛말이고

80갑자가 한 바퀴인듯한 세대이다. 그러면 연금제도는 어떠한 현상이 빚어질까??

나이 80 대엔 그의 아들이 60 이 되어 연금을 타서 살게 되는데 이 연금으로 부모도 모시고 살기는 곤란한 경우도 발생하고,

또한 전 국민이 이렇게 될 경우 연금자는 국민의 과반수가 넘으리란 생각이다.

이런 말을 하는데, 이 말의 논리모순은 현실에서 이런 상태가 된다면 연금제도는 마이너스 상태가 될 것이기에 먼저 그

기능이 마비나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우리가 국민연금을 들 때는 평균수명이 70살 아래였고, 앞으로 90세가 넘는다면 지금 사람들은 과거보다 2-30년간 연금을

더 받는 수혜자가 된다. 그렇다면 국민연금은 샘물처럼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연금제도란 연금자가 일찍 죽으면 손해이고 장수하면 득이 된다.

그러기에 일찍 사망하면 연금회사는 득이되고 아무런 문제기 될 일이 없다. 그러나 평균 수명이 2-30년 늘어난다면 연금회사는

망해 자빠져야 할 수 밖에 없는 논리인데...현행 연금제란 정상의 손익분계의 논리가 아닌 비 정상적인 이론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기에 언젠가는 논리모순의 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한 달 50만 원씩 30년간 적립하였다고 앞으로 30년간 250만 원씩 연금받겠다는 계산은 참으로 좋은 생각이지만 봉이

김선달도 이를 이행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계약이고 약속이라고 다음의 자식 세대는 이러한 짐도 지고 가야 되는 것은 아닐까??

보통 서민들이 자식에게 용돈받지 않기 위해서는 주택담보 모기지론의 대출 (역 몰게이지)의 상품이 더욱 활발해지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사회는 이렇게 더 복잡다단하고 연금제에 평균수명의 연장에 따른 모순의 갈등과 우리 시대에는 잘 쓰고 낭비까지

하던 석유, 석탄 등 자원의 고갈 등 많은 어려움을 물려주는 것이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는 자식들에게 부모로서 더 이상 유교적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기를 바라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벌초와 제사 등의 문제에 대하여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은 이 시대 기성 인들의 공통적 고민일 것이다.

 

경우의 예를 더욱 실감이 나게 바라보기 위해 나의 집안의 예를 잠깐 들면, 증조부까지 6기의 묘가 있고 외조부2기의 묘도

벌초를 한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지나면 자식들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유형보다는 산업사회의 일원으로 도시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제사와 벌초를 물려주기에는 너무 과중한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일전부터 형제들에게 산소도 합장과

제사도 합동 제사를 거론하였다. 이 점이 막상 후손들부터 시작되기엔 혼돈스러울 것 같기에 우리 세대부터 간촐한 문화와

예법을 전통으로 만들어 나가자는 취지이다.

 

여러 나라의 장례법엔 지역적 환경와 여건에서 풍장과 수장, 화장 등 여러 유형이지만 우리나라는 습곡산지 지형에 토장의

매장형 장례법이 전통이었다. 그래서 도선국사 이후 조선 시대에는 잡과 출신의 명 지관들에 의한 명당론의 풍수설도

발전하였다.

만약 조상묘가 명당이라 생각하여 부모의 합장을 꺼리는 경우가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이다. 풍수론에서는 합장을 하여도

어느 한 묘만이 혈에 닿아 명당이란다. 또한 봉분은 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평창읍내 내가보는 풍수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풍수란 주관적인 해석이기에 아마도 미 오픈인듯하다.

그 이야기 중에 평창읍내 제일의 명당이란 어디일까?

각기 주관적인 해석은 다르겠지만 나로서는 입탄고개 아래의 대학교 짓다 부도난 자리라 하겠다.

 

언젠가 대학교 설립을 위해 군청 민원실 출입구 한 귀퉁이에 있던 모형도를 보는 순간 명당이라 이게 진짜 있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곳이 대학교 예정지란다. 그리고 재단 이사장 왈 이곳이 남향이었다면 대 명당이란다.

그런데 학교를 지을 때 그 재단엔 부도가 나니 명당이라도 용뺄 재간이 없는듯하다. 아마 다른 재단이 이곳에 똑같은

학교를 설립했다면 이도 부도가 날 것일까?? 그 이사장은 이러한 땅에 시멘트 덩어리를 밀어 넣어 침몰하는 과욕이었슬까?

아니면 대 명당은 시간의 도래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명당론이란 남루하기만 하지만 우리나라 각 고을엔 향교건축물이 위치하는 곳이 대체로 양지바르고 토질좋은

명당임엔 틀림없다.

우리는 이렇게 유교를 숭배하며, 인의예지를 실천사상으로 사회질서의 모범을 삼았지만 위에서 보듯, 사회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발전하며 이제 유교도 역사에 묻혀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세대의 막바지엔 (대 가족에서 베이비 붐 세대의 핵가족 세대로 기성사회가 넘어가는,,,) 이러한 유교적 풍습도

보다 간촐한 전통으로 재 구성해야 될 것이다.

위의 나의 집안 이야기 중에 외조부 묘를 거론한 점의 이유는 기성세대의 고민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를 따라 외 조부모님들 묘를 지금까지 줄곧 벌초하여왔다.

외삼촌이 안 계시고 이제 노년의 막내 이모님만 생존해 계시는데, 아직 별다른 이야기는 없지만, 지금이야 우리 외손자들이

매년 벌초를 하지만 그 이모님은 앞으로 부모님 산소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다년 내로 힘 있슬 때 어떠한 결단이 내려지지 않을까 가상해 보지만, 그 결단의 한계는 일반적으로 묘를 파내어

유골을 화장하여 한줌의 재를 동리의 산속에 뿌려서 깨끗이 정리하는 수 이외엔 또 어떠한 방법이 있슬까??

아니면 납골당에 모시고 앞으로 몇십 년 후에 야산에 뿌려달라고 부탁의 계약을 하는 수 이외엔...

 

그러나 이 후세백작은 이러한 꾸질 한 방법은 거부한다.

살아서도 인간이 만든 성냥갑 같은 아파트먼트의 10자 안의 시멘트 방구석에서 한평생을 보내고 죽어서도 또 한 뼘도 안 되는

차디찬 유골함 속에 갇힐 것인가??

 

인간은 흙에서 나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숨이 다하면 육신은 분리되어 육신은 남되 영혼은 없어진다.

종교계나 모든 사람들은 혼령은 윤회한다고 믿는다. 불교의 윤회설이나 크리스천의 재림이나, 라마승들도 하다못해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왕은 누구나 한 번씩 하는 것이라고 브라만 계급의 새빨간 거짓말에도 인간의 영대(靈)는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나의 어머니도 이 생각에는 마찬가지였는데 타계하시기 전에 언제인지 인간은 죽으면 육신은 남고 정신은 멈추어 사라진다고

나와 같은 생각의 말씀을 하셨다. 당시 이 점에 나는 그럼 그 혼은 다시금 태어나는 게 아니고요?? 하고 물으니 그냥 사라진다

하였다. 이 점에선 나와 같은 생각이다.

 

만약 윤회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어떤 훌륭한 인물은 전생에 큰 영대라 하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그럼 태고에서부터 지금의 50억 혼령이 준비되어

있었고 앞으로 더 증가할 인구 수까지 예정되어 있다는 말인가??

어떤 최면술사는 인간을 최면 걸면 전생의 이야기를 한다지만 그것이 사실적 이야기를 말한다 하여도 자신의 이야기라고

수 있는가??

 

나와 나의 어머니를 뺀 지구상의 과거의 인간들까지 최소한 이 부분에선 모두들 거짓말을 하든 아니면 맹신적 믿음인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의 표현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자연의 지배를 넘어서는, 자연의 논리를

벗어나는 물리적 현상을 가질 수 없다는 논리로 인간이 죽으면 육신은 한줌의 재로 되고 정신세계의 혼은 그 지점에서 끝이나

無로 환원된다는 나의 무신론적 믿음이다.

무신론이란 무조건 神은 없다고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만물의 이치를 그려주는 오묘한 神의 존재를 긍정함에

인간의 혼은 마음대로 神의 논리의 범주를 넘어서서는 위배된다는 생각이다.

 

이러기에 인간은 죽어서 깨끗한 한 줌의 재로 환원되어 그의 고향인 자연과 우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인간에게 무엇의 더한

거짓말로 미화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나 후세백작의 무신론은 우주 창조의 조물주의 오묘한 진리를 부정하는게 무신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윤회한다고

神의 영역을 넘어서는 인간의 자찬 말에 이것은 신의 영역의 세계를 벗어난 것으로 이를 믿지 못한다는 무신론자란 점이다.

 

그러면서 모든 지구인들은 시신의 보존에 고총들, 피라미드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덤을 만들고 유골을 보전하는

생각과 문화가 보편적으로 내려져 오는데...인간의 이상과 가치 실현 및 그의 영향은 생존 시에 구사되는 것인데 죽어서

그를 찬양하는 게 그렇게 효과적인 방법일까??

 

다만 유골은 가장 자연적인 상태로 자연으로 돌아가는게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모님의 예에서 직계 혈육의 단절에 앞서서 부모님의 묘를 다시 파내어 화장을 하고 유골을 산속에다 뿌린다는

일반적인 구차한 방법보다면 차라리 그냥 자연스럽게 놔둔다면,,

지금 사람들은 무연고 묘라 하지만 모든 묘들이 그렇게 벌초함보다 풀이 자라고 새가 찾아와 우는 자연의 상태로 그냥

놔두는 문화가 이루어 진다면 그 묘는 무연고 방치란 개념보다 가장 순수하고 자연적인 묘라는 인상을 받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어느 한 부분에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전통문화의 단절이란 면에서 깊어져가는 고민중에 이러한 조상을

모시는 예법의 간소화와 묘의 문화론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필 하였다.

누구나 조상은 있지만 충남 어느 친구 중엔 선산이 3개에 70개 넘는 묘가 있다는데...

사회는 그렇게까지 조상을 모시는 무엇일까??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 21세기는 디지털 장비를 가지고 지구를 떠도는 노마(유목민)의 시대"라 했다.

이제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를 뒤로하며 디지탈 시대를 맞이하여 그 깊이를 알수 없고 빠르게 흐르는 유목민처럼 사회는

급변하는데 따르는 전통문화의 단절감이란 괴리에서 뾰족하게 시원한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인공을 가하지 않는 가장 자연적이고 인륜을 따르는 방법이 가장 정답 아닐까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친다.

 

중앙선의 구 양수리 철교 / 현재는 전철에 밀려 자전거 도보로 전환되었다.

 

 

지상 500m이상의 높이의 서울 근교의 해발 600m 산들보다 더 높은 하늘을 찌르는 스카이라인이다.

위 사진의 반대쪽인 문정대로 아래에서 보면 그 큰 8차선의 대로를 딱 막고 서 있는 듯 위용을 과시한다.

그 아래 빌딩들은 30층들인데, 이젠 마치 장난감 악세서리용처럼 느껴지며 우리의 비주얼 시각은 높아만 간다.

그래서 가끔 시골에 내려가면 집들과 도로, 그 전에 내가 지나 다니던 골목들이 너무 작게 보이는등

몇 시간 동안은 시각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나의 글은 핵심의 요점만 간추려 쓰질 않는다.

이 글들은 어느 논문형식도 따를 필요가 없는 블로그의 재미를 보태는 글들이기 때문에 주제와 상반되는 글들의 매치로

균형을 잡아 나가며 쓰는 것이다.

아마도 나의 글 모든게 이리 지루한 느낌에 칭구들은 동창카페 첫 장부터 간략하게 요점만 쓰라 요구하는데 그것은 쓰는

것보다 전화 한 방이면 의기 소통될 텐데 괜스레 쓸 필요가.

또한 문장 끝까지 가지말고 글을 짧게 줄을 바꾸어 달라는 여친들,,,

옛날 우리 교과서의 한줄에 9P 글자가 40자 내외였는데, 요즘 인터넷에 글을 쓰면 무려 200자가 한 줄에 걸린다.

이렇게 긴 글의 단점은 우리는 긴 글에 훈련되지 않았단 점과 또한 눈으로 빨리 읽으려면 눈이 아닌 고개를 돌려야

하기때문 눈으로는 읽을 수 없는 폐단을 지니고 있어 나는 글 중간에 카트하여 줄을 바꾸어 쓴다.

그리고 나의 블로그엔 화면의 양 옆에 인덱스의 프레임을 달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블로그는 책과는 틀리는 종합 영상 매체이기에 사이드 인덱스를 꾸미면 사진이 작아져서 스펙타클한 맛이

감소하기 때문이다.,,,,,,,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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