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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Re:3) 보물 제 139호 석조 보살상의 조형적 의미는??

 

Re:3) 보물 제 139호 석조 보살상의 조형적 의미는??

 

후세백작 2017.08.15 20:21

 

 

 

  본 사진은 오대산 문화축전의 월정사 전경 사진으로 평창 포토뉴스에서 한 컷을 클릭하여 올려 보았습니다.

월정사 중창에대한 문화양식은 일전 저의 월정사 중창에 대한 사색에서의 생각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사진입니다.

 

  우선 사진을 감상해 보면 몇해전의 월정사 중창에서 8각9층 석탑 아래엔 석조여래좌상을 다시 모각하여 올려 놓고 양 측면엔 거대 석등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사진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동 탑의 가드레일인 2중 난간석이 새로히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새로 조성된 석물들이 모두 눈에 거슬리는 것은 우선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본제인 석탑에 비해 각 부재들이 너무 커졌다는 느낌에 석탑의 조형적 의미가 감소되는 것이다.

 

  3층이든  9층이든 모든 탑은 부처님을 뜻하며 동 탑에서는 그 앞에 석왕보살의 공양상을 볼 수 있다. 원작의 원래의 석왕보살은 비율적 균형비례를 못 맞춘 듯 하지만 그 보살상은 고개를 뒤로 약간 젖히며 탑신 전체, 즉 석가의 전신을 바라보며 공양하지만 지금 새로 제작된 이미테이션의 모작은 크기가 좀 더 크고 좌대의 받침도 1/2의 비율로 돼지 울타리같은 이층 난간석을 꿰뚫고 올라와 탑의 전신 하층들을 가리고 있다. 위 사진에서 보면 색상도 더 밝아서 탑과는 동 떨어진 이질적 물체가 탑신을 향해 기어 오르는 듯한 인상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본인의 감상으로는 묘관도 커져서 그 무게를 지탱키 위해 목도 굵어지고 고개는 숙여서 마치 사다리를 타고 기어 오르는 듯한 느낌에 탑의, 부처의 하단부의 조망을 가리기에 만약 사진을 찍어도 본재의 탑신만은 찍지기 곤란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석왕보살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공양할 때 사람의 키만한 이 석조여래 좌상이 앞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탑의 전체를 조망하자면 옆에 비껴 서야 하는 것이다.

 

  본 불탑을 만들었던 옛 석조 스님들은 이러한 폐단도 알고 석조보살상을 조금 작게, 머리를 쳐들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슬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받침의 기단석도 뒤가 더 내려가 전신이 조금 뒤로 졎혀짐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옛 석조스님들이 동 탑이 부처님의 전신으로 탑신과 상륜부 모든 부분이 광명정대한 우주를 나타내며, 이러한 부타와 석조보살상과의 상호관계에 하나의 불교관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본 석조 보살상은 균형 비례보다는 동 탑신을 관조할 수 있는 목적에 부합하도록 하반신이 조금 더 작게 데포름(변형)된 것이지 모작에서 목과 머리의 각도처럼 기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인상의 느낌에 대하여  예전에 본인은 아래의 주소에 게시한 내용들이 있지만 위의 사진을 볼때 탑 앞에 딱장벌레 앉은듯한 느낌의 불만을 다시 토로하는 것이다.

http://blog.daum.net/kkks1/195 3) 보물 제 139호 석조 보살상의 조형적 의미는??

 

위 세장의 사진을 분석적으로 이해해 본다면...

왼쪽은 국보급 반가사유상으로 마치 로댕의 지옥의 문에 걸린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무언가 사유적 느낌인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은 인간의 고민문제 이지만 반가사유상의 생각하는것은 우주 원형예정의 사유의 피안의 세계에서의 인간의 고뇌인 것이다.

 그런데, 가운데 사진의 석왕보살이라던 동 탑앞의 원작의 석조 좌상불은 반듯한 자세로 불탑(석가의 전신)을 올려 바라보며 공양을 드리는 모습이다. 이 모습에 하반신이 비례균형이 않맞는다는 항간의 지적은,,,본 석조상은 동탑의 탑신의 조명을 방해하지 않기위해서 하반신을 조금 흘린것으로 기형이 아닌 데포름(변형)으로 이해하여야 좋을 듯하다.

 

 이 석조보살의 얼굴을 보면 머리 위의 묘관까지도 날아 갈듯한 날렵한, 즉 오른쪽의 이미테이션(모각) 조각처럼 둔탁하지 않고 천상의 세계를 오르는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런 인상을 갖기위해 묘관도 타원으로 굽는 형태로 올라 갔으며 묘관의 천정부도 자연스런 각선이 형체를 잡았는데 비해 모각의 조각상엔선 무거운 돌을 머리에 이고서 목이 굽어지는 느낌은 아닐까??

 

 본인은 조각을 전공했기에, 아마 이러한 모각상이 본인의 정원에 있었다면 벌써 내다 던져버렸을 것이다.

도공들이 마음에 안드는 도자기를 깨내듯이 거침없이 버릴 것이다. 그래야 저 아름다운 팔각구층탑이 제 모습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이 모작이 얼마나 기형인가 하는 점은 위 주소의 게시글에 보시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아마 월정사 탑의 미학을 쓰려다 다시 쓰는데,,이야기는 좀 돌아가서,,,,,

월정사 탑을 지난 70년 해체 복원시 감독관인 정영호 당시 단국대 교수는 다각탑의 전문가로서 팔각탑을 고려의 이형(異型)탑으로 고구려 계통의 북방형이고 계통으로 분류하였다. 그런데 이 본 뜻과는 달리 단어적 어감처럼 이방으로 홀대되고 통일신라 삼층석탑은 정형탑이라고 명명했는데 삼층탑은 정형이란 의미보다는 단어적 어감의 정형이란 의미처럼 우리나라 탑의 주종처럼 느끼게 설명되곤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본인은 팔각탑이 고구려 복고적이 아닌 신진문물의 송나라 영향이라고 주장하는바 견해도 정영호 박사와는 다른 면을 이해를 하고 잇지만,,,

 

  또한 우리나라 국보 403점중 가장 많은 부분이 석탑으로 28개이며 보물은 149개의 단연 압도적 문화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 석탑에 대하여 학문적 이해는 그에 못미치는듯 하다.

 

사학자들의 논지는 그저 역사적, 시대파악이 주종인지  2013년 평창군 예술회관에서 개최한 "수다사지 활용방안" 세미나 리포트중 단국대 박경식 교수는  우리나라 탑의 대가로서 "수다사지 삼층석탑" 의 리포트에서는 동 탑의 3매의 사잇돌에 추정분과 그중 맨 위의 사잇돌을 빼야 한다고 하는 점과  바닥에 놓인 3층의 옥개석, 기단석이 들어서 올려 쌓으면 된다고 하지만 분명 싸이즈가 틀린 타 탑의 부재이며 이 옥개석엔 찰주공이 있지만 현 탑; 위에 있는 복발에는 찰주공이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정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을 오류질 한다. 이런 오류는 학문적인 것보다 성의가 부족한 오류 아닌가??

퍙창, 촌구석이라고 얼마나 무시를 당하여야 하는가...옥개석의 두께는 10cm인데 찰주공 사이즈는 20cm이라 한다. 당간지주에는 통석으로 된것이 다섯점 정도 분포하는데 수다사의 석부재는 당간지주 경계석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원주의 법천사지의 얘처럼 건물의 댓뜰 마감재로 보아야 한다.

 

10페이지 분량의 레포트엔 아직도 오류가 더 있으며 문장 자체가 횡설수설하며 안정적이지를 못하다.

주최의 평창군이나 월정사는 까막눈이되어 이런데다가 돈을 쓴것이라.본인은 박사들을 성토하자는게 아니라 평창군은 그런 세미나 자료릏 더 이상 쓰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즉 보물로 보관할 필요도 없기에 삭제해 치워야 후일 분론이 안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동 레포트에서는 몇 가지 오류를 범하며 "안상"의 시기적 구분등 그의 통계의 스크랩분 이 레포트의 핵심인듯 많은 분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안상은 시대적 구분의 하나의 도표로서는 작용이 되지만 안상 자체의 도식화는 불교사적 중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안상은 면 분할시 힘을 갖게해주는 띠장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탑의 전문가들은 동탑 수다사지 탑을 보면서 사잇돌 3매가 한 공간에 조적된 점의 오류를 바로 알 수 있다. 갑석의 사잇돌 3매란 우리나라 탑 양식에도 없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이를 보고서는 잘못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해야 될텐데 강원대 사학계나 누구의 기록에도 이런 기록은 없다. 그러기에 이 부분도 정확한 기술로 갑석과 받침석의 기능적 이해로 기술 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학계는 탑에 대하여 그 기능적 설명은 배제되어 있다

가령 탑신석을 세우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 놓는데 이는 탑신석의 여러 조각의 돌들을 하나로 묶어서 벌어지지 말라는 기응적 이해나 받침석은 여러 조각의 탑신석의 여러 조각 단위의 무게로 내려 누를때 이 힘을 수직만이 아닌 수평적으동으로 무게가 부분적 차이가 없는 무게의 가로 이동로 전환시키는 기능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잇돌은 받침석과 갑석 두개일뿐 사잇돌 3개의 탑은 우리나라 1,200개 탑에서 단 하나 수다사지 탑에만 존재하는데 이것은 정원대님의 증언 채록분에 의하면 지난 90년초 이 석탑을 장물로 훔쳐 차에 싣고 달아나다 마을 주민들에게 잡혀 다시 쌓은 것인데 사잇돌의 순서순으로 머리 쌓았지만 3장이 한 부분에 끼이는 것은 오류다.

 

그런 예는 없는데 학자들은 여기에 무척들 고심을 하는...이의 오류에 증명은 동 탑 자체로만도 충분히 할 수 있으며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갑석과 받침석으로 보아도 아래의 받침석이 기단석 위의 갑석보다 크기가 작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 사학계의 탑에 관한 학문은 아마본인의 해석과 원리등의 기능적 학문의 장르는 없는듯 하다. 

 

그러면 현 수다사지 탑의 2개층의 옥개석으로 과연 이 탑이 3층탑이었는가 하는 점을 그래픽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그러나 학문은 이 모든것을 포함할 수 있어 어떤 탑에도 그 원형이 무엇이었으며 하는 점을 찾을 노력은 없는것이다.

다만 석공들의 구구주먹식일뿐이지 지금 도안지에 신규의 탑을 만든는데 제도적으로 그래픽화의 이론까지도, 또한갑석의 이런 기능적 설명까지도, 안상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도 이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은 위의  설명적 언급에서도 그리고 안상이 무엇이라는 이해있는 충분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동 탑에 대하여 세미나를 했으면 최소한 동 탑의 원형은 무엇인가 고민해야 했을텐데 그런 의식 자체도 없는듯 한 세미나였다. 하지만 본인은 동 탑의 원형은 어떠한 모양인가 정확하게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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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항초교 뜰에 옮겨진 장대석은 일제 고적조사자료에서부터 (아마도 수항초교로 옮겨지기 전부터)  이를 당간지주라 표시되어 온 인터넷에 당간지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때는 어떤것이 당간지주인지는 알 수 없어도 수항초교에 잇는 장대석은 당간석이 아니다. 여기에 박경식 교수의 리포트에서는 당간지주가 아니라 당간의 난간석 아닌가 추정하지만 그것은 아니란 점이다. 당간의 난간석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그 난간석이 직 사각형의 3매정도의 통석에 안상무늬를 조식한 것이다.

 

수항초교의 장대석은 가로로 안상무늬의 어떠한 기단석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또한 어느 한 점의 장대석은 기능적으로 알 수  없는, 풀리지 못할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는데 이도 다음에 충분히 설명할 것이다.

 

아뭏튼 본인은 여러 학자들의 그간 의문만 쌓은 동 수다사지탑의 의문의 과제들을 해결하였고 그 기록을 다듬는데..이제 우리의 사학계도 이제 일반적인 학문으로 문제해답에도 어려움을 많이 겪는 우를 범하지 말고  탑의 기능적, 다각적 이해의 학문의 폭을 넓혀야 하는 것이다.이것이 우리나라 국보에 제일만은 탑 문화에 탑 양식적 이해인 것이다.

 

앞으로 <수다사 3층 석탑의 제 문제 풀이와 탑의 일반적 이해>란 제목의 논문형식의 글을 자신있게 쓸 것이다.본인은 이 수다사지 탑에서 사잇돌 3매의 문제와 3층 옥개석의 새로 만든다면 그 싸이즈등, 그리고 상륜부의 복발과 양화의 문제등 동 탑의 전반의 학자들의 의혹을 정확하게 해결한다. 이미 그런문제는 다 쓰고 논문식으로 정리중이다.

 

일전 어느 선배의 책을 만들던 공모전에 출품을 하던 인증받을 수 있는 액션이 중요하단 이야기에도 동감하고 그런 곳에 출품할 수는 있지만 상은 안 바란다.

 

왜냐면 이 분야의 연구는 충분히 논문 대상감이지만 본인은 여기서 본인의 이론을 만들고 또한 탑의 학문적 다양성을 주창하기에 기존 학자들에 도전이란 느낌으로 이를 수용해 줄것인가, 아니면 기존 학설만의 위기의식의 역 효과의 파장도 고려해볼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그런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진리의 탑구가 중요할 뿐이다.

 

본인은 평창인으로 누구도 풀어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손으로 가꿀수 있다는 의지를 가졌기에이를 연구하고 보다 넓은 시야의 문제로  탑에대한 학문의 분야적 폭도 넓혀 우리나라 국보에 걸맞는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서술 하였다.

 

또한 평창아라리에 대하여서도 약 10년간 생각끝에 언젠가는 우리나라 아리랑이란 큰 명제에 대한 지금의 올바르지 못한 이해들에 대하여 과감하게 다시 주창할 것이다. 이렇듯 여기에도 본인은 그 공백의 허전함을 채워야 한다는 주관을 가지고 잇다.

 

이제, 본인은 수다사 탑의 풀이 이해로 통해서 우리나라  국보중 제일 비중많은 탑에 대하여 학문적 다양성과 이를 통하여 올바른 이해와 올바른 이해와 이를 통하여 석탑의 효과적 관리와 보수등에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문화국민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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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다사지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그 주변이 개인 소의의 경작지로 올해도 객토를 한다.

그러기에 탑 주변만 점점 저지대로 몰리고 빗물은 탑의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이다. 어는 사진들을 보면 수해시 떠내려 가던 풀입등이 탑에 걸려있어 수해가 쓸고가는 점도 볼수있다.

 

 이것은 그나마 지금까지도 잔존해 있는 탑이라도 제대로 보존하자면 사유지일지라도 어떤식으로 하든간에 수로를 만들어 보존함이 가장 시급한 문제인 것이다.

지난 2013년 평창군에서 개최된 "수다사지 활용방안"이란 세미나는 이런 언급도 없고 오류투성이로 별로 득실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앞으로 본인은 이러한 방대한 양의 기록을 서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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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정의 사진은 처음에 글을 쓸때 찾아논 사진인데 여기서 월정사 탑의 전경을 바라보는 사진이다.

 

중창이후 석조 보살상의 좌대를 높이고 보살상도 두배로 크게해 탑을 가리고 있다,

그래서 감상부터 이야기 해 보면 감상은 첫눈에 보는 느낌이 제일 중요한 감상으로 전자의 탑은 중후한 멋을 가지고 있으나 중창이후인 아래쪽 사진의 탑을 감상하자면 마치 휜 도룡룡이 기어 오르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감상에서 주체는 탑이지 부재들이 더 크게 보여서 탑의 칼라풀한 느낌을 분쇄. 망각시키고 있다.

 

이는 주종보다 보조가 더 커지는 느낌으로 위의 사진과 대비해 보면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앞으로 언젠가 다시쓸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의 미학이 이에대한 정영호 선생의 리포트에 반하는 생각을 그릴 것이다.

 

정영호 선생은 동 탑은 고구려의 복고로 팔각이라 거론하지만 올해 경찰 임용고시문제중에서 동 팔각구층 석탑에 영향을 준 나라는?? 하고 문제가 출제되었다. 물론 그 답은 송나라다. 

예전부터 본인은 동 탑이 송의 영향이란 역사를 거론했다 앞으로 이에 관한 논제속에 우리나라 1,200여기 탑중 가장 미적 완성을 가지는 장중하면서도 아름다운 팔각구층 석탑의 미학을 쓸 것이다.

 

동 탑에 대해 단 한가지 부탁은 몇 년전 이곳을 가보니 탑  난간석내는 빗질도 안한듯 어지럽게 되어 있더만 이러한 부분부터 정성을 드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