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의 화가) 최홍원 화백 추모전(1부)
2021. 11. 27(토) - 12. 27(월) 원주 복합문화교육센터 개관 이후 첫 기획전시(1월까지 한달 연장된답니다)
원주문화재단은 故최홍원 작가의 작고 10주기를 기념하기 위한 추모전시를 11월 27일부터 12월 27일까지(31일간) 원주 복합문화교육센터(구. 원주여고)에서 개최한다. 작가는 그의 그림 7,800여점을 원주시에 기증하였으며, 앞으로 원주에서는 최홍원 미술관이 만들어질 계획이다.
▲ 최홍원 화백의 아뜨리에를 전시관에 그대로 옮겨 재현한 모습
<작품 감상및 이해>
이 그림들은 참 난해합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감상하여야 할까요??
감상은 독자가 자기 수준에서 보고 느끼는 감정 그 자체입니다. 물론 그 이상의 미술사적 이해를 하면 더욱 재미있어 지는데, 가령 소설이나 詩는 일반인도 읽어서 감흥이 일고, 음악은 가락의 선율의 아름다움에 전율을 느낄 수 있지만, 미술은 예쁘지도 않고 이해할 수가 없어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위에 그림중에 하얀 곡선 위로 알록달록하게 색감의 선으로 그려진 그림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에 이러한 그림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 감상의 관건입니다.
우선 최홍원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사항으로는 단편적이나마 그의 생애사의 이해입니다. 작가는 1929년 평안북도 정주생으로 오산중학을 거쳐 평양 국립 미술대에 진학하였습니다. 정주生으로 오산중학 출신은 백석, 소월등으로 알려진 너무나 유명한 문향의 고장 출신으로 6,25가 발발하자 작가는 9남매중 막내로 아버지, 어머니 사진 한장을 가슴에 품고 홀홀 단신으로 남하하여 전선에 나갔습니다(현 국립 이천호국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휴전이 되고 '50년대에 그는 강원도에서 교직에 몸 담으면서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교직에 몸을 담으면서 '5~'60년대 강릉, 이후 속초, '70년대 초에 원주, 이후 춘천으로 전근가면서 가는 곳마다 미술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강원에 미술역사를 개척하였습니다. 작가의 그림에서는 '95년 "작가노트"에서 밝혔듯이 초기의 그림에서는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하여 많은 펜화를 그리는 점은 6,25 전쟁 당시 북에 두고 온 고향의 그리움과 전쟁의 상흔이 그의 가슴을 누르게 되었던 듯합니다. 특히 가치 없는 죽음에 대한 충격이 말년까지 그의 작품 속으로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작가는 6,25 때 월남하여 학도병으로 종군하여 전쟁을 겪으며 이념의 대립과 전쟁의 폐허 속에 삶과 죽음에 대한 번뇌와 대하여 단테의 신곡으로 해석하는 수많은 펜화를 그렸다고 밝히는바 아마도 이러한 전쟁의 상흔과 치유되지 않는 죽음의 문제가 인간의 본질인 내면세계에 강하게 어필되고 있었던 듯합니다.
또한,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는데 출근길에 한적한 산허리를 돌아가기에 음악을 틀어놓고 들으면서 출근하셨다 하는데 음악은 내면세계의 깊은 상흔을 치유해 주는 카타르시스(정화)의 힘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치유된 내면의 원래의 상태를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은 음악을 들으며 그리는 추상 그림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필자의 시골집엔 저의 초교 이전에 '60년대초에 이모부님이 선물하신 그림 한점이 거실에 걸려 있었는데, 그림은 유리 액자속에 수채화로 베토벤의 운명을 들으면서 음악을 그림으로 그리셨다고 하는데, 음악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그림이었으며 지금 생각하면, 몬드리안의 추상미 술과도 같은 그림인 듯합니다.
작가는 펜화 그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많은 펜화를 그리셨는데. 우선 펜화에 대해서 우선 비유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중섭은 어려운 여건속에 스케치북은 꿈도 못꾸고, 담배 곽 은박지에 아이들을 스케치한 여러 그림이나 렘브란트는 궁정화가로서 대관식에 왕과 왕비의 그림을 그렸어야 하는데 자연의 전원만 있는 풍경화를 제출하여 궁정화가 자리에서 쫒겨납니다. 그리고 그도 어려운 경제여건에 휴지조각 주워서 스케치하곤 했답니다.
그런데, 램브란트의 이러한 행위는 고전주의에서 기존의 인식률을 타파하고 인물이 배제된 풍경만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자연주의를 탄생시키며, 미술계의 근대적 기원을 이루며 동시에 사회에서도 이러한 인식의 편재에 대한 타파현상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사회적 변혁을 가하게 됩니다.
이렇듯 작가의 펜화는 작업노트에서 기술한바. 6, 25 전후의 어려운 국내 상황 속에 종이 한장 구하여 스케치하듯 당시 6,25의 전화에 따르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 작가는 펜화의 장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가노트에서 언급한 바 펜화의 여러 오브제 중에 단테의 신곡에 연유해 그림을 그리었는데, 우리는 신곡을 뮤즈인 베아트리체나 또는 피렌체 지방에서 복고풍의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정도로 이해하는데 선생께서는 신곡에서 삶과 죽음. 정죄편이나 새로운 미학적 가치관으로 해석하신 듯합니다.
'95년에는 펜화 개인전을 전시합니다. 펜화로 개인전을 하는 것은 좀 흔치 않을 사례로서 펜화는 한 세기전 독일의 뒤러의 펜화 한 장만 기억될 뿐, 펜화란 그저 습작을 위한 소묘 정도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의 펜화 개인전은 펜화가 소묘적인 느낌의 한계를 탈피하고 미술에 있어서 기법의 장르적 인식을 재확인 해주기도 하며, 펜화만의 장점을 살리는 미술적 확장을 기하셨다,
'8~'90년대에 선생은 교직에서 정년퇴임 하시면서 왕성한 활동으로 작품에 임하셔서 약 20년간에 4천 여점을 그리셨습니다. 가령,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년을 마치면, 일반적으로 여행 좀 가고 휴식을 하지만, 선생께서는 미리 아뜨리에를 준비하시고 퇴임 다음날에는 아뜨리에로 출근하셨다고 합니다. 선생께서는 무엇을 하겠다하는 큰 구호는 내걸지 않으시고, 10년이 하루같이 매일 열심히 한 발짝씩 정진하셨는데, 일상 자체가 그림 그리는 것이었고, 그림이 선생의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명륜동 작가의 집에는 베란다까지도 유화 그림을 묶어서 보관할 정도로 쌓아 놓았기에 필자도 많은 그림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번 전시회 소식을 카톡으로 받아볼 때 작품사진들을 보니 초현실주의 작가라는 그간의 생각이 깨졌습니다. 주최측의 보도자료에서부터 신문지상에서 우리나라 1세대 초현실주의 작가라 하고, 또한 10년전 작가의 그림을 프랑스에서 전시를 하겠다고, 항공료등 일체의 모든 경비를 부담하는 프랑스쪽의 전시회 제안에 작가는 중환자실에서 임종이 다가가는 시간이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한다. 아마 이때도 초현실주의 작가로 파악하였을지 모르지만, 분명 작가에게는 초현실주의를 넘어서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현실주의를 간략히 구슬하면, 20세기 초반 기계문명의 산업화는 인류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는 듯했다. 예술사들은 과학과 이성을 찬미했으나 돌아온 것은 인간의 야수성을 드러낸 1차 대전이었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참담한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허상이다. 세상은 인간의 오감으로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무의식에 잠재된 초현실의 세계이다.
이러한 초현실주의는 다다(DADA)로 부터 연유합니다. 다다란 아무런 뜻이 없다는 것으로 당시 의사인 에른교수이 임상보고서를 바탕으로 프로이트의 꿈을 통한 정신분석학이 대두되며, 초현실주의는 반 문명, 반 전통예술로 기존의 모든 가치 질서를 부정하고 파괴하고 이성, 도덕성, 미학에서 벗어난 내면의 세계, 무의식적 사고 즉, 무념무상의 무의식 상태에서 솟아오르는 영감의 이미지들을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새로운 경지의 미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의 수법을 차용하면서 자동기술법을 그대로 적용했는가 하는 문제에서 초현실주의를 넘어서는 이해로 그것이 무엇인가는 앞으로 규명해야 할 문제인 듯합니다.
작가는 초기 펜화로 미술 수업시대처럼 그림의 이해와 연구속에 그 폭을 넓혀가며, 초현실주의는 물론 색상면에서는 야수파, 추상파, 큐빅(입체파)등 20세기의 여러 미술 사조를 섭렵하였기에 1세대 초현실주의 작가라 하는 점은 이해가 갑니다만, 작가는 '80년대 이후 이러한 초현실 범주를 넘어서서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정신세계의 이차적 사유세계에서 한국적 이미지의 새나 서낭단, 불교의 다각적 시리즈 작품을 통해서 집요하게 탐미합니다.
작픔들에 나타나는 내면의 세계로 지향하는 그림의 기법이나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 그림의 주제인 새, 서낭단, 불교에 내재되어 있는 범위내의 오브제들로 추구하여 무엇인가 주제어에 대한 화두를 이어가고 있는 바, 작가의 그림을 자동기술적인 무의미한 구성으로만은 볼 수 없으며 확고한 주제어들은 무엇을 이야기함인가 하는 점이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기 위한 고찰대상입니다.
이 문제는 작가가 후기시대에 주로 다룬 주제인 새와 불교, 서낭단은 그 무엇인가 하나의 공통적 요소를 가지는 것입니다. 서낭단이 무속이고 불교를 신앙으로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구성원 모두가 갈망하고 성찰과 구원을 지향하는 정신세계의 염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작가노트> 나의 작품세계"중에서
◆ 전쟁의 상흔속에서 인간의 본질과 죽음 당시 단테의 신곡을 펜화로 그리는데 (2절지 100여장) 선과 면, 흑백의 극한 대비를 통하여 삶과 죽음, 그리고 표류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 '80년대에 불교시리즈에서 민족적 미감이나 신화성에 의해서 불교나 토속신앙의 근원적 정신세계를 표현해 보고 싶었다 한다.
◆ 작가의 그림에서 주제로는 새와 서낭단. 불교 시리즈에서 특히 불화(佛畵)는 조형적 이미지보다 불법(佛法)의 세계에 대한 조형적 접근을 시도해봄으로서 조형의 논리에서 상투적 표현성, 또한 그것은 형식적 이미지 배열 방식에서 벗어나 나는 앞으로 쉼없이 그릴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작가는 '7~80년대에 불교에 귀의하시고, 매일 불경을 암송하고 정진하셨는데 이는 어쩌면 펜화로 신곡을 그리던 시절에도 응어리졌던 죽음 세계에 대한 갈등이 내면세계에서 흐르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새의 시리즈 작픔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좋을까 하는 점이며 이 모든것을 한마디로 대변하면 우위 전시회 사진중에 "모차르트 목에 걸린 염주"라는 케치 프레이즈는 평소 작가의 아뜰리에에 있는 소품의 석고상의 목에 염주를 걸어 놓은것으로 이를 작가의 작품에 대하여 상징적으로 이야기 하는 바 모짜르트와 염주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의 패러독스인데 이 점에서 작가는 이중성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던가? 아니면 모짜르트. 즉 음악과 염주(불교)는 그 인간의 내면인 정신세계의 볼 때 서로 연결된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이 문제에 어떠한 이해를 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도 아래 각 주제별애 대한 논고에서 이해를 합니다.
<그림에 나타나는 새의 이해>
'95년에 펜화 개인전에서 봉황 등 다수의 새의 그림도 함께 전시하였습니다. 작가의 노트에서 작가는 새는 의인화된 인간 모습의 표현이라 서술하였는데. 작가는 전쟁터의 삶과 무의미한 죽음에서 새를 의인화 하여 죽음을 승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려 하였던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상의 새, 봉황이 상서로운 새로서 인간세계로 돌아올 때 세상은 태평성대를 의미하기에, 작가는 봉황, 그리고 이간에겐 천상의 세계인 히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모든 새를 비유하여 이상세계로 오르고 싶은 표현은 아니었을까요??
작가의 그림에서 새의 그림으로 삼족오도 나타나는 바, 작품에서 삼족오는 천신신앙의 대상물로서 또한 태양신을 비유하지만 작가의 작품에서는 그러한 神격의 위상을 구가하는 것은 아니다. 봉황이고 삼족오나 부엉이등 모든 새들을 대상으로 그린 점은 전화(戰禍)속에 자연적이지 않고 인위적인 주검들에 의한 고뇌의 표출로 인간사회의 질박한 땅(地)을 박차고 벗어나 승천하고자하는 즉, 이상세계로 회귀를 나타내는 점으로 이해해 봅니다.
https://me2.do/GMeblwzq 원주문화재단 보도자료
(you tube) https://youtu.be/UHdIYX8BCr8 강원미술의 선구자 최홍원을 추억하는 사람들
<서낭단 시리즈 그림의 이해>
서낭단 작품도 '95년 펜화전 당시 일부 전시되었듯이 봉황(후기에는 여러 새들)의 그림과 불교, 서낭단 작품은 작가의 시대구분으로 퇴임 후 후기시대로 동시에 함께 그려지는 듯합니다.
이러한 서낭단 시리즈는 50여 점으로, 모두 전국의 서낭단을 찾아다니며 대상을 보고 현장에서 그린 그림으로 한번은 원주서 출발하여 전라도의 어느 서낭단을 찾아 3~4시간 운전하고 갔는데, 주차 공간이 없고 도로 한 부분이 조금 넓어 주차하면 되지만, 다른 차들이 조심히 통과해야 하는 불편을 줄까 봐 망설임끝에 그냥 돌아왔으며, 다음에 다시 갔다 하는데, 정말 그림에 대한 열정인 듯합니다.
또한, 필자의 고향인 평창에는 송어양식장 샘이 솟는 호수위에 서낭단이 있는데, 호수안으로 "ㄴ" 자로 늘어진 고목나무까지 운치를 더하는 일품의 서낭단이었습니다. 작가는 평창의 서낭단은 앞에 물이 있는 전국 유일의 서낭단이라 하였는 말씀하셨던바, 혹시나 낭만파의 마네, 모네처럼 자연의 색상이 고유색이 아닌 물에 비치는 빛의 색으로 그려지지는 않았을까 합니다.
일반적으로 서낭단은 무속신앙으로 작가의 작품에서는 자칫 착각할 수 있는 오방색(황, 청, 백, 적, 흑색) 아니라 마치 티벳불교의 타초르와 룽다와 같은 소망을 기원하는 5원소(백, 청, 적, 황, 녹) 으로 사머니즘적 형식적인 면의 제 규격도 중시하는 원칙주의자로 그의 작품에서 제 성격에 맞는 원리적 기초를 잘 나타내고도 있다. ( 서낭단의 일반적 인식이해를 위한 역사적인 글은 아래 별지로 첨부합니다.)
◆ "베토벤 목에 걸린 염주. 작가 최홍원"이란 전시장 타이틀 캐치프레이즈에서, 염주는 불교적 상징체로 사용하였기에 염주는 불교적 의미와 베토벤은 문화나 역사에 상반되는 의미의 패러독스입니다. 작가가 이 두 가지의 측면을 수용하기엔, 혹 작가의 취향은 이중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의아하게 보일 수 있는데, 그러나 작가는 이 두 단어에서 그것들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세계에서는 같은 의미의 내용을 구사하는 점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 목에 걸린 염주"라는 캐치프레이즈는 평소 작가의 아뜰리에에 있는 소품의 석고상의 목에 염주를 걸어 놓은것을 이번 전시회에서 작가의 작품에 대하여 상징적으로 이야기 하는바, 모차르트와 염주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의 패러독스가 아닌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하여야 최홍원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전시장에서 실제 작품을 관람할 때 가장 특징은 모든 작품에 새의 눈들이 정밀하게 모두 포인트로 힘주어 그려져 있는 점이다. 이러한 눈의 강조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아마도 가시적 현상계를 넘어서 내면세계를 직시하기엔 사실은 추상적이고 사유적이지만 눈은 이를 들여다 보는 상징적 표현은 아닐까요??
이러한 바른 감상은 무엇일까요??
작가는 서낭단의 그림이나 불화를 그리면서 그 신앙체를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의문에서 대부분의 작품즉, 새, 불교, 서낭단의 하나의 주제에 안착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모든 작품에 눈을 이러한 생각으로 대입을 해보면 작품에 이해는 좀 더 확연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은 초현실주의의 수법을 차용한 듯하지만 초현실주의와는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가의 작품에서 바로 이러한 점을 풀어서 이해하여야 바른 감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후기 작품이 초현실주의를 넘어서는 이해하기 곤혹스러운 작품들에서 새와 불교, 서낭단이 서로 조금씩 혼합되는 그림을 나타내고 있는데, 봉황이나 삼족오의 새와 불교, 서낭단의 오브제들은 모두 신앙물이지만 이에 공통점의 특징은 우리나라에 향토적 정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작가는 이러한 봉황, 삼족오, 불교, 서낭단 등의 고뇌하고 염원하고자 하는 민족적 정서를 도출하고자 새와 불화, 서낭단의 소재를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는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한(恨)이라 하였습니다. 이 恨을 가장 의미 있고 알맞은 단어는 아리랑입니다. 이러한 아리랑은 모든 학자들이 선율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지만 필자의 이해로서는 세계 최고의 가락이라고 하는데, 그럼 예술을 점수로 측정할 수 있습니까?? 모차르트와 베토벤중에서도 누구의 음악이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점은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恨이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도 죽음음 피할 길이 없는 명제로서 작가는 전란시에 특별한 경험으로 죽음을 고뇌하는 바, 이에 수반되는 모든 상념, 즉 피상의 세계가 아니라 이차적 인식의 사유세계로서 민족적 고통과 고뇌의 恨을 응집하고 표출하고자 하는 그림으로 이해가 된다.
작가는 불교에 심취한 모습과 봉황과 수련, 서낭당을 오브제로 하여 우리의 토속 신앙의 서낭당 속에서 태고의 시간과 불교의 겁과, 그 속에 장수의 봉황과 학, 그리고 수련처럼 맑음으로 참과 진실속에 영생과 내세에까지의 시간을 표출한 가장 한국적 삶을 표현한 듯합니다.
가령, 우리나라 미술사에 잘 알려진 박수근 화가의 작품은 우리 민족의 정서인 질박한 질감의 그림으로 그 속에는 치마, 저고리의 향토색 짙은 어머니 그림으로서 민족정서의 표현으로 걸출한 그림인데, 그것은 가시적, 피상의 세계에 외면적 표현입니다.
그러면 민족의 공통된 생각은 무엇일까요??
위의 아리랑에서 보는 민족적 공통사항으로 恨이 그 기조를 대변하고, 이러한 갈등과 고뇌의 정서는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 최홍원 화백의 작품세계는 이러한 사유적 관점에서 민족적 정체성으로 恨과, 恨을 염원하는 민족혼(魂)의 표출이라고 감상합니다.
( 게시글은 여러 예문도 참조하여 일반인의 감상을 위한 이해의 글 입니다. 또한 필자 역시도 일반인으로 본 작품성격에 관해서는 혹 오류가 될 수도 있기에 어느 관점의 고형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습니다.)
◀ 강원의 화가 최홍원 (원주 역사박물관) ▶빈센트 반 고흐(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조금만 돌아서서 보시면 오뚝한 콧날, 이마의 외각선, 아래턱의 하악각과
그리고, 그림에 대한 열정은 이미지 복사, 붙여넣기 한듯 닮은 꼴입니다.
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
<아래 글은 본제와는 거리가 있는듯 보이지만, 작가의 그림중에 서낭단등 무속을 찬양한다기에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라는 역사인식의 문제를 논함>
◆ 삼족오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https://kkks1.tistory.com/2042 <삼족오(三足烏)의 이해>
원주는 그간 현묘탑의 환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바 이제 지광국사탑비와 함께 국보 2점을 가지게 되며 문화도시로 거듭 태어나기에 최홍원 작가의 작품 7,800여점을 기증받아 앞으로 최홍원 미술관도 마련하겠다 하는바. 밝은 역사,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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