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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두 가지 길 역사의 두 가지 길     역사는 사실이란 단어로 어떠한 관형구도 필요없는 사실 그 자체가 역사이다.그러면 사실의 역사와 진실의 역사는 무엇일까?일반적으로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팩트이지만,  진실이란 단어는 자신이 가장 믿고자 하는 신녕의 의지를 포함하는 단어이다.진실이란 단어의 이해를 위해서 이해하기가 쉬운 정치적 용어를 예로 들면, 정치에는 흔히 좌파와 우파의 상반되는 용어가 있다.우파든 좌파에 어느 진영을 선택하든 그 자체는  잘못은 없으며, 사실이든 허구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믿고자 하는 자신의 신념이  진실이다. 즉 진실이란 자신이 믿고자 하는 신념의 개념적 용어이지 팩트(사실)의 용어는 아니란 점이다. 하나의 역사에서는 이러한 사실의 역사와 진실게임의 두 가지 역사가 존재한다.이 글에서의 논고는..
평창의 사서인 『길위의 역사책』 분석과 재정립 평창의 사서인 『길위의 역사책』 분석과 재정립 2,009년 평창문화원에서 출간한 『길위의 역사』( 글; 김진백. 공동답사; 정원대) 책의 발행에서 평창의 역사에 관심과 노고에는 감사를 합니다만, 동 책은 평창의 개괄적인 역사를 포괄한 것은 아니라 古城이나 역원, 도돈의 거슬갑산 답사와 이에 따라 문헌적 자료등으로 199쪽으로 서술한 역사책이다. 동 책은 2009년에 서술하였으나 10 여년 사이에 역사의 발전에의하여 새롭게 확정할 필요가 아니라 책의 대다수 평창 역사가 오류라는 점으로 이에 분석과 재 정립을 합니다. 역사는 시대의 발전에 의해 정보가 방대해지며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되고. 새로운 유적과 유물의 발굴과, 또한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천문학의 이용과 방사선 연대측정의 정밀화. 유전자 감식 ..
< K - 축구 > 내일 월드컵 태국과의 예선전 출전 선수 명단의 발표가 있다. 여기에 축구팬들은 임시 감독은 이강인 선수가 명단에 포함되는가에 관심이 뜨겁다. 오늘도 어느 정치인은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는등 국민적 여론이 갈리고 있다. 여기에 문제는 이강인 선수가 지난 아시안컵 4강전에서 물의를 일으킨바 세계적 뉴스가 된 점에서 국민적 감정이 치솟고 흥분하였는데 이강인 선수를 제명해라. 또한 유능한 선수로 감독은 태국전 명단에 포함시키는지, 제외할 것인지 감독의 뜻에 따랐는데 이것은 축협이고, 어느 정치인이고, 국민이고 모두가 잘못된 사고 방식이다. 선수가 프로에서 뛸때와 국가대표로 뛸때는 분명 다르다. 분명 국가대표 선수들은 자긍심과 애국심을 가지고 스포츠를 통하여 국위 선양을 함에 국민적 관심사..
《산불 방제책 대안은?》 《산불 방제책 대안은?》 근간에 우리나라는 산불이 많이 발생합니다. 양양에는 양간지맥이라하는등 산불방제에는 헬기가 50대가 더 다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산불 예방의 방제책이 아니라 산불 난 후의 뒷처리 과정의 진화책입니다. 그래서 산불 방제책에 헬기가 필요하다는 식의 말들은 잘못 쓰고 있는 것 입니다. 예전, 필자의 글에서는 산불 방제의 근본대책으로 두가지 사항을 들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양간지맥이라 하는 산사이의 산 하나는 모조리 벌목하고 소나무가 아닌 수종을 식재한다. 또 하나로서는 산불에는 주로 소나무가 잘 타는데 이에 최소한 낙엽의 갈비등을 깨끗하게 정리하여야 한다. 산불 방제책으로 이 두가지 대안에 대하여 피력합니다. 예전에는 소나무가 송진이 있어서 땔감으로 선호하였고 사극나무도 모두 긁..
와우 미탄!! 와우 미탄!! 와우 미탄의 청년단체는 문화 체육부의 관광의 별 특별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와우 미탄!! 의 케치프레이즈는 앞으로 미탄의 이니셜 마크로 미탄의 대명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미탄은 가리왕산 끝자락에 위치하여 옛날에는 정선의 관문 성마령을 넘는 산간 마을로 자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육백마지기의 청옥산은 명산으로, 자연의 보고로서 이 시대에도 두 가지 사안으로 단연 전국 최고의 레져공간으로서 개발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또한, 미탄은 카르스트 지형으로 백룡동굴과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 돈너미의 돌리네와 카르스트 지형의 계곡에 솟는 용천수는 용존 산소량이 높고 한류 어종의 앙식에 최적지로 송어의 고향입니다. 페북 맨 첫글에서는 평창의 시원인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과 청정송어의 고향..
《이 시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시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매일 아침 뉴스를 보고 나서 양분된 노선으로 사람들 스스로 정치를 한다. (이 글에서는 좌.우. 양 진영중 한쪽을 편애하지 않고 양쪽이 모두 똑같이 대상으로 이야기 합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고 국민은 자기의사를 밝히면 될텐데 국민들은 저마다 삿대질 하면서 정치를 한다. 아래 현수막 사진은 집 앞에도 걸려있고 시내 거리마다 점점 더 과격한 구호를 외친다. 이러한 구호들은 당사자에게 얘기해야지 시민에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론에서 보면 수사학자 키게로의 선동은 현상계의 모방이기에 실제가 아닌 선동정치라고 할 수 있다 현수막은 지정게시대 이외에는 위법이다. 따라서 벌금이 고지된다. 하지만 법을 만들고 정치를 하는 국회의윈들의 과격한 선동..
《송어의 고향, 평창》 《송어의 고향, 평창》미탄의 송어는 예전 '60년대에 박경원 강원도 지사께서는 우리나라에 송어를 처음 전래하고 양식하여 전 국민의 식단에 그것도 외식을 하기에 휼륭한 송어 식단을 새롭게 창출하였습니다.요즘은 송어사료가 있지만 과거에는 제천. 원주.강릉등지에 푸줏간에 내장들을 가져다 삷아서 잘라서 먹이를 만들었고 80년대 초 마이카 시대 이전에는 판로도 없고 힘든 시기였으며 어쩌다가 미군 헬기가 송어 수송하려 오면 저희는 헬기 구경하려 상리 양어장에 얼른 뛰어가고, 사람들은 새카맣케 몰려들어 헬기 구경하기 비빴지요. 그 시절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헬기가 신기하게 보였습니다.전 국민이 송어 모르는 사람 있어요 ? 안 먹어본 사람 있습니까?우리나라에 송어의 시원은 박경원 도지사가 천 개의 알을 부화하여 송어는..
《오대산의 연원을 가지는 수항리사지 》 《오대산의 연원을 가지는 수항리사지 》 강원도 기념물 제 49호의 평창 수항리사지 (平昌 水項里寺址)는 월정사에서 수항천을 따라 12km 지점인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 143번지로 수항천변에 소재해 있다. 수항리사지는 결손된 탑으로. 두 기의 옥개석만 남아있는 사원지로 2,013 년 수다사 학술 세미나에서 “多”자의 명문기와와 “태백곡 수다사”란 명문이 세겨진 촛대가 출토되어 이곳이 삼국유사 권5) 자장 정률편에 기록된 자장율사가 말년에 명주땅에 거처하였다라는 수다사로 밝혀졌다. 이 사항이 유동성이 있는 유물에 의한 기록이라면 필자는 조선 실록에서 水多洞(수다골)이란 기록과 고지도 4편에서 청심대 아래에 “水多”라는 지명을 찾아 밝히고 있습니다. 중국에 4대 불교성지로 문수보살 성지- 오대산. 보현보살 성..
《봉평마을의 정월 대보름 축제에 제언》 《봉평마을의 정월 대보름 축제에 제언》 어제는 우리의 고유 민속명절인 정월 대 보름이었습니다. 오늘 군 의회 부의장 김성기님과 유영복님의 어제 봉평마을 정월 대보름 축제행사 사진을 보고 다른 지방 뉴스도 검색하였는데 봉평이 가장 바람직한 정월 대보름 축제를 하였습니다. 상당히 고무적이기에 이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민족의 4대 고유 명절은 새해를 맞이하는 설날과 파종의 단오와 추수 감사제의 추석 또한 음 7, 15일 백중도 있습니다만 민족 최고의 축제는 정월 대보름 입니다. (백중은 道家에서 말하는 삼원중 하나입니다. 상원(1,15일), 중원은 (7,15일), 하원(10,15일) 로 천상의 선관이 인간의 선약을 밝힌다는 날입니다) 설날을 새해를 맞이하여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고 웃 어른에게 세배를 드리는 가..
《가라허에 세운 적멸보궁의 碑 》 《가라허에 세운 적멸보궁의 비 》 적멸보궁 뒤엔 1m가 채 되지 않은 비 하나가 서 있었다. 자장율사가 부처님 정골사리를 봉안한 장소라는 비석이다. 비석엔 5층 마애불탑과 사리를 모신 그릇 형상이 앞뒤로 새겨져 있다. 이 탑비를 사자암 감원 해량 스님은 불뇌보탑(佛腦寶塔)이라고 했다.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 」에서 아래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려 말 학자 민지(閔漬 ) “오대산을 찾아가 지로봉에 올라 부처님의 두뇌사리와 정골사리를 봉안하고 가라허 (伽羅墟)에 비석을 세웠다. (비석은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그 사적을 기록하고 이어서 월정사를 창건하고 13층 석탑을 세워 사리 37매를 탑심(塔心)에 봉안하였다.(오대산 본전기)” 탑의 내용으로는 5층 마애불탑과 사리를 모신 그릇 형상..
오대산의 국가적인 불사(佛事) 오대산의 국가적인 불사(佛事) 오대산의 오대는 백만 군중을 호령하는 것과 같아 비로봉(毘盧峯)이라 한다. 아래로는 동에는 만월(滿月), 서에는 장령(長嶺), 남에는 기린(麒麟), 북쪽에는 상왕(象王)과 중앙에는 지로(地爐)가 있다. 이러기에 오대산이라 하는데 모두 여러 부처와 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다. 옛날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경하려 대송정(오대산)을 찾아간 이후 신라 왕자 정신과 효명 두 태자가 유람하다가 하서부(강릉) 성오평에 도착하여 형제 두 사람이 함께 이 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진덕왕 5년. 651) 정신태자는 중대 남쪽 기슭 진여원(眞如院)의 터 아래에 초암을 짓고 거처하였고 효명태자는 진여원에서 동북쪽으로 가서 북대에 초암을 짓고 거처하였다. 형제 두 사람은 한마음으로 동대에 1만의 관세..
《월정사 팔각탑의 건립시기의 재 정립》 《월정사 팔각탑의 건립시기의 재 정립》 월정사 팔각탑에 여러 학자들의 고찰에서 많은 연구의 성과도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연구에 본 탑의 건립시기를 11세기 초로 잡는 견해에서 지난 2년전에 조계종에서는 본 탑 기단 아래서 출토된 송나라 숭녕중보의 연대에 의해서 건립 시기를 12세기 이후로 조정 발표하였습니다. 이로써, 월정사 팔각탑의 건립연대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정립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의 동 탑의 연구 학자들은 다른 탑과의 편년적 고찰로 탑의 건립시기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만 일반인인 필자로서는 건립시기가 왜 중요한지는 이해하기는 곤란합니다. 월정사 팔각탑은 우리나라 1,200여기 탑중에서 최고 크고 탑파의 양식은 시대를 넘는 모든 양식을 가장 아름답게 구현한 탑으로 한 부분의 탑재의 편년적 고찰로 조..
《평창 의병 7.8.9》 《평창 의병 7》 ※한말의병 속의 봉평의병 전 글에서 북평면 봉평리라는 기록에 의해 최돈호 의병장은 정선군으로 기록하지만 원용팔 의병의 해산군이 2차로 평창과 인제에서 봉기했다고 기록핲니다. 당시 재판기록의 하나엔 일인 고등계 형사는 왜 평창을 정선이라 그러는가? 열등의식을 갖고있는가 하는기록도 있습니다만...최돈호 의병부대는 물론 봉평사람들로 구성된 의병일테지만 이 기록에 더 확증적 사안을 찾아 기록하겠습니다. 그러면 을사. 을미. 정미의병에 평창에서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 한말 의병상황을 개괄적으로 이해해 봅니다. 한말 의병은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의병 사상자는 10만으로 추정하며 일본군 수비대는 일만 명 사상자가 발생하는데 그중 강원도 의병은 수비대 2천명을 사살하는등 강원도는 ..
《오대산 사고 실록, 오대산으로 돌아온다》 《오대산 사고 실록, 오대산으로 돌아온다》 오대산 사고본 실록과 의궤가 오대산 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된다 필자는 오대산 사적기에 민지의 기록이 좀 주관적 번역인듯 하여 원문판을 보려고 오대산 박물관에 갔더니...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월정사 입구에 있는 왕조실록의궤박물관 전시실 리모델링 공사를 위한 임시휴관 안내의 플래카드가 걸렸고 문은 닫혀 있었다. 박물관이 새 단장에 나선 건 조선왕조 실록과 의궤가 110년 만에 타향살이를 마치고 곧 환지본처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제1대 왕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 (1392 ~1863년)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다. 의궤는 조선 왕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내용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국가 기록물이다. 조선왕조실록과 국보 제151..
《현재 월정사 탑은?》 현재의 월정사 8각 9층 탑은??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 (국보 제 48-1호) ▶ 현재 월정사탑은 보존을 위해 덮개로 포장되어 있다. 시민들과 함께하던 천년보물 월정사 팔각구층 석탑은 노화로 인하여 포장속으로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탑이란 우리나라 고유양식이고 월정사 탑은 1.200여기의 탑중에 가장 장대하고 모든 탑의 각 부분의 양식을 모두 표출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우아한 미를 자아내는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심오한 불교의 우주관을 새기며 우리나라 문화를 대표하였습니다. 지난해 상부의 함몰문제로 복원공사중 불가피하게 포장을 하여 보존한다는데 어떠한 결함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상식적인 이해는 다르다는 점을 피력합니다 석조보살상도 노후화로 인하여 보존처리후 실내인 박물관에서 전시합니다만, 아래의 지..
《캐롤송은 어디 갔는고?》 《캐롤송은 어디 갔는고?》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그 옛날 겨울 밤길에 저 멀리서 들려오던 추억의 징글벨 소리가 이젠 사라졌다. 한산한 이브날 밤 그냥 집으로 가야되는.. 어쩌면 이 시대는 퇴조하는가? 원흉은 그넘의 지적소유권이다. 작가. 화가. 학자님들은 지적소유권이 돈을 벌어주는 인세보다는 표절이란 미명의 괴롭힘만 작용합니다만, 음악인들은 죽어서도 조횟수로 돈 따먹는 불공정 게임이 아니라 할 수 있나요? 지금은 음원 한 곡이면 가수나 작곡가는 배부르지만 종내에는 결국 자기 목이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방송이나 길거리에서 울릴 땐 여러 장르의 캐롤이 지금보다는 많이 팔렸을 것이다. 지적 소유권이란 미명에 겨울철이면 신나던 징글벨 소리도 못들어본지 몇 해되고 이젠 점점 귀머거리가..
《김정호의 동여도속의 오대산》 《김정호의 동여도속의 오대산》 오대산과 월정사는 자장법사에 의해 문수신앙의 화엄성지를 이루는 성산(聖山)으로 여겨왔다. 비로봉,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의 오대산의 다섯 고봉들이 두로봉을 중앙으로 하여 연꽃잎에 싸인 연심(蓮心)같은 산세라 하여 복덕의 힘을 가지고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는 성산으로 회자되고 있다. 오대산 월정사는 “나라 안의 명산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 (『삼국유사「대산월정사 오류성중 (五類聖衆)」)라고 하였으며, 삼국유사 권 3의 대산오만진신에서 "오대산은 백두산의 대맥"이라 하였다. 그럼 " 백두산의 대맥"이란 어떤 뜻일까요? 월정사와 상원사의 역사를 논하기 전에 오대산에 정기라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에 대한 이해로 필자의 ..
《월정사 13층 탑의 예찬론》 《월정사 13층 탑의 예찬론》 오대산의 개산의 자장율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중국에는 4대 성지가 있는데 자장에 의해 수입된 청량산 (일명 오대산)의 문수신앙 단 하나만 들어와 오대산은 한국 불교의 성지가 됩니다. 따라서 오대산은 우리나라 불교의 원류이며 조선왕조에도 숭앙받는 사찰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조금 미루고 우선 저의 관심사를 조명합니다. 월정사 탑은 국보 48-1호 석조보살상은 국보 48-2호 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있는 현재 9층 석탑에 필자 단 한 사람은 십여 년 전부터 13층 석탑이라고 주장하며 문화재청에 이의 신청을 했었으며 아직 이 연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고려말에 민지가 13층 탑이란 기록의 문헌을 찾았으며 이제 실측을 통한 13층 가상도면을 만들면 논리가 정립된다아래에 ..
월정사 8각9층석탑이 13층 탑이었다 월정사 8각9층석탑이 13층 탑이었다(※ 월정사탑이 13층 탑의 기록)오대산의 개산에는 자장법사의 문수신앙의 성지로 알려지는 기록에 시발인 삼국유사 (권5) 자장 정율과 민지(閔漬) 의 기록을 다시 찾아보던 중 고려말 민지의 기록에서 월정사 13층 석탑의 기록을 찾았습니다.고려 말 민지(閔漬)가 지은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그 후에 명주(현 강릉 지역) 오대산을 찾아가 지로봉(地爐峰)을 올라 부처님의 두뇌사리와 정골사리를 봉안하고 가라허(伽羅墟)에 비석을 세웠다.(비석은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그 사적을 기록하고 이어서 월정사를 창건하고 13층 석탑을 세워 사리 37매를 탑심(塔心)에 봉안하였다 .(위 부분은 오대산..
페이스 북 2《평창의 시원 》 《평창의 시원 》 평창에 히늘이 열리고 이 땅에 처음으로 살았던 평창의 선조는 누구일까요? 수 년전 평창읍 하리에 청동기 유적을 강원 고고문화원이 시굴 조사 하였다. 여기서 청동검과 고인골이 출토 되었으며 동아대 고인골 학자 김재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2,400년전의 20대 여자의 인골로 판명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고조선 말기시대이다. 하리 고인골은 우리나라에서는 최고 오래된 전신상으로 이후로는 300년 후에 출토된 인골보다도 10cm 더 큰 장신으로 전신상 옆에는 비파형 청동검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우리는 좋은 집 짓고 살면서 조상의 묘도 잘 관리한다. 하지만 평창시공 의 최고래의 이땅의 조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인골의 유품은 고향을 떠나 춘천박물관 창고에 전세살이를 하고 있다. ==..
일제때 평창군 지도 일제때 평창군 시내 지도 아래의 지도는 일제때 2차(1911년), 3차(1915년)의 강원도 측도시 평창군 지도를 부분 확대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중앙 박물관의 일제 박물관 문서) (1) 평창읍 (1911년 측도) 1) 대로(大路)는 영월서 도돈-약수- 하평을 지나 평창으로 들어오는 도로는 현 읍사무소로 직선으로 꺾어 올라 곡각으로 시루목을 넘어 대화로 빠진다. 이 도로는 주진교는 없이 주나루로 강을 건너고 또한 대화 신리에서 모치 재를 넘어 강릉으로 간다. 당시 신리에서 장평- 봉평은 간선도로이다. 2) 중로(中路)천변리에서 중리로 올라가 다리를 건너 상리천 종부쪽으로 간선 도로는 미탄으로 향한다. 3) 실선은 소로(小路)를 표시함. 4) 왼쪽으로 전선이 영월서 강릉으로 넘으며 군청으로도 연결했다..
「강원도 고적대장」의 평창 기록 (1부) 「강원도 고적대장」의 평창 기록 (1부) * 출처 – 국립 중앙박물관의 조선총독부 자료내에서 발췌함 ◆ 위 강원도 고적대장의 내용중 문서에 기록한 1)진부면 탑상리 탑 ,2)진부면 수항리사지 탑 5). 중리탑. 6) 상리 탑. 7} 하리 탑 9) 유동리 탑에 관한 기록. 그리고 5층탑이 아래의 문서에서는 3층탑이라 하는데 이러한 문제는 월정사 8각9층 석탑과 이 문서에서는 탑상리 탑과 상리탑이 3층, 5층으로 각각 기록된 바 아래에서 이 문제를 연구토 합니다. 이어서 마지막 장에서는 월정사 8각 9층탑이 원래는 13층 탑 아니었던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빈틈없이 연구합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10여년전 필자의 블로그에 남긴 게시글을 이번 한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 평창 지리 정보의 모든 것을 논하며 이 점의..
송계산은 원래 이름은 여름산이다 송계산은 원래 이름은 여름산이다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평창읍의  장암산과 남병산, 청옥산을 잇는 삼각 트라이 앵글의 고원부에는 장바우가 있으며  장암산 능선에서부터 산등성이가 길게 이어지는 긴등의 산을 현재는 송계산이라 부른다. 하지만 송계산(松契山)이란 명칭은 일제 후기에 불리어졌으며 일제 초기까지도 동 산은 여름산(餘蔭山)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따라서 아래의 여름산과 송계산의 분석 연구에 의하여 원래의 여름산의 산이름으로 다시 개정되어야 한다.( 현 지명으로는 송계산으로 되어있다) ◆여름산의 고찰1) 「평창군 지명유래」에서는 "송계산은 상리에서 주진에 이르는 산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주;  「평창군 지명유래」  평창문화원 발간. (2,000, 12.) p 17.2) 「평창군 지명..
평창의 산 이름 바로 찾기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평창 산명의 재고 엄기종 ◆ 두타산(평청 수항리) ◆ 발왕산 ---------------------------------------- ◆ 국가 지리정보원 기록 평창군 도암면 용산리 발왕산(發旺山)의 왕(旺)을 왕(王)으로 정비해 2002년 12월 27일 발왕산(發王山)으로 변경 고시했다. 옛날 도승이 이 산에 팔왕(八王)의 묏자리가 있다 하여 팔왕산이었으나 일본강점기 때 일왕(日旺)을 우상화하기 위해 왕(旺)으로 왜곡한 것을 바로잡았다. 평창군 진부면 장전리와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에 걸친 가리왕산(加里王山)과 평창군 대화면 주왕산(住王山)도 같은 이유 등으로 정비됐다. 평창군 방림면 방림리와 대화면 상안미리의 중대갈봉은 우리 문화를 비하하고자 어감이 좋지 않은 단어를 사용해 ..
문수신앙의 성지 오대산 불교권에 수항리사지의 위치는?? 문수신앙의 성지 오대산 불교권에 수항리사지의 위치는?? 3)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본론 2) 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2013. 6. 12. 오늘 필자의 블로그에 이 글이 검색되어 오래전의 글이라 기억이 희미해서 무엇인가 다시 보았습니다. 일반적인 탑의 이론을 넘어서 윗 글에서부터 출발하는 탑의 앙각의 개념을 도입하여 후일 수항리 사지 탑이 3층임을 증명하면서 논문을 쓰며 지금까지 탑에 이론들이 역사학자들의 각 탑들의 공통적 특성 즉, 팔부증상이나 삼산화 문양이나 안상등 여러 특징의 기록으로 동시 연대를 측정하는 논문만 많은데 필자는 수항리 사지 탑 논문에서 탑의 새로운 조형성의 공식을 만들어 탑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습니다. 지난해 장서각에서 왜정 때의 유적자료에서 수항리 사지 탑은 3층 ..
9회말 홈런을 친 동창녀석(후편) 08.11.14 15:44 아주 오래 전,,,,,우리들의 옛날시절, 그러니 께로 2-30년전으로. 오늘 장사는 완전 정복 쎅션 28-12장을 펴 놓게. 우리 28세때 12월의 어느 한 토막을 내 일거 볼거니.... 아침 햇살이 창호지 문틈 사이로 밝게 들어오는 어느 겨울 아침 날이었다. 새마을 운동의 대명사인 딸딸이가 울 집 앞 신작로를 가로지르는 소리가,,,떨떨떨떨하다가 푹~멈춰서며 겨울 아침의 정적을 무너 버린다. 지금 들으면 정겨운 그 소리가.... 난 그 소리를 듣고, 문득 아~~ 오늘이 또 푱창 장날이구나. 그래,,, 그럼 오늘은 어데서 또 딱지를 긁어볼까?? ( 딱지란 촌놈들 장에 오면 한판 후려 먹기 하는 쉬운 말로 텃세 받는 거다.) 하평 미륵 땅 꼬까리 돌아서 내려가면 양지바른 동네,,,..
"平昌"이란 지명 유래의 분석연구 "平昌" 이란 지명 유래의 분석연구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평창에서는 지금까지 3종의 지명지가 발간되고 이에 기초가 되는 읍면지에서 평창의 각 동리에 대한 지명의 연구에서도 평창 지명의 제일 기조를 이루는 “평창(平昌)”이란 무슨 뜻인가 하는 점은 연구는 없었다. 그러기에 이 장에서 "평창"이란 지명의 어원의 출처와 그 뜻의 고증을 합니다."평창"의 어원의 뜻은 공자의 고향 "창평"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에 평창의 향토사학자 엄기종님의 선행 연구기록이 있어서 를 인용하며 분석합니다. 엄기종 07.01.13 02:51 ◎ 평창(平昌)이란 地名 由來平昌은 三國時代에는 高句麗의 領域으로 郁烏縣(일명 于烏縣)이라 불리다가 신라의 三國統一 이후 景德王 16년(서기757)에 白烏縣으로 改稱하여 奈成郡(現 영월군..
거슬갑산(琚瑟岬山) 의 위치 연구 거슬갑산(琚瑟岬山) 의 위치 연구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이 장에서 고찰로는 거슬갑산은 강원도 7대명산으로 평창읍 도돈리의 오도산이 거슬갑산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증적 고찰연구로 현재의 백덕산이 원래 거슬갑산이라는 점을 제시하며, 다음으로 수정산 조명시 수정산을 평창의 진산으로 보았슬 때 백덕산 (거슬갑산 )은 이에 대한 증조산이 되는 점으로 보아야 하는 문제에 거슬갑산은 수정산의 연구에 선행되는 문제이기에 먼저 거슬갑산에 대한 고찰을 합니다. ◆ 도돈리의 거슬갑산이란? ◎ 오도산이 거슬갑산으로 불리어지는 점의 이해 현재에 통용되는 거슬갑산(琚瑟岬山) 은 평창읍 도돈리 산 46번지로 해발 540m 이다, 산 정상에는 평창군에서 세운 오도산(悟道)이란 표지판이 있는데 오도산 아랫줄에 괄호속에 작은 글..
「평창지리지 총람」에 대하여 「평창지리지 총람」에 대하여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1960년대 근대 도시하의 경제발전 속에 도시로의 이촌향도의 공간적 재편이 급하게 이루어졌으나 이주한 산업도시는 그냥 살아가는 공간이 었슬뿐, 삶의 애착이 깊게 스며든 장소는 아니었다. 또한 이후 세대는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0년대에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80년대의 권위주의적 수동적 생활상에서 민주주의의 생활상으로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삶터의 인식에 다른 전환점이 되었는데(지방 자치단체는 ’50년대에 이승만정권시 실시되다가 이후 중단하였지만)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자기 권역의 역사와 문화적 상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첫째, 해당 권역의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군지(郡誌)의 간행이 되었고, 역사 유적에 대한 ..
평창읍 천동리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2022.05.10. (평창서 청동기시대 추정 매장시설 2개·돌화살촉 9점 등 발견) 10일 평창군에 따르면 지난 1일 한 주민이 옥수수경작을 위한 고랑 내기 작업 중 토사 아래 돌이 걸려 이를 걷어내는 과정에서 유물을 발견, 문화관광과에 신고했다. 발견된 문화재는 매장시설 2기와 돌칼 1점, 돌화살촉 9점, 대롱옥 6점, 붉은간토기 1점 등 유구 및 출토 유물로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군은 토지 소유주에게 발견 경위를 조사해 문화재청에 신고했다. 또 관련 연구소의 전문가를 통한 현지 조사와 유물 감정 평가 등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시균 문화관광과장은 "돌칼, 돌화살촉, 대롱옥 등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자료들이 함께 출토돼 의미가 크다"며 "문화재 조사와 진행 중 불편이 없도록 세심하게 살피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