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창의 국구사우

(3) 평창에만 존재하는 국구사우를 어떻게 볼 것인가??

(3) 평창에만 존재하는 국구사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 여름 엄기종님과 초면의 대화에서 좋은 말씀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국구사우의 문제에서 어떤 사람은 옛 사우 터가 어딘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비해 엄기종님은 터가 아니라 사당의 부자재중 하나로 추정되는 배흘림 기둥의 확인이 중요하지 않냐는 말씀에 대하여 모든게 국구사위의 것이라면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다들 중요하겠읍니다만 지금에는 시루목 어느 상가 기둥으로 쓰이고 있는이 배흘림 기둥의 탄소연대 측정으로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말씀에 대해서 저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이 기둥이 정조때 옛 원우터 자리에 다시 증축시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저의 생각으로는 태조가 명했을때 제대로된 건축물을의 사당을 지을때 부자재인가 의심이 들어 다시 자세하게 관측해 보았읍니다. 오백년이 경과된 목재들은 나이테 사이에도 가로로 말라 함축되어 갈라터지는 현상들이 생기는데 그런것 같지는 않아  오백년은 경과되지 않은 듯 합니다.

 

   하지만 이 기둥은 정확한 엔타시스(배흘림)은 되지 않은 민도리 기둥으로  보아야 합니다. 민도리에서도 장혀를 돌출시킨 굴도리식 기둥입니다. 둘레 폭에 비해 길이는 작은편이나 이는 재 사용시 약 두자 이상은 절단했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본인의 생각으로는 4칸반짜리 사우를 짓는데 사용하기엔 목재가 굵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추정하는 것보다 확인이 중요하기에 말씀대로 탄소연대를 측정한다면 아마도 이 목재와 비교되는 남산 송학정 기둥도 함께 해 보면 더욱 상대적으로 자세한 추적을 할 수 있고 또한 평창시내 어느 도로가에 방치된 3개의 잘 다듬어진 주초석은 지름 이 30센티 정도의 4칸반의 사우의 기둥 주초석으로는 알맞은 싸이즈이고 이를 쓰는 건물이 무엇이엇던가 하는 점에 의심이 이 부재도 함께  측정해봄도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전문 석수쟁이가 깍지 않은듯하며, 용처도 알 수 없는 한쌍의 석물도 사우의 현관 계단 장식 아닌가 추정되기에 합 4점의 탄소연대를 측정해봄이 좋을 듯 합니다.

 

   탄소연대 측정은 대기물이 많아 기간이 좀 걸리는것뿐이며 개당 분석 요금은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기에 위 4개를 개인부담도 그리 어렵지는 않은 상태이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읍니다.

 

  그래서 정조의 명으로 국구사우의 재 건축 싯점인 1788년도 ± 오차 한계값(이는 히로시마 원폭투하및 현대의 공해에 의해 탄소가 변형되어 C12가 자연값보다 많아진 상태로 아마 10년 내외의 오차값)내에 나와서 원하는 값을 얻었다손 치더라도 사우의 부재임을 누가 확정해 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즉  검사된 부재가 1788년이라 하여도 이를 사우의 건축물 부재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를 기호로 나타내면  "A = B"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만 A = C 이고  C = B라는 사실에서 귀납적으로 A가 C로 미루어 볼때 B라고 대입적 논리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 A=C 이고  B=C이기에 A=B가 될 수 있다) 의 논법을 인정해 주어야 하는데 이를 누가 인정해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C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이어야 하는데 C는 무엇이라야 하는 것일지 아직 본인은 알 수 없읍니다. 그러기에 국구사우 터가 맞다고 아무리 표지판을 때려 박아도 이를 누가 증명해줄 것인가...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하는 난제를 앉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우스꽝스런 예를 하나 들어 본다면 지난 "82년 영월문화원장 박영규옹은  영월 노루목의 무연고 묘 한기를 김삿갓의 묘 아닌가 하고 추적하여 학계에 문의했을때 학계는 반대하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다수결의 의견으로 그 묘가 맞다고 인정해 줍니다. 여기서 정답 아니면 오답 둘 중의 하나이기에 다수결이란 확률은 필요가 없고 오직 정확성을 기해야 되는데 목적하는바가 찬성쪽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욕심에 의해 찬성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운하게도 틀려서 오답이 되어 이후 김삿갓 종손님들은 평창 천동리에 묘를 찾아 여섯번이나 성묘를 지내고 갔다고 천동리 현지인의 증언을 하고 있읍니다. ( 물론 박영국옹이 역사학자 출신이었다면 김삿갓 일대기에 자체 모순을 파악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우스꽝스러운 수선은 떨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렇듯 국구사우에서도 이런한 탄소 연대 측장에 연대가 1788년+ 오차한계값 범위속의 값을 가진다 하여도 누가 또는 어느 기관이 맞다고 판정을 해 줄 수 있읍니까??

 

  우리는 이 판정에 앞서 조선시대의 평창의 관아의 건축분 양식을 자세히 모릅니다.

세조때에 관헌의 도표를 보면 군관39인, 아전16인, 지인(知印) 12인을 두었다. 그리고 사령(使令) 12명, 관노 24명, 관비28명을 두었다 이로서 약 100여명의 기거하는 사무실및 장비실 그리고 관노나 관비의 처소까지 관아는 많은 공간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호구록에 동별당, 서별당, 그리고 이조 초기의 어운해 군수의 제영시에서 군수의 관사인듯한 동헌만 알 수 있다.

 

  위의 탄소연대 측정값이 1788년이 나오더라도 100여명과 동오군 130여명의 특별기간의 주거 공간이 있어야 할텐데 이에  새로 지은 건물 값인지도 모를 일이기에 제 3자가 이를 증명 단언해 주는 값은 부정확하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본인은 국구사우 터가 평창중학고 고목나무 옆 테니스 백보드장 앞(중리 343번지)라고 주창한바 1년후에 이에 일제 강점시의 최초의 지번을 떼어 확인결과 社寺地라는 일어 표기가 있다고 이를 증명까지도 다른 복작한 틀이 잇어서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본인은 이 어떤 부분에 인터넷강에 소가 걸렸다. 조사중에 조사관은 3번이나 피의자의 전화를 받으며 자기의 측량도면이 이보다 1년전에 띄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본인은 조사관보고 그럼 내가 10년전에 법률책을 샀다고 지금 판사가 됩니까?? 그리고 또한 내가  먼저 주장하였지만 상대도 추정분이기에 아문젠이 맨발로 가도 요즘식으로 GPS라도 만들고 따라간 스콧경보다 먼저 남귿점을 밟으면 그게 최초의 기록 아닌가 하였다. 그래도 본인은 조사 후에 헤아짐에서 조사관으로부터 고맙습니다가 아니라 정말 존경스럽스니다 라는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토지 등본에 사사지를 국구사우라고 누가 인정해 줄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보면 이런 옥신각신한 다툼은 필요없는 것이다.

 

  그래도 이 모든 것을 모두 옳다고 믿고 다음으로는 문화재 신청을 하여야 할 것인데 이는 현존하지 못하기에 민속문화재 대상은 아닐 것이고 사적지나 유물등으로 신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이를 문화재가 되면 퍙창이씨의 제를 지내는 것으로 연상하지만 그 제를 시연하는 것은 무형문화재 입니다. 국구사우의 문화가 무형 문화재로 가기 위해서 이러한 말초적 문화에 의존해서 결실을 이루기는 어럽다고 하기 보다는 아예 방향이 틀렸다고 해야 한다


  그러면 국구사우가 무형 문화재가 되기 위해서는 사당 터고 부자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은 주관단체가 결성 되어야 한다. 이씨 대종회이든 평창의 유관단체가 주관하여 형편에 맞는 곳에 사우를 다시 짓고 사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구사우의 제례의 보존회를 결성하여 제레의식으로 국구사우제레를 시연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엔 복식(服飾)과 제찬(祭饌)을 제대로 갖추고 평창 이씨 대종회에서 천거하는 사손이 작헌을 하고 시작하는 제례에 문화 그 자체가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요건에 필요한 역사성·학술성을 기본적으로 갖추었을때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 국구사우 기록에 의해보면 서각( 屛角) 등만 남아있을 뿐이라는 문장을 보면 서각이란 1품의 벼슬이 허리에 두르던 띠로 이것은 왕족의 제례예법을 의미한다. 길례의식(吉禮儀式)으로는 정 1품의 복식으로 제를 지낸다면 왕족의 예법이기에 국조오례의 전교편의 왕실의 예법을 따라 사향 친제의 축문을 준용하도록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이다.


  평창을 고향으로 하는 유일한 성씨로 종파를 넘어선 평창 李氏들의 하나의 사당을 재 추진함은 종친들을 넘어선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평창문화의 밀린 숙제의 하나임엔 틀림없기에 이에 복원도 중요한 일이고  앞으로 평창의 국구사우의 문화복구및 시연행사를 갖는 이러한 자세로 방향적 전환과 이에 맞는 노력을 경주해 나가야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

 

봉화의 강산김씨 종택 "쌍벽당"의 사진 입니다.

퇴청마루 앞 두개의 기둥이 배흘림 기둥입니다.

 만약 민도리 기둥이었다면 좀 부하지 않게 보일듯 합니다.

 

잘 아는 지인이 광산김씨며 아버님이 종손을 물려받아 6,25때도 불을 하고 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보존하였다 합니다.

들은 내용은 이 종택의 기둥들이 싸리나무로 하였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하는데

앞면의 기둥들이 써리나무인듯 합니다.

 그리고 이 종택의 건축모양에 자재들도 특ㅇ하여 도둑들이 뒤에 들어와 문도 뜯어가고 좀 극심하였다 합니다.

 

 ⓒ 2019,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