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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국구사우

국구사우 세미나를 보며..

[국구사우 세미나를 보며..]


高 柱浩


우선 이경식 향토사 위원장님의 "국구사우 터 당위성"의 논문이 전국문화원연합화장님의 상을 수상한 것을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국구사우에 관한 세미나도 고무적인 일이라 환영합니다.

 이경식 논문에서 본인의 블로그 글에 그 위치터의 기록을 인용한 바 이는 2017년도에 리필한 것이고 이는 원래 2016년도의 아래 기록분에 의한 것 입니다. 

아래에 이 세시글들을 다시 링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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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만 있는 문화---국구사우란?? (국구사우 1  후세백작 2016.10.21 02:55   http://blog.daum.net/kkks1/1298

   

- 국구사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 지표조사엔,,,


 국구사우에 대하여 평창의 재야 사학자님들의 여러 의견이 있지만. 본인은 그 위치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주창한다.

오면지도에 평창의 진산 노산 아래에 관아가 있으며 그 옆에 세수로 걷어들인 군량미의 창고가 있고 윗쪽에 국구사우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어디일까??


 본인은 중학시절 어느 선배님이 중고등학교에 관한 또르륵 똑딱이란 옛날이야기로 자정이 넘으면 화장실에서 복도 회랑을 타고 또르륵 똑딱 소리를 내며 보이지도 않는 물체가 2층 방송실까지 한 바퀴돌고 간다는 귀신이야기끝에 사실은 평창중고 마당은 봄철 습기가 있는 운동장이 마르며 먼저 마른땅으로 어떤 시설물이 있었다는 구분을 드러낸다 한다.

 

  본인도 얼추 그러한 이야기에 느낌을 받곤 하였는데 운동장 단상앞에 바닥이 먼저 마르는것으로 일자선과 블록들,  그리곤 테니스 벽보드 옆의 고목나무 앞에 조그마한 시설물의 바닥이 구분된다 하는데.. 이 두개의 운동장 땅 바닥의 이상한  그림자 형체... 이것이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건물이 있었던듯 하다.


 오면지도에 순서대로 운동장 로얄박스 앞의 큰 덩어리의 그림자 물체는 조선시대 창고 群의 바닥이고 테니스 벽 보드 옆의 고목나무 앞에도 땅 그림자가 먼저 지는데 이곳이 국구사우의 자리 아닌가 추정 합니다.

 고목나무란 하나의 큰 정표이듯 평창엔 물의 기준점의 천변리에 하천의 고목나무와 시루목의 병목의 서낭당에 고목나무와 중학교 운동장엔 영문을 모르는 고목나무가 있는데 이 고목나무는 아마 사당을 표시했던듯 합니다.

그리고 현 극락사 자리엔 신당이 있었던듯 합니다.


이런 추정을 해 봅니다.    



   [국구사우(國舅祠宇)터에 배경적 고찰의 소고]    후세백작 2017.10.31 04:06 http://blog.daum.net/kkks1/1483

              




    1] 펑창의 자연취락적 마을 형태(國舅祠宇터에 배경적 고찰. 별지 1)    高柱浩 2017.10.23 05:51    

         http://blog.daum.net/kkks1/1484   


     여기애서 국구사우의 사우터는 노산에서 흐르는 두개의 샘물중 중리쪽의 평창중학교로 흘러내리는 도랑의 중리쪽 윗편이라는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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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인즉 당시에도  지금과 똑같은 생각으로 게시한 것이입니다.

시중 인터넷엔 국구사우의 게시물은 아마도 두세건 이외엔 저의 글이 약 10건정도이며 이 문회는 평창에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다른 글은 별로 없는듯 하며 요즘 저의 블로그엔 국구사우에 관한 다수의 검색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번 세미나에 관심이 잇는 분들이 검색하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기에 국구사우에 관해서 조금더 도움이 될까해서 다시 리필하는 것입니다.


  맨 아래 링크된 게시글은 국구사우평창 전반의 자연 취락구조와 노산은 원래 빗물의 담수호가 되나 이 일대의 극히 심한 카르스트 지형으로 몇개의 샘물로 퇴수가 되는 지형이란 점 입니다.


 다시한번 평창의 자연취락 구조를 그려보면 왜정시 중리 보를 막아 관계수로는 중리에서 감리교회쪽으로 굽어져 차도 영프로 흘러서 하리는 주거지로 밭전자 형태 취락구조를 만듭니다. 여기서 중이 중학교의 고목나무 일대는 차도를 지나면 집한채 정도의 공간을 지나서는 저지대로 천변이란 점이고 고목나무에서 노산쪽으로는 두번째로 큰 샘물의 퇴수의 도랑이 수직으로 내려 흘렀다는 점입니다.


 아마 지금은 매립관으로 흘러내리지만 이조시대에는 자연상태로 홍수시엔 고목나무 일대는 조금의 범람원을 만들었슬 것이며 이를 깃점으로 하리쪽은 관아였슬 것이며 도랑 건너 중리쪽은 일반 자연상태로 고목나무는 양택지가 아니라 음택지인 중리쪽이엇슬 것이란 추정에 이 범람원 정도를 면밀히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번 세미나에서 논문에 의한 이 위치터에 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겠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러한 취략적 지형형태를 고찰하시고 만약 고고학의 시굴조사까지 하신다면 더욱 고무적인 일일듯 합니다.


 이 조사에서 어떠한 단서도 나오면 좋을 것 입니다만 샘이 흐르는 옆이라 아마도 국가사우 당우를 지을때는 츨면쪽 도랑에는 축대가 있었슬것도 추정하면서 또 한가지 사안은 지난 10여년전 극락사 보수공사기 아래 주줏돌에서 빼낸 석재들중에 현 극락사 앞 마당에 안상을 그리다 말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석물 두점, 그리고 길가에 방치된 지름 약 35cm가량의 주줓돌 3배의 원 출처의 문제입니다.


 이 주춧돌은 극락사의 것이라면 현재도 사용가능한 것인데 이는 극락사 기둥보다는 작은듯,, 이 일대에 석재 주춧돌을 사용했를 건축물은 아마도 국구사우가 아닌가 추정하기에 이러한 제반 문제들도 다시한번 고찰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국구사우의 터의 확신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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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23 20:15
  •                  
  • 엇그제 평창에서 국구사우의 세미나가 또 열렸는데 기대에 부합치 못하는 성과로 끝닌듯 합니다.
    그러기에 본인의 지난'18,9,27일 게시글처럼 평창의 추존 목조의 국구사우는 앞으로 역사적 사료로 사적지를 위한
    위치 터 찾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제례를 시연함으로서 이에 따라 무형문화재로 ㅜ진할 것인가 이제는 기초적인
    방향설정의 문제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될 것이란 점입니다.

    지난 8월 19일자 본인의 게시글을 다시 인용해 봅니다.

    국구사우 위치의 터 찾기는 민속문화재 대상은 아닐 것이고 사적지나 유물등의 역사적 사료로서 신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국구사우 터를 찾으면 이를 문화재가 되면 퍙창이씨의 제를 지내는 것으로 연상하지만 그 제를 시연하는'
    것은 무형문화재 입니다.   그러기에 국구사우의 문화가 무형 문화재로 가기 위해서 이러한 말초적 문화에 의존해서 '
    결실을 이루기는 어럽다고 하기 보다는 아예 방향이 틀렸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국구사우가 무형 문화재가 되기 위해서는 사당 터고 부자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은 주관단체가 '
    결성 되어야 한다. 이씨 대종회이든 평창의 유관단체가 주관하여 형편에 맞는 곳에 사우를 다시 짓고 사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구사우의 제례의 보존회를 결성하여 제례의식으로 국구사우 제례를 시연해야 하는 것이다. '
    여기엔 복식(服飾)과 제찬(祭饌)을 제대로 갖추고 평창 이씨 대종회에서 천거하는 사손이 작헌을 하고 시작하는
    제례에 문화 그 자체가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요건에 필요한 역사성·학술성을 기본적으로 갖추었을때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 국구사우 기록에 의해보면 서각( 屛角) 등만 남아있을 뿐이라는 문장을 보면 서각이란 1품의 벼슬이 허리에
    두르던 띠로 이것은 왕족의 제례예법을 의미한다. 길례의식(吉禮儀式)으로는 정 1품의 복식으로 제를 지낸다면
    왕족의 예법이기에 국조오례의 전교편의 왕실의 예법을 따라 사향 친제의 축문을 준용하도록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이다.

    평창을 고향으로 하는 유일한 성씨로 종파를 넘어선 평창 李氏들의 하나의 사당을 재 추진함은 종친들을 넘어선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평창문화의 밀린 숙제의 하나임엔 틀림없기에 이에 복원도 중요한 일이고     앞으로 평창의
    국구사우의 문화복구및 시연행사를 갖는 이러한 자세로 방향적 전환과 이에 맞는 노력을 경주해 나가야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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