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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청산--후세백작이 보는 안익태와 최승희
글쓴이: 후세백작 08, 08.05.
과연 그대는 친일의 매국노도 아닐테고, 그렇타고 충정의 애국자 였는가?
우린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건 충정의 애국자와 매국노는 차별화 하여야 할것이다.
일전 TV 토론의 말미를 조금 보았는데, 매국노의규정에 관한 난상 토론이지만 우리는 어느 편에 머물러야
좋을까??
요지는 흑백의 논리가 극명하게 나타나던데, 예를 들어 한 순간의 강도가 다음에 잘한다 하여도 강도의 죄는
사후 반세기가 지난 이 시각에도,앞으로 영원히 달겨 받아야 된다는 식의 논리와 이에 맞서는 지난 일들...
그것도 두어 세대가 넘은 이 마당에 수직의 축이란 잣대만은 곤란하다는게 나의 입장이다.
역사란? 그 정의를 실현시켜 주어야 된다는, 즉 목숨을 바치고 재산을바쳐 일제 식민에 대항하던 애국지사들과
비교하여 상대적 매국노를 규명하지 않으면, 누가 다음에 이런 국가적 위기에 나서겠는가??
그 취지엔 모든 국민이 다들 동감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의 실행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늦지않타, 우리의 역사는 그의 동일선상에서 지속되고 있으니까?
쏘련도 전쟁 승리 60년 자축행사를 지난 해에 하지 않턴가??
우리는 먼 후일의 세대에라도 일제 식민의 앞잡이를 규명해야함은 우리시대의 자명한 과제인 것이다.
그러면, 우선 내가 보는 일제시대의 인물상을 구분해 보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 5적의 최대 매국노로 규정함엔 뉘든 이의가 없슬거와, 그실 5적은 배포가 작은, 새 가슴형으로
앉아서 당한 놈들이라고 내글 “여인천하“ 민비편에 게제 하였다.
지금 4,000명의 친일 매국노를 규정함에 이슈로 떠 오르는 것은 애국가의 안익태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무용가
최승희의 논쟁이다.
나는 어느편에 서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일이 나와 무관하다 하여도 이 시대에 살아 숨쉬는 나의 양식으로선, 내 살기도 힘든데 이것의 분류는 골머리 아픈
과제가 아닐수 없다.
잠시, 일제 강점기하의 여러 인물상을 비교해 보자.
강직성으로 볼땐 자결을 한 충정공 민영환과 3,1 운동의 산파역의 만해,도산, 남강, 김구, 서재필, 그외 많은
선각자들이 있다.
3,1 운동의 민족대표 손병희 선생은 만해가 3,1 운동에 가담을 권유하니 그럼 나를 민족 대표로 써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재산도 우리나라 당대 최고 부자이고, 천도교 교주로서 제일 앞에 서겠다는 용기는 참으로
위대한 내용이다.
이는 천도교 교주로 또 당대 최고의 부자가 일제가 탄압하고싶은 지명 1호감 이지만,그래도 좋다. 민족의 사명감
앞엔 아무 꺼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33인 모두들 3,1 운동이후 3년 정도의 옥고를 치르는데 --- 이러한 애국 지사型이 우리의 민족 자전을
영유케 하는 시발인 것이다.
그러나 또한 3,1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은 애국도 하였지만 어느 신문사설의 친일적 글로 매국노로
낙인이 찍혔다.
" 오등은 자 아! 조선의 독립과 조선의 자주민임을 선언 하노라. 차로서 세계 만방에 고하여~~인류 공영에
이바지할때다~~"
이 "기미년 3,1 독립 선언서"는 동서 고금의 보기드문 명문이라 생각한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나 니체의 존재론보다 우리의 국가가 나아가야할 좌표를 선명히 제시하는 글이다.
그리고 나는 3,1 운동하면 그 이미지가 강한 독립선언서의 연상이 먼저 떠 오른다,
이렇듯 우리민족 공동의 양심을 공유케한 이 독립선언서의 글은 민족자각의 최고의 역량을 지녔으리라. 육당
그는 매국노 도장이 찍혔어도 그의 이 명 문장 하나로 국가 공헌도는 매우크리라. 우리는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프랑스는 2차 대전에 나치에 물한모금 떠준 프랑스인이라도 사형에 처했다는 식의 논리가 우리의 형평에 맞을까??
100분 토론의 어느 민족 사학자는 역사 세우기란, 단칼로 밑등부터 도려내는 식인데, 일제 강점기 하의 우리는
2 차 대전때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인과는 전혀 그 상황이 틀리다.
나치, 그들은 죽고 죽이는 한 순간의 전쟁사건이지만 우린 36년간 아마 한 사람이 성장해서 머리속에 든 것이
일본식이고 할수있는 행동이라곤 배운게 일본 방식인데, 이렇듯 우리는 그 환경 자체를 거부하기엔 개인으론
역 부족일때 그를 이용하여 기회가 있을때 방향을 전환하는 방법도 가상해 봐야 할 것이다
분명 안익태와 최승희도 그런 생활인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힘으론 일제에 대항하기가 힘들었으리라 . 그래서 때론 일제의 말도 어쩔수 없이 들어줄수 밖에 없었으리라.
이는 자기의 삶과 자기의 전문영역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리라. 이것을 전부 친일의 역적으로 단죄를 할수
있을까??
이를 나의 생각에서 보면 후일 다시 복권될수도 있으며 그렇다면 결국 헛 바퀴가 굴러갈뿐, 우리는 일제 강점기가
긴 세월로 이어져 36년간 항거하고 살아남아 문화를 계승시키기엔 --이 점을 참작 유의하여 매국노를 가려야 할
것이다
이 예를 역사적으로 들춰보자.
AD1~2년에 로마 제국엔 게르만 용병 헤르만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그를 귀족처럼 대우를 해 주며 믿고, 게르만 민족<독일>을 쳐들어갔다. 당시 게르만 민족은 부족식으로
존재하였는데, 로마의 용병 헤르만이 군사를 모집한다는 소문에 각 부족들의 농민들이 규합하여, 게르만이 앞장서고
그 뒤를 따르던 로마 3개 군단을 완전 살상 토벌하는 전쟁후 지금의 독일 영토와 독일인 구성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개인의 힘으론 안 된다면 국가를 배반하지 않는한 역량을 도모하는 시간을 기다림도 현명하지 않을 까 하는 사례이다.
물론 일제에 강하게 항거한 사람들도 없는 건 아닐진대 이들은 대부분 정치와 종교계, 교육적 선각자 인물들일
것이다. 그 분들은 서재필 만해, 안창호, 수주(변영로)등등 수 많은 애국자들이 있다.
그 중 수주선생의 예를 보자.
"명정 40년"이란 수주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이다. 그는 상당한 인재로 일제가 군침흘린 인물이었다.
그는 전 재산을 술에 넘기고 외상 한잔 할 곳 없이 뉘에게 술 한잔 얻어 먹지도 못하고 해질녁 쓸쓸히 ---
찬 바람 쌩쌩 전봇대를 울리며 몰아치는 미아리 고개넘에 사글세 집으로 귀가하는데 일제 앞잡이란 놈 이 따라오며,
이보게 수주양반 처 자식이 사흘째 끼니를 굶는데 나 따라오게---
우선 은성이나 명월관에 가서 한잔 합세라고 하니 나는 일제에 도움을 줄게 없소 하고 그 목마른 술의 갈증을 참고
미아리 고개를 그냥 휙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일제에 나브랑이가 되지 않겠다는 이런 애국자도 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虛수의 애국으로 그의 역량을 다펴지
못한 인생 아닐까??
어찌보면 자기 역량을 펴는데 일제에 부역좀 하는게 핑게 일수도 있다.
만일 안익태와 최승희가 일제에 그런 냉소적 감정으로만 행동했다면 자기일신의 역량을 이룩할수가 있었을까??
그들은 오히려 개인의 능력은 뛰어나는데 받침을 할 나라가없는 설움의 그런 힘 없는 나라를 솔직히 싫어 했슬수도--
그리고 어느 정도 일제에 시늉만--- 그래서 그들의 사상과 능력을 완성시켜 이름을 남기는,이런 가상도
나쁜 매국노적 발상아라 규정할수 있는가??
나는 이 글을 쓰며 가산 선생도 이런 아픔이 있었슬 것이라 생각한다.그것은 이 글의 말미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또한 매국노라고 그들의 자손들을 전부 획일적으로 구분하는건 오차의 범위가 너무나 클수있다.
한 예로 우장춘 박사는 선친의 친일적 행각에 깊이 사죄하는 후손으로 학문에만 전념 모든 사람들에게 보탬이 될수
있는 일에 노력하였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안익태는 평양 출생으로 어랴서부터 음악에 두각을 나타내 일본 유학에 오르며 방학때 고향에서
채만식등의 영향으로 독립자금 모금 아르바이트 첼로 연주회를 갖다가 일제가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미국으로
유학 후 유럽 특히 항가리 등으로 나중에 스트라우스의 직계 문하생이 되며 유명 인사로 명 지휘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명성에 가려진 --- 오히려 문하생에서 뛰쳐 나와 자기의 길로 갔더라면 더욱 화려한 이름이
되지 않았슬까??
<애국가>는 그가 미국 신시내티 유학시 작곡한 것이다.
우리의 애국가가 올드랭싸인 가락을 빌려쓴건 음악도가 아니라도 마음에 걸리는 일인데 그래서 그가 학창시절에
작곡하여, 애국가가 탄생한것인데 솔직히 그 애국가도 나는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가락이다
아마 내 기억엔 국민학교때 부터 조회시간에 애국가 제창이 그리 불쾌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음치가 부를수 있는
음의 한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애국가는 아마 그 시대의 유행의 편류에 따른 가락인지 몰라도 나에겐 엿가락같은 기분이다.
여러분들도 느꼇으리라---어느 조회시간이나 모임에 애국가 제창하면 모기 소리 앵앵거리는 목구멍 넘어가는
소리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누구나 다 같이 힘차고 즐겁게 부를수 잇는 가락이 아니기 때문이다.바로 이것이 애국가가 부르기 힘든 큰 문제를
지닌 것이다.
만약 <신나는 김일병>등 군가는 누구나 힘차게 부를수 있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누구나 정겹고 재밋게 힘
안들이고 목청높이 부를수 있는데 애국가는 장엄하고 웅장한 맛도 아닌데 느려터지기는 슬리퍼 신고 뒤로가기보다
느리니 음치들은 대체 음이나 박자 맞추기 곤혹스런 가락이다.
빗겨가는 이야기 이지만 외람되오나 애국가는 바로 이 점의 제반사항이나 특목적을 고려 못 하고 작곡한 것같다.
국가<國歌>는 유행가 처럼 어느 부류에 편승한 가락이 되어선 안 될 것이고, 어느 성악가만 부를수 있는 음악이면
더욱 안된다, 보편적이고, 대중이 희망을 품을수 있는 상징성과 힘찬 전진의 노래여야 할 것이다.
안익태, 그의 약력에서 볼땐 어떤 부분이 일제에 앞잡이 짓거리라 매도하긴 곤란하다. 다만 그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제를 이용했을수도--
그것은 역사를 규정짓는 우리의 과<過>일수도 있으나, 나는 다만 애국가는 다시 제정하든가 아니면 미국식의
채택 방식을 취하든 지금의 애국가는 누추하기 보다 우선 상당히 부르기가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애국가 타도는
전적으로 음악성 없는 나의 잘못 된 생각 일 수도 있다.
다음은 최승희에 대한 나의 생각은 ----
우리 나라 최초의 미니 스커튼 윤복희라는 가수가 전파 유행을 창조하였다는데, 그는 전통 각하 앞에서 "내가
내가 너를 "이란 노래를 전통 보고 내가 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열창하니 ,
비서관이 생각하길 어디 감히 각하를 손꼬락으로 찝으며 내가 너를 --- 하는 일화에야 이젠 너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는데---(인민보다 인민당원이 먼져 겁 먹는 아이러니가)
이 글을 왜 쓰냐고--- 재밋쟌--- 그것보다 최초의 여류란 무슨 의미일까??
개성과 개방의 美를 함유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표현이다.
최초의 여류 피아니스트 김 경희는 장안의 인기女로 조선 반도 뭇 남성들의 우상이 되어 부러울것 없는데, 김경희는
그 많은 善男중에 유부남 수주선생을 사모하는 개방과---
최승희 그는 최초의 현대 무용가로서 아래 그림에 보듯 간다라 의상의 신비스런, 비잔틴 무용 같기도 한 이방적 춤만이
아니라 무당의 굿거리, 고구려의춤등 다양하게 구사한 개방주의자이다. 그런 그가 일제에 국수적 추종자 일리는 없다.
위의 최초의 여성 이라함은 우리의 유교적 전통과 관습의 굴레를 탈 하고져 그들은 상당한 개성의 고집을 지녔기 때문에
넘에게 타협이 그리 쉬운 성격이 아니란 점이다.
최승희 그는 그리 호락시리 아첨하진 못할 성격의 소유자이고 또한 일제에 아첨이나 부역과는 거리가 멀다 .
다만 갹출 하라니 어쩔수 없는.---왕 회장님 표현대로라면 누이조코 매부 조은 격 정도로.
최승희 그가 공연 댓가로 7만원의 거금을 일제에 건내주었다고 매국노가 되었다면 만약 건네주지 않았다면 곧 매장되고,
그의 예술과 그로 인한 코리아의 국제적 위상은 없었슬 것이다.
그럼 그가 왜 요즘들어 역사속에서 매국노의 검은 도장이 ? 찍히는 부관참시를 당해야 된단 말인가??
< 최승희의 무용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 내고 그의 무용엔 일제 찬양이란 없다>
최승희가 일제에 거금 7만원을 헌납 하였다고 역적으로 몰아서야--- 요즘 연예인들 뒤 봐준다는 깡패들은 그 보다 더한
돈과 몸까지 강요하는데 또 그보단 더 웃기는 건 선거자금으로 은행지점 10개쯤은 체포하듯 강제 차출들 ---
모두들 같은 맥락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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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7만원 기부는 일제가 깡패식으로 때쓰니 마지못해 건낸 것으로 야쁘게 봐 주는게 올치 않으련가??
왜냐면 그의 전문 인 무용 예술속엔 일제 찬양이란 없었으니---
그는 정치인이나 교육자가 아니라 자기의 내면의 세계를 표출하는 예술인으로 일제 강요에 힘없이 부디끼는-
물론 저항시인도 있지만.그의 예술을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때론 굴욕도--
우린 한때의 전쟁이 아니라 일본 식민사관 풍토에서 개인의 힘으로 더 무엇을 한단말인가?? 만약 크메르루즈는
혁명후 글씨를 아는 우체부, 이장까지 싹 죽였는데 남는 건 무엇일까?? 이는 역사적 후퇴뿐이다.
박통은 최소한 장준하의 야기대로 라면 일제의 매국노 일수 있으리라. 스스로의 존재하는 제1주의자의 자세를
지향하였다. 그가 만주 군관학교 입교는 참으로 언발란스 일거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일까---
그는 일본제국식 교육으로 만주 군관학교 졸업식에 일본학생을 제끼고 송사에 대한 답사를 하는 모든 위치에서도
일인자적 위치를 고수하여 후일 동남아 여타나라보다 빨리 우리가 반공과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밑거름은 박통이
일본이란 우리보다 선진을 배?기 때문이라 생각치 않을런가??
우린 지금 민족사관의 정립을 위해 역사의 단죄를 내리자는 양측의 극한 대립적 견해로 벽이 갈라지는 모습이
다.벽이 갈라지면 양측 모두에게 이로울리 없다, 그리고 그들의 견해는 모순된 생각들이다.
도 아니면 모식의 논리는 지양하고 . 나치 협력자의 프랑스식의 비교는 참으로 우리의 현상에선 위험한 소지를 앉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좀더 현명한 판단으로 일제 부역의 매국노 규정으로 부관참시가 되는 일이 없어야 할 지니라....
그것이 역사적 발전이 .아닌가 한다
역사란 우리의 거울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의 교훈이 되는 것이다.
역사를 모르면 동일한 우를 되풀이하는 짱구가 되는 것이다.
진보가 없는 후퇴뿐이다
(여기서 진보는 요즘 정치의 진보 세력과는 상이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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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평창 22,25 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 후세백작
********* 추이 *****************************************************
이 글에 이어 다음장에 우리는 우리의 선배님, 가산 선생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또한, 해방과 독립이란 단어의 역사적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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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의 역사를 제 마음대로 구분할 것은 아니지만 과거사 전후의 문제들은 거론 안되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생각들...
서재필, 유길준, 이승만들의 대략적인 내용과 우리가 을사 늑약까지 가기엔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하는...
을묘왜변과 갑신정변에서 가름이란??
우리가 꼭 을사늑약이후 시간대로 잘라서 과거사 정리를 하는것 같은 기분엔 저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당시엔 무엇이 해방이고, 무엇이 독립인가 곧 후편을 쓰겠습니다.
당시의 해방과 독립은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뜻과는 전혀 다른 것 입니다.
그리고 해방의 목적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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