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징! 징키즈칸 !!!...
Hu, ha, hu, ha... Hu, ha, hu, ha... Hu, ha, hu, ha... Hu, ha, hu, ha...
바람을 가르며 말을 타고 수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 사내가 앞장서 달린다~
산이든 사막이든 온 땅을 거침없이 휩쓸고 다닌다~ 와~ 징기스칸~
꿈꾸고 춤추자~ 위대한 연인~ 그 시절 가장 용감했더라~
모든 여인이 그를 사모하고~ 하룻밤에 일곱명의 아이를 가질 정도니 그를 막을 자 아무도 없다~
이런 내용이지요. 하룻저녁에 일곱명이니 ...하는
제가 이우식 님의 글을 보고 우리 슬픈 역사를 다시 한번 들여다 보고 싶기에 이 글을 씁니다.
역사란??
같은일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지식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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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때 우리나라는 몽고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피폐 되었습니다.
몽고군은 바다의 해상전이 약 하여 임금은 강화도로 피난가고, 그 강화도 섬은 다리 하나로 건너가지만 ...
고려의 몽고 항쟁은 90년간 이어졌습니다.
우선 상고사에 나타나는 우리나라의 전쟁 참상을 얘기해 보면,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참으로 훌륭했지요,
아직 불명치는 않치만 집안현의 장군총을 거론해 봅니다.
약 280평의 사각 적석총 인데 돌 하나에 11톤 되는 것을 40여리 끌고와, 크레인도 없던 시절, 또한 수레바퀴가
약하던시절에,,, 이리 저리 굴려 다듬고 쌓아 올린 무덤 입니다.
저의 견해로는 약 7만품 이상 들었으리라 생각하는데 이 노역은 말갈이나 돌궐, 아니면 흉노등에 전승의 전리품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금 중국엔 높이 150m의 이짚트 피라밋보다 더큰 피라밋들이 약 1,000기 존재합니다.
65년도에는 그중 하나의 피라밋 현장 발굴 3일째, 중단하고 아직도 그 많은 피라밋을 중국은 함구에 붙이고
있지요. 왜냐면 고조선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3일간의 기록에 한글의 모체인 가(기)림토 문자와 발효식품인 김치와 외계인같은 기분이 들었다는데
이 외계인 같은 묘사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열거 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묘사된 것은 동이족과 한족이 전투에 동이족이 한족을 서슴없이 내려쳐 죽였다는 기록들이,,,
이것을 저의 해석으론 동이족은 청동기 문화에 투구와 청동검을 휘둘러서 한족을 죽엿고 이때 한족은 고작
지게 몽둥이 같은 나무로 대항해 만나면 연일 패하는......
또한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다름아닌 진시황이 중국 천하< 진,초, 연,제,한,위,조> 를 통일하였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경계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 통일을 하였는데, 한족의 기록이나 역사책은 모조리 동이에 굴욕당하는 책이라 모조리 분서갱유 하였지
않았나 하는 저의 생각입니다.
2,200년전의 공자도 동이가 사는 산동에 기름진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 내가 알고 있는 분서 갱유는 3개이며 이후 당나라때와 일제 강점기 하에 1925년 사이또 총독이 우리나라
상고시대 역사서 51권 20만부를 수거 불태우는 그래서 우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두개의 불명확한 역사서만
남겨두는 , 그래서 우리의 역사를 지우려던 일본의 만행, 천추에도 용서받지 못할 일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위 중국 시안쯤의 피라밋 사진이나 청동기, 가람토 문자. 사기에 동이족의 서술부분등을 올려 볼까요??
우리의 옛 선조, 고조선은 이렇게 강하였습니다. 남보다 일찍 청동기 문화를 이루며 그의 활용으로 강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언제 제가 보는 조선 상고사 한판 써도 되겠지요>
그러던 우리의 역사가 광개토태왕때는 전성기가 아니라 저의 생각으론 옛 영화의 잔영이나 회복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후 우리는 중원대륙에서 밀려 동이족은 몽고와 티벳족, 또 묘족등으로 < 묘족은 역사기록은 없지만, 치우천자를
조상으로 믿고 있고요> 분리 되어 먼 후일엔 고려때 가장 치욕의 몽고의 침입과 조선때 병자호란, 임진왜란,또한
일제 강점기의 무수한 외침을 받아 왔습니다.
요즘 부산에서는 임진왜란때의 킬링필드 같은 유골의 발굴과 임진왜란의 잔학상이 보도되는데 ,,,물론
왜구들은 이성계가 6회에 걸쳐 물리치는등 수시로 노략질 하러 들어왔던 것입니다. < 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싫어하는 위인은 이성계와 김유신 입니다. 저의 생각이지만 , 이것도 한판 쓸까요 >
또한 청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가락동으로 지나는 탄천에서 남한산성의 인조를 굴복시키고 마치 카놋사
굴욕사건 처럼 세번 절하게 만들때 그 추웟던 49일간의 남한산성의 인조의 고생보단 승리자인 태종과 그 부하들이
꽁꽁 얼어 붙은 탄천에서 추위를 어떻게 감내하였슬까 하는 의문이...승리자가 얌전히 그러고만 있슬까 하는??
아마 서울 장안의 대감집 안방은 이들의 차지였고, 곡간의 쌀 한톨도 이들의 몫이 아니였슬까??
<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냐 하면 요즘의 전쟁은 라인<선> 을 밀고 올라가는 전쟁이지만 당시나 고대의 전쟁은 통신,
수송의 어려움으로 포스트 즉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전투 이 점은 성에서 물리치고 다음 성을 함락시키는 전투로
사이는 무방비 지대이다.
대표적인 안시성 전투와 이때 왕명으로 현지 물자와 전쟁을 총괄하는 장군을 행주산성의 권율장군같은 왕명으로
도원수란 직책이 주어지고>
병자호란에 청국으로 잡혀간 3학사< 윤집 ,오달제, 홍익한> 와 볼모의 두 왕자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부녀자는
모조리 잡아가서 여염집 아낙은 남편들이 청까지 가서 쌀 몇말 공납하고 구출하여오는, 이때 사대부집 여자들은
상당한 금액이라야,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세검정에서 목욕제게로 불륜울 다 씻었다는 후문에. ....
< 이것이 환향녀로 다음에 화냥년으로 잘못 사용되어지는 용어로 변한>
그러나 양반들은 더럽혀진 마누라 이혼률이 급증하고 여자가 귀하니 어린 여자라도 조혼 시키는 , 그래서 사회
혼란이 야기되자 최명길의 상소와 어명으로 이혼을 금지시키는---주화론자 최명길의 상소 내용은 어찌 이 일이
힘 없는 부녀자들의 잘못입니까 하는----< 이 부분은 저의 매국노 기준과 맥을 같이하는 유사기준>
자 !!
그럼 우리의 역사에서 역사가들도 쓰기 싫어하는 몽고 항쟁을 바르게 열거하고 그 일의 누추함 보단 우리의 거울로
되새겨 봄직도.
징기스칸의 부대는 항복하는 자에겐 유화적으로 대리 정권을 만들어 주었고, 항복하지 않는 자에겐 끝까지 이 세상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 아마 저승의 철 멧돌이라도 들고와 갈지 않았슬까 하는 느낌이다.
징기스칸은 유럽의 헝가리까지 정복 하였습니다.
우리는 제일 무서운 사람을 내용도 모르면서, 드라큐라 백작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지금의 헝거리 사람들은 제일
무서운 사람 하면 징기스칸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좀 이상한것은 헝거리의 농촌에 가면 우리의 풍습과 동일 하답니다.
연자방아가 있고, 모내기 도구등, 홍두깨. 키< 채> 도 있고 모내기 풍습도 동일 하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일줄 모르지만 몽고도 유목생활 이전엔 농경사회의 우리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는지 ..
전쟁이란 ,이런 승리자의 첨단 문명의 전달이란 의미도 있고, 또한 가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노역으로 전쟁에
끌려간 노비들이 본국으로 복귀가 아닌 현지에서 편한 생활을 하는...
< 이란의 남부는 좀 부유하지만 북부지역은 산간지역이고 비폐한데, 발전소 기공식에 가던 나의 노친이 산간오지에
오두막 초가집 한채를 보고, 하도 이상하여 그 집을 가 보았더니, 자기는 이 나라의<이란> 핏줄이 아닌것 같다고
얘기 하더라는데....그럼 분명한 우리의 전통문화방식으로 그 오지에 왜 혼자 살고 있슬수 있슬까??
이에대한 나의 답은 윗줄에서 보듯 쉬운말로 노역에서 멀리 도망치는...>
고려에 몽고의 고려 침입은 약 90년간 이어졌습니다.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우고,,,아마 제가 알기로는 120년에 걸친 공사로 높이는 3,1빌딩만한 목조건물인데,
평창의 여러분은 가까이 있는 주천 사자산문의 법흥사에 어느 정치인이 기증한 동종과 상원사 종을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왕 사자산에 가시면 징효대사의 부도비도 한번 구경하시고요. 비문의 한문은 제끼고 그 비석에 전각한 조각문자를
다듬던 석공의 시간에 대한 성의가 나타나 보일 것입니다.
1,200 년전 당시로선 한 10-5년 제작기간이 걸리는 것이겠죠.
그럼, 당시 100톤의 대종이 남아 있다면,,에밀레 종의 4배 규모의 당시의 과학적 힘이란,,,
제일 궁금한것은 종을 메어 달아야 하는데, 용뉴 끝의 종을 메달수 있는 핀의 지름이 몇 쌘티일까 또한 백톤이 넘는
종을 어디에 메달수 있슬까 하는 나의 의문이...
아마 용뉴 구도에서 20쎈티 이상 더 크게 할수 없는 도형일텐데,,,현대 과학으론 20쎈티 핀을 만들어 100 톤의
무게를 흔들어 종소리내는 조상들의 얼이...
이 몽고의 침입에 임금은 강화도로 피난가고, 지척에 보이는 섬가지 배를 못타는 몽고에 우리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몽고군은 잔인하게 국토를 짓 밞았슬 겁니다.
당시 고려 인구가 약 400만 , 조선 중기 이후엔 약 900만명으로 추산 합니다>
남,여를 반으로 나누면 남 200만, 여 200만, 노약자와 유아를 적정선으로 빼고나면 우리이고 나라의 여인들,,,,
패전국들의 여인들이란 점이다. 이 이상의 글은 저도 가상하기 싫습니다.
힘을 잃으면 이리 슬픈 역사의 굴레에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알고 이를 현실의 세계에
활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역사를 모르면 똑같은 일을 두번 다시 당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역사를 되새겨 오늘에 의미를 부여할때. 미래는 보다 좋은 좌표로 도약할수 있슬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슬픈 역사라도 숨기지 말고 배워야 하는 이유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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