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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꼬리를 잡아보며...

원천석의 오백년 왕업이---

 

       ***[ 원천석의 오백 년 왕업이--- ]****

 

                                                                                 글쓴이: King love  07.01.05 23:49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작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 눈물 겨워 하노라 -- 원천석

 

 

나라의 흥망이 국운에 달렸으니 만월대(개성, 고려 궁궐)도 가을 잡초가 되고 오백년 빛나던 고려 왕업이

목동 피리 소리에 잠기니,석양을 지나는 객 아니 눈물 흘릴 수 구나. 원주 원씨의 중시조가 된 원천석의

고려에 대한 미련을 담은 시조이다. 안 배웠나, 잊었냐??

 

원천석은  방원의 스승으로 방원이 태종으로  왕이 되자 왕사로 모시길 원하였으나, 원천석은 마지 못해

한양으로 올라갔다가 피의 혁명과 왕도의 탄생의 모순속에 그는 몰래 치악산으로 숨어 은거한다.

< 방번 방과의 제거의 2차 왕자의 난..정릉은 무엇이 있는가??등 이야기는 후속 2편으로 -->

 

 

태종은 할 수 없이 그 동네에 조세를 감면해 주어 덕분에 당시엔,  다른 사람들이 조세를 반으로 내는 치악산

골짜기로 많이들 이사 갔었다.

(아마 성인 남자 1년 베 2필 -- 이런중과세이니 치악산은 한 필이 된다,

세금은 예나 지금이나 십에 일조로  헌금이고 ...  또 열 여덞 아리따운 규수가 서방 그리워 지난밤 밤새도록 

만리 장성쌓았다는 이야기는- -- 힘 없는 민초들은 노역으로 중국 만리장성에 가서 죽기 일반의,,,

서방님 언제 올지도 모르고 밤새도록 홀로 기다림의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과년한 규수의 기다림등.....>

 

 

원천석인 치악산에 칩거하며, 조선의 개국에대한 역사를 6권을 저술하고, 돌함에 넣고, 죽을때 같이 묻어달라

유언하며, 후일에 후손중에 힘 있는 자가 나오기 전엔 이 돌함을 파 보지 말라 유언 하였다.

 

 

그 후 3 대 손자들이 시제를 지내며, 할아버지가 힘 있는 자가 나오기 전에 파 보지 말라는 어릴적 기억에 궁금하여, 

나<후세> 같은 성미인지, 뭣이 좀 있냐는 기분에 그곳을 파 돌함을 열어 보았다.

돌함이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건 금,은 보화가 가득??? 긋도 방원의 스승이었으니...

그러나, 그 돌함엔 금, 은 보화가 나온게 아니라 책 여섯권이 나왔다. 내용이 이조 개국에 대한 역사 서술이라

이것은 소문나면 삼족이 멸할수도...

 

 

< 당시로서는 이성계 드라마에서 안 보이는 부분은 조선의 개국 초기의 최대 고민은 붕괴될까??  

그러면 백성은 도탄에 빠진다는...그래서 개국이후 60년간,,, 

태종 방원의 최대의 고민은 이 왕조가 무사히 번창하여 온 백성이 맘 편히 잘 살기를 바라는...성종에 이르기까지 

중앙 집권화에 무던히 노력하며, 여기에 라이벌 소문은 가차없이 처단하리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무서움,,,,

현대 정치용어로는 긴급조치랄까??

 

그 자리에서 분서(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굳게 입을 닫았다. 그 책의 내용을 본 사람은 그 이상 없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아쉬워 한다.

원천석의 이 역사서의 제목도 모른다. 이 역사의 서술 방식엔 아마 이씨 개국쪽도, 려의 입장도 아닌  중립의

객관성을  유지한  저서로  유지의 역사서의 찬란한 우리라 최고의 역사서가 아닌가 하고, 필히 사마천의 사기에

버금갈 책이라고 아쉬워 한다.

 

 

그것이 못난 후손들 때문에 사라졌다. 지금 존재 한다면 원천석인 교과서에 등록될 위인이 되었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군대서도, 원씨만 보면 못난 후손이라고 내려깠지.

 

 

이글을 쓰게된 동기는 "어린구슬"이 물어보는 정선 아리랑에 원씨가 들어 있느냐는  물음에 원주 원씨는 죽림 칠현에 ,

즉 정선땅은 밟지도 않았다는 해설임.

 

 

=== 사마천의 사기를 소개하면 ===

 

사마천이 BC 100 년쯤, 한 무제때, 사관 (왕의 말이나 글을 기록) 으로  관료 생활을 하던중  흉뇨족을 막던 장수가

역부족으로 포로가 되메 무제가 죽지 안았다고  성을 내자 사마천이 이를 옹호하다가 중벌을 받았다.

 

무제는 살아서 더 고생하라고 죽이지 않고, 거세를 시켰다. 당시로선 이 거세는 남자의 징이 없어지는 온 나라에

파다한 소문의 굉장한 수치였다.

 

하루는 아주 친한 무관 친구가 천에게 찾아와 (성이 사마 씨) 살아서  뭣하나 차라리 죽게나 하고 칼을 꺼내 주었다.  

사마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러면 선비답게 약으로  죽으라고  약을 꺼내 준다. 사마는 그도 아니라 한다,

오직 목숨만 붇어 있으면 된다니-----얼마나 비굴한 삶인가.

 

나이 40에 사마는 거세를 당하고 두문분출 하였다. 아버지도 같은 자리에 사관이었기에 은 역사자료를 물려 받고,

어버이 유언대로 역사 기술에 남은 생을 다 걸었다.

 

 

그리하여 태어난게 “사기”라는 역사서이다. 약300편의 대작으로 항우 유방도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다.

이 사기책은 이후 정사로 인정받으며, 중국 역사의 샘플을 만들었다.

 

중대하고 심오한건 시련을 겪어야 태동되나 보다.  ( 여기서 보듯 삶이란 불우할 때 진정 노력하나 보다.

 렘브란트나 링컨이나 고산(윤선도) 정약용도--다음에 구체적으로 )

 

그리고 사마는 항간 세인들의 비아냥도 무릎쓰고, 약10년 넘게 역사를 집필하였다. 이리하야 사마천은 오늘의

중국이 있게하는 고대 중국사의 기틀을 잡아 주었던 것이다.

거세 당한게 쓴 약이 되었다.

 

평창 아라리가 이런 글까지 오게 됐다.

 

이 글을...(+1)

도인      내마누라 원주원씨다                                                            07.01.06 00:37

 

King love      도인 --- 원천석의 손자들이 나쁘다고, 3족이 멸해도, 할아비의  책은 보존 할수 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보다

   500년 후대의 역사책이지만 역사 기술 관점면에서의 우린 지금 려말에서 조선으로의 개국의 역사를 30%나 알고 이해할까??,,

   그런데 이책이 있으면 80% 당 시대의 역사가 확실해 진다는 사가들의 의견이...

    가만 있으면 왕사 자린데, 이편도, 그렇다고 저편쪽도 아닌 려말에서 조선 개국

역사 기록으로,아마 편년체와 복합적인     독창적 양식의  휼륭한 책이었으리라

    이 책은 사마천의 사기를 능가하는 역사적 역량있는 샘플의 역사서가 되었슬 것

라고, 사가들은

말한다.                                   

     07.01.07 14:13

 

King love  

   

(우헨이-- 선상님의 똥검사 안 해온 사람 오늘 아침 밴소가서 말커 해 주어라)

    똥에 관해서는 이 후세가 우연이 똥 박사를 능가하지. 한수 해 볼까?? 그리고 고려말 신돈의 꿩먹고 알 먹고에  일갈을 하고

    대구 영천까지 피신한 선비가 또 한분 계시니 둔촌공 이라는 분이신데,그래서 둔촌동이란 이름까지....

    둔촌공의

피를 나누는 우정--- 재밌으니 다음에---      07.01.0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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