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天下 第一의 女人은 ? ]
글쓴이: King love 07.01.19 11:12
1) 일전에 이완 장군의 첩이야기다.
이완의 첩, 그 시절 첩이란 서얼 출신이라 정확한 이름은 기재가 않 되어 알 수 없지만, 그는 이완장군의 첩으로
효종의 북벌계획의 수립시 이완에게 많은 지략을 제공 하였다.
우선 효종은 정묘호란으로 볼모로 청에 끌려가 청이 명을 이기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이에 8년만에 귀국길에
오른다,
청 황제는 명을 누르고 중원을 장악했는데 무엇이 아까울까-- 볼모를 풀어주고 고국으로 돌려 보내는 마당에
환송년을 베풀며 주며 그대들이 고국으로 가는데 선물을 줄테니 무엇이고 갖고 싶은것을 애기하라--
소헌세자는 청 태종이 아끼던 명나라의 유명한 벼루를 달라 하였고, 그의 동생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간 인질을
풀어 달라 하였다.
왕자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임금께 소헌세자는 그 유명한 명의 벼루를 선물 가져 왔다고 하고, 봉림은 인질을 모두
데리고 왔다 하였다. 두 왕자의 생각은 대조적으로 극명하게 나타나자 인조는 노여움으로, 그 자리에서 벼루로
소현세자의 이마를 쳐 죽였다.
(여기서 나의 역사 가정(假訂)은 소헌이 왕을 승계하였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청과 대립각이 아닌 청의 서양의
문물을 빨리 유입하여 왜<일본>보다 개화가 빠르지 않았슬까 한다. 이로서 구한말 일본이 우리를 넘겨다 보는
것보다 우리가 일본을 자들을 수도,,)
소헌세자가 죽고 둘째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으로 왕에 오르나, 이 시대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임진왜란에, 청의 정묘~병자호란의 양 난을 거치며 전국은 비폐되었으니---
효종는 우암(송시열)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 영의정에 안히고, 부국강병을 꾀하며, 이완장군으로 하여금 북벌계획을
수립한다.
이때 이완의 첩은 팔척 장신으로, 미모는 뻬어나진 않았으며, 지략이 지략이 중출하여 이완에게 10만 대군 양병의
정보를 청에서 알면 곤란하니, 산속 깊이 절에다 승병으로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 당시로선 얼마나 휼륭한 아이디어일까----
지금도 경기 일원엔 그때의 훈련소같은 절이 더러 있다. 그런 절이 우리 동리에 두개나 있다. 절의 모양세가 없고
기본 양식은 결여되 있는 구조이다. 그러나 그 절의 가치는 실로 두터우리다.
이렇게 , 이완의 첩의 기지가 정책 수립에 반영이 많이되며, 그는 이완의 총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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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문정왕후 (중종의 계비)
몇 년전 어느 드라마에 여인천하로 각색된 인물인데, 나는 그 드라마 내용은 자세히 모르나, 걷 보기엔 당시로는
인텔리 계급으로 밝은기지와 총명함으로 정난정의 계락에 힘입어 밝은 정치를 하는거 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에 전하는 그녀는 전혀 그렇치 않았다.
그는 단군이래 제일의 악녀로 측천무후에 버금갈 것이다.
당의 여 황제 측천무후는 악랄하기 그지 없으나, 나라를 안정시켰다. 이에 비해 문정왕후는 나라를 말아먹는 권력을
남용하였다.
중종의 첫번째 왕비 파평 윤씨인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일주일 내에 죽어 문정왕후도 같은 파평 윤씨로, 중종의
두변째 계비로, 생후 7일도 안된 아기를 대신 기르며, 인종을 몇번이고 죽일 계획을 하였다.
그중 한번은 인종이 세자시절 빈궁과 잠을 자고 있을때, 쥐 꼬리에 불을 붙여서 풀어놓아 동궁으로 여러 마리가
들어와 동궁이 불 타게 되자, 세자는 어머니 문정왕후의 소행임을 잘 알고, 어머니에게 효행하자면 불타 죽는게
도리라 생각하고 불속에 안자서 죽기를 작정 하였는데, 밖에서 중종이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그냥 불속에서 앉자
죽으면 이 또한 어버이에게 불효고, 임금에게 불충이라 생각하고 뛰쳐 나왔다.
인종은 효행심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계모인 문정왕후는 어전까지 나아가 계모인 나(문정)와 내 아들(후일 명종)을 언제
죽일거냐고 으름장 떼기 일수였다.
인종 즉위 8개월에 어머니가 주신 떡을 감사히 먹고 죽었다.---(죽으라고 어머니가 주신 것이라면, 잘 먹고 죽는게
효행의 도리라 생각하는--- 이게 인종의 효의 기본이다.)
의관의 어느 기록엔 죽은 다음날 시신의 피부가 검게 되었단 기록은 독 성분이 퍼졌다는 의미이다.
왕이 묘연히 죽으면 의관은 사약인데, 인종의 주치의(의관)은 그렇치 안았다 전한다. 그리하여 문정왕후의 2살난
자기 친아들 명종이 왕에오르며, 20세 될때까지 문정왕후의 섭정이 이루어 진다.
이 섭정 기간중 우선 장경왕후 오라버니인 윤임의 대윤파 척결을 하게된다.
소윤파는 윤원로, 윤헝원 이 두 오빠들의 을사사화와 양재벽서 사건의 모함으로 윤파 약 100명이 사약의 독배를
마시게 된다.
그리고 섭정당시 보우스님을 만나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숭유억불 정책에 반기를 들며, 도첩제를 실시하고,
승과 시험을 (중이 되자면 시험을) 5회 치러 여기에 사명당 서산대사(유정과 휴정) 같은 걸출한 스님을 배출하기도
하였지만, 성균관 유생과 양반들의 만은 성원을 사기도 하였다.
천하를 찌를것 같은 문정의 세력은 그칠줄 몰랐다.
그러나 문정은 단 하나 사후에도 이런 영화를 바라고, 또 중종과 함께 묻길 원해서, 장경왕후와 같이 묻힌 중종의
묘 터에 물이 나온다는 핑계로 선릉 (성종묘)옆이 길지라는 보우스님의 간언에 힘입어, 선릉 옆에 중종의 묘를
이장하고 정릉이라 명하고 원찰을 봉은사로 정하였다.
이것이 지금 삼성동의 선정릉이다.
문정은 죽어서도 중종과 함께 묻히길 원했고, 그래서 자기가 죽으면 정릉에 합장할 의도로, 장경왕후와 이미
합장된 중종의 묘를 이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봉은사에서 백일 불공을 드리니, 아마 장안 바닥에 문정과
보우스님의 썸씽이란 소문이 만연한 듯 하다.
봉은사에서 백일 불공을 드리니, 오즉이나 보우와 놀지 안았겠냐는 당시 종로바닥의 풍문이..
내가 볼때엔,, 불교와 정치의 상당한 로멘스가 흐른다.
소문이 그러하니 진짜 보우와 문정왕후가 놀아난 듯한 기분이다. 그래도 문정은 아랑곳 하지안고, 보우스님을
병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이는 국방장관이다.
이조 이념이 억불숭유인데, 스님이 장관에 앉자서, 도첩제 시행등 불교 중흥을 이루려 하니, 정국이 항소로 말이
아니었다. 양반은 물론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가 무려 500회에 이르니, 그래도 문정은 이를 무시하고, 그이 세력은
이미 하늘 끝에 다다라 있었다.
이때 사회적으론 사화의 회오리와 윤형원이 첩 정난정이 장안의 부자로 부상하였는데, 형 윤원로는 약간 모자란듯
해서 귀찬은것 같아 윤형원은 애첩 정난정의 모사로 친형까지도 죽인다. 무슨 욕심이...
또한 중종의 정릉은 재실이 물이 차 이 둑 공사로 인하여 왕실 재정은 바닥이 나고, 공사 업체인 봉은사는 부자가
되는 기 현상속에, 명종이 나이 20세가 되어 문정은 법으로 섭정을 물러나니 무려 8년간 대리 청정하고 죽을때까지
12년 더 명종의 정권을 휘둘렀다.
그후 문정왕후가 죽게되자 여론에 밀려, 본인 소원대로 중종의 정릉에 합장이 되지 못하고 별도로 묘를 쓰니
이것이 태릉이다. 지관들은 그들의 주무기가 사후이론인듯,, 이 태릉은 기가 센 터로서 그래서 문정의 기를 누를
수 있다한다. 그런 지관 못할 지관 또 있으랴만, 그래도 명 해석이란 느낌도...
여기서 문정의 20년 섭정이후 문정이 죽게되자 보우스님을 제주로 귀양을 가게된다.
선조는 그래도 보우가 선대 할머니의 (문정) 애인인지, 선왕 원찰의 주지승이기에 사약을 못내리고, 제주목사
(도지사) 변협에게, 죽일것을 묵시 했는지, 제주 목사 변협이 잔꾀를 내어 우습게 죽인다.
보우스님은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모양이다. 또한 불교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보우의 불교론은 교선합일의 정일(正一)사상이다 --- 이는 아래 부제로 설명한다
변협의 보우를 죽이는 잔꾀는??
원래 보우는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세니, 제주에서 힘쎈 놈 10명을 데리고와 시합을 하자고 제안하는데, 룰은
무제한 게임이다.(권투 초창기의 조 루이스처럼 맨 주먹에 무제한 라운드에 다운이면 다음사람과 곧바로 대결하는..)
그래서 보우는 9명을 K,O시키고 (일부러 당한 것처럼 보우의 힘만 빼고 다운 된척하여) 마지막 10번째 대결
선수는 가장 힘센 놈으로 아홉번 싸우고 지친 보우를 잔인하게 때려 죽였다.(아홉명에게 힘을 다 뺀 보우스님은
맞아 죽는다.
이건 일당 십명의 대결로 참살형이다. 하지만, 바다건너 육지에서 소문은 경기시합에서 죽은 것으로 날 것인데,,,)
파란만턴 56세의 보우 스님도 여기서 죽고 말았다.---이것이 사약일까---
만약, 사약을 내리면 선대 왕후의 썸씽맨을 죽였다는 소문은 더 파다해질 것이기에. 나름대로 깔끔하게 처리한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보우스님이 목숨까지 걸고 게임을 즐겼을까??
불 공평한 게임인지도 모를정도로 보우는 아둔했을까??
아니 그보다 1대 10으로 전부 처치하면 산다는 생각을 했었을지도..
그리고, 당 시대에, 문정의 핵심 브레인으로 모사부리던 정난정과 윤형원은 문정이 죽자 파주쯤 오두막살이로
귀양가서 초라한 말로를 맞는데,, 이기붕 가문의 강국, 강욱 형제의 말로와 똑같이 부귀영화를 누리다 쓸쓸해지면
이를 못견디고 자살하여 죽는다.
이로써 서슬퍼런 섭정 8년, 명종 재임기간 12년등 20년 권좌의 더 바랄게 없던, 문정왕후의 섭정의 폐악의 역사는
막을 내리고 태릉에 묻히는데, 얼마나 악랄 했으면 합장도 안하고,이 태릉의 '泰'자를 궁중의 의전상 쓰는 용어가
아닌 클태 자를 골라 썼다 한다.( 궁중 의전 용어는 약 2-3백자정도임)
그리고 태능은 기가 쎈 땅이라 전한다. 그래서 지금도 사관학교의 남자들이 그 기를 꺽는다는 돌파리 도인들의
야기가 좀 재미있는듯---
태능이 합장을 안하는 이유는 문정왕후가 악녀로 아마 후대에 이르러, 중종에 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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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비
구한말 민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로 간략하게 쓰겟다.
안동 김씨의 60년간 세도정치(외척)에 왕권은 극도로 약화되고, 사회는 혼란과 불안속에 일본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에 상승하여 점차 조선을 압박해 오는 시기에, 대원군은 왕족으로 만약에 안동김씨의 눈에 가시면
곧 귀양이고 그 다음에 사약이 따르는게 공식이다.
이런 안동 김씨의 규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원이 대감은 시내 건달들 속에 합류하고, 때로는 김씨네 문중에
반 걸인식으로, 구걸다니기도 하여 (이건 연기가 탈랜트 보다 저 이상으로 리얼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언제 얘기했듯 옷자락에 똥을 묻히고, 안동 김씨네 행사에 참여하여, 맛이간 미치광이 주정뱅이처럼 세인들의
눈밖에 벗어나는 짓들을 하여 목숨을 연명하였다.
철종의 사망이 임박하자, 헌종의 모후와 결탁하여, 이 모후도 세도정치를 청산하려고, 대원이 대감의 둘째 아들
명복이를 철종의 양자로 보내어 철종의 사망 즉시, 명복이는 왕위 계승을 하여 고종이 되며 그의 나이 12세이기에
흥선 대원군이 수렴청정하게 된다.
대원군의 수렴청정에서는, 우선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의해 쇠략한 왕권을 회복하고 대전회통등 법전을 편찬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열강들의 침략에 단속을 게을리 하지 안았으며, 이로써 개혁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병인사옥
(천주교 박해), 조세부담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 고종이 22세에 친정을 원하여 민비가 대원군의 궁궐행차를
근절 후 고종이 대권을 잡으며, 민씨네의 외척이 등장한다.
대원이의 세국을 개방정책으로 전환하며,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며, 일본식 군대가 주둔하자, 임오군란이 발생하었다.
왕십리 똥파리라 하지 안턴가.
이조때 왕십리는 4대문 안의 똥을 퍼다 버리던 곳으로, 냄새가 지독한데. (내가 똥에 관한한 우헨이 보다 한수 위다,
모르는 사람은 똥을 어디다 누었을까를 참조 바란다 ==이조 왕의 탄생이 거기에 있다.)
구식군대는 4대문 밖의 왕심리 똥버리는 곳 옆에 서민 기거지에 주둔하고, 일본의 신식 별기군과는 상이한 푸대접에
구식군대의 봉기가 임오군란이며, 이때 대원이가 복권하여 재 집권 하였으나, 이 시기에 갑신정변 ,갑오경쟁등
외세에 의한 국내변화와, 민비는 청에 결탁하여, 청의 원세개가 이끄는 청군이 대원군을 3년간 청에 볼모로 잡아가고,
민비의 정치가 다시 부활된다.
민비의 집권도 오래지 안아 청일 전쟁에 일본의 승리와 이에 불안을 느낀 명성왕후(민비)가 청에서 이번엔 러시아로
회선하여 결탁하여, 일본은 추종 세력을 다시 규합 민비 시해사건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로써 민비의 파란만은
일생은 끝이난다.
이에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느껴 아관 파천(러시아 공사관에 상주하여 직무를 한것) 1년만에 일본의 조선책략은
시작된다.여기서 일본이 전쟁도 아닌 , 건달 조직으로 타국의 왕비를 시해하는 사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내가 맥아더 친구라면 패망한 일본천황 이 무릎꿇고 빌때 부랄 거세 시키라는거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고종은 대략 여성편력이나 좀 있을거나 하고 좀 멍청한 듯, 능력없는 인간으로 바라보기 쉽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다.---(후기에서)
이 구한말의 시기는 대원이건, 민비건 누구의 잘 잘못을 구분하기 쉽지 안다.
내정의 불안정속에 열강의 침략에 맞서 싸울 능력이 업엇으며, 대원과 민비는 서로의 앙심적인 갈등은 있으나,
서로 다 약자의 시행착오와 대세에 기우는 조선을 지키려는 몸부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 이제 이완의 첩 ---참모로써의 기지와, 한 시대를 수렁으로 몰고간 희대의 악녀, 문정왕후와 서구 열강에 밀리는
조선의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는 명성왕후 민비의 일생을 대략 그려 보았다.
그외 신라의 여왕은 유능 하지만 화백회의가 존립하고 의사 결정에 다소 영향을 주며, 조선 왕비들의 영향력과
황진이를 기생보단 시인으로, 허난설헌 신 사임당, 그리고 한석봉의 어머니 이외엔 별로 기억되는 여성 인물이 없다.
여인들의 능력부족은, 이 시대 구조적 모순이기도 하다.
자 그럼 이중에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민비일거라 생각한다.
후대 모든이의 지표로는 신 사임당이지 않을까--
이어 후기에서, 중종과 함께 묘를 안쓰는 이유(내 생각), 여기엔 우리가 알고 있는 정릉(강씨 부인)의 예를 들고,
보우스님의 진정한 구도의 길 正一思想과 (교선합일), 고종의 현명함과 빽그라운드를 부연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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