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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꼬리를 잡아보며...

天下 第一의 女人은 ? --- 附題

 

          天下 第一의 女人은 ? --- 附題 ]                                                                               

 

 

                                                                              글쓴이: King love 조회수 : 1450. 07.01.20 09:36

 

* 정릉은--

위에서 말한 정릉은 선릉(성종) 옆 정릉으로 장경왕후와 같이 뭍힌(쌍분 형식) 중종을 장하고,

문정왕후가 죽어 합장 할려고 한것이 의도였는데, 문정이 죽었을때,  선정릉에 물이 차 태릉으로

묘를 정하고, 중종도 이장할려 묘를 파 올렸다가 두번 이장이 불가하다는 여론으로 다시 그 자리에

묻었다.

 

대부분 선왕이 왕비와 같이 묻히는데 꼭 중종의 두번 이장이라, 만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이야기 하나 하자.

 

이성계의 正(정) 부인은 한씨다.

방원등 오형제를 낳고, 왕이 되기전에 죽었다. 그래서 종묘에 오르지 못 하고 있었는데. 이후 방번,

방석이를 낳은 강씨 부인은 신덕황후로 후궁이기에 죽어서도 종묘에 오르지 못한다.

 

고려말 이성계는 약관의 나이에 왜구를 6차례나 무찌르는 등  방방곡곡에 이름을  떨치는 수로,

한씨 부인이 죽자 두 번째 부인으로 장관급 집안 딸인 강씨 부인을 맞이하였다.

 

이 강씨 집안의 도움이 있었는지 위화도 회군으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증오스런 부분, 요동정벌을

계속 추진하면 지금의 국경선은 분명 틀려졌으리라--- 바로 이 지점이 나는 울 역사에 가장 증오하는

부분이다. 언제 가상의 역사를 그려 보이겠다)

 

창왕, 우왕에 뒤를 이어 이성계가 왕이 되고  조선을 개국하는 과정에서 강씨부인의 장인의 파워가

어느정도 미쳤으리라. (일전 전대통령 시절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게 이런 맥락이리라. 처가집 덕이고,

그리고 고려 왕건식의 전장의 승리보다는 매너에 의한 통일이고, 주워먹기 식이다,

장수는 백제의 의자왕이나 이세민처럼  전투로 가자 멸하지 않았다는(다음에)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영향) 강씨 부인은 이성계의 총애를 받았다.

2차 왕자의 난에 방번, 방석을 죽이는 결과도 이들 어린아이들의 후궁의 아들들에게 세자 책봉에

문제였다.

이 지극히 사랑받던 강씨 부인이 죽자, 이성계는 먼 발치 정릉에 무덤을 정하고 매일 아침 라보곤

하였는데, 태종 방원은 이를 못 마땅히 여겨, 고개 너머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200년후, 중종시대에 조정에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종묘 사직이 임금님이 절 하는 곳인데,

종묘는 조상에 절하고,  사직단에  나가 농사 잘 되라는 농업의 신에게 절하는것, 이 두곳이 년에 한번

임금이 절하는 곳이다.

 

이 종묘에 최고 조부 이성계의 정비 한씨 부인의 위패가 모셔지지 않아 개국 태조의 위패가 있는게

문제라---그래서 한씨 부인의 묘를 찾아 능으로 정하는 문제인데 한씨부인 묘가 간데가 없었다.

 

어느 사설 기록을 찾아 보니 강씨부인이 한씨의 무덤에서 뼈를 몰래 파내어 아차산 제일 악혈에다

묻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이를 토대로 중종의 명에 의해 지관 두명이 아차산을 훑어 보는데,

이틀날에  광장동의 아차산에 올라 분이 없는 평평한 땅을 파서 한줌의 시신을 찾았다는데, 이 유골

한씨 부인으로 그의 묘를 복원함과 동시, 정릉의 강씨부인의  묘는 국모를 손상하는 악녀로 규정하고,

조정에서 명하여 시신을 파내어 후일 또 다른 화가 없도록, 기록도 없이 어떻해 처리하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 후론 지금도 정릉은 시신의 뼈가 없는 빈 무덤만 남아 있다.

( 명당론에서 혈만이 명당이지 봉분은 예우에 불과하기 때문에 풍수의 길, 흉에 관련을 갖지 못한다)

 

강씨 부인은 악혈에 한씨부인 뼈를 몰래 이장하여, 방원 형제가 불길해져서, 방번, 방석이가 세책봉

되길 원하였고, 그래서 지금 미아리 너머의 정릉은 묘가 빈 무덤이란 것이다.

 

이렇듯 문정왕후와 중종의 합장을 기피하는 대신들 그 이유는 후대에 언젠가 문정의 참화가(부관참시---

무덤을 파내어 뼈를 다시 처형하는것으로 한명회가 당하였다.) 미치지  안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왜나먼 다른 대통의 임금이 나오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끝

 

*보우스님

盈(영)을 영이라 할수 있는가

공(空)을 공이라 할수 있는가

영도, 공도 아니다.

봄날에 스스로 찾아와 꽃은 피니

 

============== 이는 보우의 詩 한수이다.

 

보우는 후세 사람들이 말하길 영통한 듯, 불승의 경지가-------

이 시는 다름아니라 진리는 인간의 세치끝 혀로 말할게 아니란 야기이다.

보우스님은 꺼져가는 이조 중기에 활 화산처럼 솟아오른 불교의 맥이다.

 

이 세상 만물을 허영심(虛暎心)으로 보았다.

진실심과 허영심.

허영심은 물결과 허상으로 보았다.

물결이 잔잔해 지면 이 영상은 없어진다는 비유로,

우리의 마음에 영상이 없어지면 허영심이 소멸된다는 이치이다.

 

이렇게 보우는 깨우친듯 하다니.,,

나는 불자나 크리스쳔 신도는 아니다. 나에게 믿음이나 불심이라곤 바늘 찌를 자리만큼도 없다.

다만 신앙심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그 속에 내가 있기까지 우리의 문화에서 불교와 불교식이 천

넘게 우리의 사상과 문화를 지배하니 이를 이해하고자 조금 노력한 것이고, 크리스천 사상은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 사랑과 믿음으로 출발한 사상이려니 하지만,  불교사상의 기반은 우주에 예속된

인간으로서,우주 질서의 본질에서 출발하였기에, 인간을 알고자 우주까지 들먹수 밖에------

 

삼국시대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하여, 鄭도인이 이  컴에 수록한 일체유심조 사상 (원래 화엄경 문구를

원효가 써 먹은 것이다)으로, 내 마음 먹기에 따른다는 야긴데, 그러면 어떻게 마어야 하냐는 종속적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에 원효는 대승불교의 지위를 확립하고, 고려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으로,

이는 교주선종(敎主禪終)으로, 교종적 선종 통합을 주장했으나, 여기모순이---글 모르는 서민층이

배우고 닦기에 한계가 있으니----

 

보조국사 지눌이 깨달을 오(悟)와 닦을 수(修)로 돈오점수를 들고나와 언어와 문자 이전의 마깨치고,

스스로 닦아 나가야 한다는 선수교종적 입장을 표명하여, (정혜쌍수) 양분된 불교가 천년 내려오며, 조선

중기의 보우 스님이 이를 합할수 있는 이론을 제기 하였다.

이 이론이 보우 스님의 정일론이다. 즉 교선 합일 사상이다.

보우는 이렇듯 당대 유능한 고승임에 틀림없다.

 

보우는 문정왕후와 만남으로, 조선의 꺼져가는 불교 중흥을 이룩하였다.

문정의 불신자적 마음으로, 우선 성종시절 도첩제를  폐지하고  사찰을  철거하여, 맥을 잇지 못하불교를,

봉은사를 선종의 원찰로, 봉선사를 교종의 원찰로 지정하고 전국의 사찰을 300여개 승인하고, 도첩제를

부활하여, 스님의 수를 늘리며, 승과시험의 과거제로 스님을 모집하여, 유정과 휴정등을 배출하였으며

이후로 스님의 도성출입이 자유로워진다.

 

실지 보우와 문정왕후의 구체적 로맨스는 어느 책에도 없다. 그러나 당대의 사람들 눈으론,--

그런 소문이--- 후대의 나도 가능하리라 생각 되어질 만큼.

 

하지만 보우는 현실을 직시했고, 자기가 있는 불교 중흥을 꾀 했으며, 또한 서른 다섯  나이에 했다고 본다.

내가 볼때도 이 정일론은 훌륭하였으나, 이 사상이 발전이 시대 정치상황으로 좌초되었다.

이 사상의 논리가 활성화 되었드라면 지금의 우리 현실도 차이가 있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그후 보조국사(고려조의 지눌의 禪(선))의 돈오점수의 한국형 불교가 일전 성철스님의 돈오돈천년만에

쌍벽을 이루어 불교학자들 사이에 성철스님이 마니 거론되며 (돈오돈수와 정혜쌍수의) 유명해 진것이지.

누군들 어느 스님이 더 깊이 정진했을까--- 이를 알 수 있을까?

 

만약 지눌과 성철스님 사이의 논쟁에 추사선생이 끼어 들었다면 재미있는 논쟁이  되었슬 법이기도하나 (아

우리나라 최고의 논쟁쯤) 이해 못할 점은 이런 고승들 대부분이 죽음을 앞두고, 나 이안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데. 그 스님들이 말하는 이 사바의 세계는 버리고 살았단 말인지. (현실 부정론쯤도)

 

나 후세는 내가 지금 앉으면 그곳이 바로 내 고향인데. 한번 만인 내 인생을, 나의 역량과, 나의 속에서,

나만의 최대한의 삶을 이루는게 나의 행복이라 생각한다.

 

나의 친우---보우여 영원하리.

 

+++ 도첩제+++

도첩제는 조선 초기에 승려 제한과 조세 형평을 맞추기 위해, 스님의 숫자를 제한하며, 스님이

인지세라할까 베 200필 정도에 중(스님)의 호패를 주는 중과세로 스님 억지책을 썼으나, 종때

유교중흥으로 아예 호폐법을 폐지하고 중이 못되도록 하였고, 사찰도 전부 철거 하였다. 

 

이후 문정과 보우는 도첩제 부활로 한해 약 30명 정도의 스님만 계획하였으나 무려 400명 정도의

인증한다. 그리고, 이 시기 4,000명 스님이 생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 고종황제와 을사 늑약

1905년 일본의 2차 한일의정서 비준 조인 서류를 을사보호조약이라 하는데,  이는 쌍방이 서로 조인

국제 문서가 아니라 강압으로 이루어 졌기에 을사늑약이라 해야 올타.

또한 일본은 천황이라는데, 천왕이라야 하고, 우리의 고종, 순종은 연호를 광무라하고, 고종은 황제

극하였다. 이로써 민비는 잘못된 용어이고, 명성황후라고 표현하는게 예의이다. 

 

금곡에 홍 ,유릉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묘인데, 우리의 전통양삭은 원나라에서 발상되어 이성계의 동구릉

준 모델이다. 이는 국조오례의라는 궁중 장례 예법에의한 양식인데, 왕들은 묘 뒤로 곡장을(담) 두

12지간의 석물을(말, 양등--)  배열하였는데, 고종은 황제의 릉으로 이 12지간의 석물이 앞에  배치되

있다. 엄연히 죽어서도 황제의 예를 따른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으로 세력을 키워, 청일전쟁의 승리, 러일전쟁의 승로,

1905년  미국에서 쏘련과 포츠머스 조약을 힘입에, 우리나라에 강압으로 형제의 나라가 되요구한 것이다.

 

아관파천에서 일본의 강압으로 덕수궁으로 복귀한 고종은 별다른 힘이 없었다. 일본은 특사 이또 히로부미와

미우라 공사의 공작만 진행 되었는데, 그 엄포가 일식 군대 1개 중대가 임금님 앞의 덕수궁에 진을 치며,

고종의 목을 조르는 판세이다.

아마, 미우라 공사는 서구 열강에 우리 일본이 형제의 국가로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는 감언이설로 억압

였으리라.

 

일본 군대가 임금의 앞 마당에서 훈련을 하며 총을 겨누고 고종에게 2차 한일 의정서의 비준을 독하는데,

이에 고종은, 돌아가 계시게, 우리나라도 저명한 학자가 있으니 의견을 물어봐야 되고, 백성이 있으니, 민의도

렴해 봐야 할 터이( 이 시기에 민의 수렴이란 용어를 사용한 고종은 현명한 군주였다.)

이에, 미우라 공사는 아니, 당신네 나라는 전제 군주 국가요. 민의라니,,, 짐이 국가가 아니요.

 

그렇다, 이 시대는 고종의 나라고 고종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제 군주 국가인데 ----고종의 그러언변은

으로 그 시대 상황에선 명언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래도 할 수 없이 고종이 감기 기운에 핑계구실로 병원에 입실하였다.

 

그러자, 덕수궁 공관에서 한,일 합방을 조인을 하자던 약속 시간에 임금이 없으니, 미우라 공사는 왕 다음 서열의

연대 으로 총리 대신의 권한으로 비준할 것을 부탁하고 입실하였다 하니, 이에 총리 대신 한규설은, 세상에

런일이??하며 왕실로 황급히 뛰쳐가다, 왕비(엄 계비)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무슨 일이랴, 왕비의 방을 들어 간다는게 죽음과도 다름없으니, 한규설은 실신하여 곧바로 그자리에 쓰러지고,  

미우라 공사는 고집 쎈 한규설 참정대신을 쪽방에 가두고 총리대신도 입실했으니, 대신들의를 개최해 줄것을

요구하였다.

 

참정대신(총리) 한규설을 제외한 일곱 대신만 남았다.

이 자리에서 회의를 박차고 나가면 내일부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

끼니와 먼 후일 삼족의 생애가 달린 문제이다.

 

그래서 학부대신 이완용이 두개의 건의사항(미약한 것)만 수정하고, 옥새를 훔쳐 찍은게 아니라. 자리에

남아 있던 5명의 대신들 이름으로 "한일 의정서" 협약이 통과된 것이다.

 

국제 협약은 통수권자에 의해 조인되야 하는게 아닌가.

그래서 이는 국제 기준에 인정되지 않는 조약이고, 강권에 의한 조약이기에 늑약인 것이다.

 

이 조약에 문을 박차고 나올 배짱도 없이 남아있던 을사오적은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이완용인데,

다음날로 일제가 하사품(토지위주)내려주고, 민중 봉기가 될까 협약사실은 숨기고, 수일내로 이제 공식

석상에 이 오적을 초대하받은게 있는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이렇게 하여 사실상의 합방은 이루고

1910년에 정식 문서를 또 만들어 식민정치를 시작한다.

 

이 썩어 빠질 쌔끼들 사이에도 총리대신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하였고, 민영식의 자결하고 "시일야방성대곡"이

신문에 나오고, 헤이그 밀사 사건도 나온다.

이때 성균관의 이상설은 조약이 아니라 사기라고 임금에게 다섯차례 진언과 상소를 올리고 곧바로 종로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알리다 일제 형사들을 피해 북간도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준열사, 이위종 이상설 이 세분이 이억 만리 헤이그까지 가서, 만국 회의장 연단에 올라 이준열사자결을

한다(쪼끔 아이러니는 가미가제 일본놈이라면 세사람 함께 자결할텐데 --)

 

여기서 이준이란 분은 헤이그 가기 2년전 고종의 밀사로 러시아를 다녀왔고, 이상설은 북간도에서, 애국과

교육에 심혈을. 이위종은 러시아 참사관으로  근무하다가 밀사에 가담하였고, 밀사사건 이후, 종신형 선고되자

제가 미치지 못하는 블라디 보스톡 변두리에서 힘들게 사셨다.

 

 

이준 열사의 시 한수 =======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 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안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을 얻을것 이외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으니, 모름지기 죽고 삶에 힘써 할 지어다.

 

대강 기억에 이러한 시를 남겼다.

고종의 야기가 꼬리를 무는데, 이 부분에서 고종은, 이조 전체의 역사의 모순을 한 몸에 지녔다.

왕의 태생이 적장자등의 정통아닌 뿌리가 미약했던 것과 구심점이 없었던 것이다. (이조 가장 큰 모순

나의 글 "똥"에서 밝힌 글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고종에 성은을 입은 귀인, 비빈만도 13-4명 정도니 여인만 탐닉한, 그래서 무능

정치를 하였다 인식하는데, 전혀 그렇치 않다.

위에서 이야기한 전제 군주가 백성의 민의를 수렴한다는 ,펑등한 사상과 언변을 지녔다.

다만 국력의 약한과, 왕을 받혀주는 세력이 외척과 덕흥 대원군의 갈림으로 자기 스스로의 왕권의 세력이

없었던 점이다.

 

헤이그 밀사 이후 1907년 정미 7 조약으로 강제 하야되고, 순종황제에 고종은 국가 소유인 한성전기

주식을(왕의 소유이니..) 팔아 이승만등으로 하여금 통제가 심하니 일본으로 가서 하와이를 거쳐 미국에

이르는 경로로 빠져나가 부던히 독립을 노력하였지만, 그래도 이조 500년의 역사에 가장 치욕적이고

욕적인 임금으로 남았다.

 

===========================

 

이완용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최고의 엘리트로, 또한 최고의 역적이 될 수 있는 단면을 보여주며.

박제순은 외무 대신으로 조약후 집으로 돌아와, 그래도 오늘 목숨을 간신히 건졌다고 말 하니 식모가

부엌 칼을 가져와 박제순의 목에 대고, 나는 무식하지만 안다는 사람들이 나라를 팔았다고, 흥분하였다

한다.

그 당시 시대에도 을사 오적에 관한 미움이 많았던 모양이다.

 

다음 글에선 우리 과거사 규정 위원회인가 뭔가 지 맘대로 규정지을 수 있는지??

내가 알고 있는 역적들,,,,, 며느리까지 범하여 첫 아들이 자살한 희대의 악마 이완용은 물론 일본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치게한 당사자 서재필의 과오, 독립협회란 두 번째 회장이 이완용이 되는 사연, 을미왜변에 유길준,,,

이는 국모 살해에 분명한 선과 사변이후 유길준이 일본에 의해 내무장관으로 등용되어 일미왜변을 정리한 점등,,,,,

 

어느날 동창들과 검단산 산행에 중간 길로 내려오는데 어떤 무덤들의 봉분이 새로 단장을,,

잠시 쉬는데, 중간 무덤에만 비석이 세워지고 이상타 하니  언 친구가 무덤의 비석을 보고 오더니 하는 말인즉,

유길준과 그 동생의 묘란다.

그런데 유길준의 동생은 한자리 하여서 비석을 세우고 한문으로 뭐라 썼는데, 유길준의 묘는 비석에 아무 관직도

없이 이름석자만 덩그러니 있다고 한다.

 

서유견문인가 하는 책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유길준은 비석에 아무 글도 없다고 이상하다 하길래..

난 그자리에서 친구들에게 한 수 하였다.

유길준은 명성왕후 시해 후 일본의 조정으로 내무대신에 올라 국모를 시해한 천인공노할 일본 악당들을 처형하지

못하고, 역사의 정리를 하였던 일제의 꼭두각시라...

세계 어느 역사를 뒤져도 이렇게 남의 국모를 시해한 역사는 없다. 유길준은 죽어도 그 책임을 통감하여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과거사 규정 위원회는 한일 합방이 되는 과정에 일제에 협력한 조력자들에겐  무 신경인 듯하다.

 

또한 역적만 정리함보단 만해, 이상설, 최재형,강우규등 후대에선 잘 모르는 역사를 참신하게 알려 주는게

과거사를 정리함에 우선해 있어야 한다.

참고로 이준보단 이상설이 일본재판에선 사형인,,,, 우리가 알고 있는 헤이그 밀사사건은 정확치 못한점등....

 

일반적이지 않는 글들,,,오늘은 이만합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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