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백마지기 어원에 대한 문의에 답을 드립니다.
후세백작
<요약>
육백마지기는 본인 이외에 모든 사람들은 볍씨 육백말을 뿌릴 공간이라 한다. 육백마지기에 어원은“육백 +마지기”의 합성어로 육백은 제자백가 시대에 풍수가의 음양오행설의 이론에 따라서 아홉별 중에 여섯째를 육백이라하며 금성을 말함이다. 육백마지기를 어느 농부가 산 넓의 공간을 볍씨 육백말을 뿌릴만한 공간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이제는 내 말을 믿든 않믿든 맘대로 무식하게들 하시고..인터넷에서 백과사전 한번 찾아보시면..
<인터넷 사전 검색>
◆ 육백(六白) - 음양설에서 아홉 별의 하나인 금성을 이르는 말
◆ 음양설 (陰陽說) - 음과 양의 이, 기를 우주 만물의 생장 변화의 근본 원리로 하는 설
◆ 구성(九星) - 一白은 음양가에서 수성을 일컷는 말, 二惑은 토성, 三碧은 목성, 四綠 삼벽과 함께 목성을 일컷는 말. 五黃은 토성, 六白은 금성, 七赤은 육백과 함께 금성을 일컷는 말. 八白은 토성. 紫白은 화성을 말한다. 이것이 음양수로 말하는 아홉별이다.
이렇케 일반 사전까지 들춰주는데 나에게 자꾸 딴 말들 할것인가??
ssssssssssssssssssssssssss
미탄 주민분은 육백마지기 화전시 "육백마지기"란 예전에 자신들이 화전을 개간하기 이전에는 그러한 단어를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곳에 밭을 개간하며 생겨난 단어라 합니다.
이 물음에 답에 앞서서 그러한 글이 후세백작이란 닉으로 게시되었기에 누군인지 알지를 못하여 결국 문화원장님께 전화로 문의하셨다는데 인터넷상의 이러한 역사적인 이해의 글에 본인의 실명으로 하고 그에 책임을 다해야 하지만 누군지 알 수도 없게 닉를 사용한 점은 사과 드립니다.
기실 본인은 평창글 하나 썼다고 이름을 달고 마치 자랑이라도 하려는듯한 점을 피하기 위해 닉으로 게시합니다만 이미 평창의 역사와 미탄의 아라리에 대한 글이 100여편 넘고 약 1~2백만자가 되어도 특별한 것이외엔 전부 닉을 사용했습니다.
닉이 아닌 에외는 일전 전국문화원 연합에 응모한 논문 한편으로 그도 국사편찬 위원장상을 수상하였기에 사실대로 하기 위해서 닉을 사용치 않았던것 입니다.
◆ 그러면 이에 대한 본인의 육백마지기 어원의 답을 드립니다.
우선 육백마지기에 대한 한권의 책을 인용합니다.
「증편 한국 구비문학대계 2-10」 라는 책에서 "육백마지기 지명 유래"편에 제보자 박옥녀(81세)
육백마지기는 옛날에 가난한 사람들이 올라가 감자 농사를 짓다가 부정한 짓을 하자 짐승들이 사람을 헤치는 좋치안은 일들이 생겨나게되 사람들은 감자를 땅에묻고 청옥산을 떠나게 되었다. 몇 백년 지나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곳에 다시 올라가 살았는데 이들은 그 감자가루를 파먹고 메밀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래서 청옥산 육백마지기라 불리기조 한다- 이상-
*「증편 한국 구비문학대계 2-10」 황루시, 유명희, 박현숙, 이원영 박사 한국학 중앙연구원 p122
이 이야기는 본인의 전글에서 비평한바 구전의 구비 이야기를 발췌한 박사 네사람 모두 여성분들이라 심하게 비하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박사들이라면 어느 지역을 답사할때 그 지역의 향토적 정체성등을 숙지하고 최소한 이해의 지식을 담고서 방문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기에 한국구비문학을 위해서 평창에 답사나 채록하기 위해 나선다면 최소한 이곳을 답사전에 평창 특유의 구원성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연구하고 이에 촛점을 맞춰야 하지 위 예시의 육백마지기 이야기가 구전되는 설의 하나라고 썰까면 오류란 점입니다.
물론 이 지방에 회자되는 이야기이지만 이곳의 지금의 노인네들은 정확환 기원설은 알지못하는데 노인네들이 마음대로 생각대로 지어 전하는 이야기도 구전되는 욱백마지기 유래의 설이라 한다면 이는 평창의 정체성을 기만하는 것이다. 정말 원래의 육백마지기 유래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서 그것을 개진하고 기록하여야 박사들이지 동네 회관등지를 다니며 노인들이 매스미디어상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것을 여과없이 전부 채록하여 구비문학 대계라고 이름붙인다면 참으로 웃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럴라면 알바도 할 수 있는 일인데 어찌 고비용의 박사들이 수고할 필요가 있슬까?? 그래서 본인은 이러한 역사채록의 허울을 성토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오류들의 예를 들어 본다면 평창아라리 채록 수집분이다.
평창아라리의 외형적 특성중 가장큰 것은 평창아라리 천 여수를 다 보아도 모두 후렴이 없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후렴이 달린 아라리를 채록하는데 이것은 그냥 보아도 평창아라리가 아니다. 왜냐면 후렴이 없는 평창아라리는 똑같은 가사의 사설에서도 후렴이 달린 정선 아라리보다 박자가 좀 빠르고 정선 아라리는 후렴을 부르기 위해 상대적으로 박자가 느려지기에 여하를 막론하고 후렴이 달렷다면 그것은 정선 아라리이지 평창아라리가 아닌 것이다.
최소한 박사들이라면 이러한 어려운 전문성을 가지고 채록에 임했어야 하는데 시골 노인네들이 매스미디어상의 정성 아리랑을 듣고 따라 부르는것도 채록하여 평창아라리라 한다면 이는 오참으로 무심한 오류로 평창아라리의 정체성을 망각시키기에 본인은 평창에 관한 세미나를 한 학자들의 레포트에서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극심한 오류를 하였듯이 이 구비문학대계의 두터운 책도 평창역사를의 정체성과 전통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러기에 본인의 평창역사의 오류들의 집합방에 모셔서 평창역사에 기록할 것이다.
아렇듯 역사적 이야기중에 정설도 아닌것이 여러사람의 입에 여러 이야기가 더 붙여져가며 확산되는 것은 모든 역사에 다반저적인 일이며 그 속에 과연 어떠한 이야기가 육백마지기 어원에 합리성을 띤 정설인가 하는 문제에 답을 드립니다.
일전에 본인은 다른 학자들의 짧은 멘트에서 그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육백마지기"어원을 고찰한바 六白은 금성이고 마지기는 맞이하기가 구개음화되어서 준말이 된 것이란 풀이를 하였던바, 六白마지기 금성을 맞이하는 장소란 해석과 정선을 넘던 성마령(星摩嶺)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마령에서 보면 될 별을 힘들게 이곳 육백마지기를 찾아와 봐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니라 성마량은 해발 973m이고 육백마지기는 1,256m이다. 약 280여m의 고도 차이를 가진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하면 성마령의 973m 높이는 평창의 시내의 평균고도 해발 370m(평창읍 기준)보다 600여m 높은것으로 이 고도 차아에 별빛이 완연히 틀려서 성마령, 즉 별을 어루만질 수 있는 고개라는 단어가 창출되었다. 그러면 육백마지기는 청옥산의 제일 높은봉으로 해발 1,256m이기에 이는 성마령보다 약 280여m더 높다면 대기의 수분이 적어 별빛이 방해를 덜 타고 전달되기에 더욱 밝개 , 더 무수히 보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나 옛날에는 태양의 내행성인 금성을 알지못하고 당시에는 육백이라 불리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역학, 천문등에는 태양력이 없았으며 음력을 사용하였듯이 금성이란 단어대신 음양으로 보는 六白이라 불리었던 것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옛 선인들은 새벽에 동쪽 하늘로 뜨는 큰 별의 六白(금성)을 맞이하는 장소란 뜻으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좀더 구체성있게 표현한다면 이곳에 올라 별을 보는 경우와 또는 미탄읍내 마을의 집 마당에서 보면 이른새벽 동쪽 높은 청옥산 마루위로 금성이 떠오르는데 너무나 큰 별이라 마치 떨어질듯하며 떠오르는 금성을 맞이하는 장소가 육백마지기란 뜻으로 육백은 옛 고어로 금성을 뜻하며 마지기는 맞이하기가 마지하기로 구개음화되어 마지기로 명사형화의 준말로 바뀐 것으로 이해하여야 좋을듯 합니다.
금성은 온 하늘의 별중에 가장 밝은 별로 흔히 별을 초롱초롱이란 표현을 쓰지만 금성의 표현은 이를 넘어서야 할만큼 밝은 것으로 평야에서 볼때는 동쪽 하늘 조금위 달 아래 메달려있는듯이 보일테지만 이곳의 청옥산은 산마루가 높고 바로 아래두만이 마을이나 시내일원에서 볼때는 산과의 거리가 가까워 마치 산위로 솟아 오르는듯 하며 높이 올라간듯 하지않고 산마루위에 조금 떠올라 마지 다가오는듯한 느낌을 가질것입니다.그래서 저 높은 하늘의 별의 느낌이 아닌 산위로 걸치기에 산을 맞이하는 별로도 보이는 것으로 이에 표현으로 육백맞이하기가로 표현되며 이는 육백마지기로 변하는 어원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밤하늘에 별빛이란 사막에서나 몽골의 초원에서는 대지의 수분이 없기에 별빛 또한 남다르다 합니다.
사막의 중동지역과 몽골도 자주다닌 친구에게 사막에서 별을 보면 어떤가 하고 물어보았더니 그 첫마디 답에 여자들은 별빛을 바라보며 운다고 합니다. 이것은 별빛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감정이 복받치는 느낌이란 표현으로 이러한 별빛을 바라보고 누구나 시를 쓰지 않아도 감탄사를 연발하는 시인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몽골 초원의 사진은 모두들 파란색 하늘이다. 우리는 시력이 2,0이면 최고일것이나 이러한 초원의 맑은 자연환경에서는 시력이 4,0까지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동물들의 기능처럼 인간의 환경의 여건에 따라 특수적 기능이 발달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몽골의 대초원에서의 밤하늘은 어떨까요? 물론 가서 집적 보지를 못헤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별빛 쏟아지는 밤에는 한폭의 동화의 그림속 옛 이야기속의 풍경일듯 합니다.
별자리 이름붙이기엔 옛날 중동지방의 양치기들의 별자리가 많으며 그 별자리들은 우리의 육안으로는 잘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중동지방에서는 그러한 별자리까지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의 별빛과는 확연한 차이를 가지기 때문입니다(본인은 예전에 별자리 인덱스를 탐독하며 지금도 조금 기억하는데, 그래서 별자리를 조금 파악하며 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러하듯 우리 옛 선인들도 별빛을 보면 같은 감정이라 성마령보다 더 높은 육백마지기에서 별빛은 더욱 많으며, 더욱 또렸하기에 옛날에도 나물 뜯으러나 이곳에 오른 옛 선인들이 초저녁 동편하늘에 가장 크게 떠오르는 금성을 매만질수있는 지역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 물론 밤하늘에 초롱초롱하게 수 놓은 별들과 은하수의 무수히 많은 별들,,, 물론 지구도 은하수 내에 있습니다만,,지구상에서 육안으로 볼 수있는 별은 6등성까지이며 약 6천개라 합니다. 그러면 북반구에서는 남쪽 십자성을 볼 수 없듯이 약 3천여개의 별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탄 분들이 문화원장님에게 문의한 우리가 이곳에 화전을 개간하기전엔 이름도 없던곳이 화전을 개간하며 육백마지기간 지명이 생겨났는데 어찌 역사학자란 분들이 말씀하시는 육백은 금성이라는,, 그레서 육백마지기는 금성을 맞이하는 장소라고 하는말이 맞는것입니까 하는 의문에 당사자 본인으로 그에 명확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한치뒷산 육백마지기 아라리(아리랑) 가사는 약 2~30여종의 사설로 예전에 미탄면 일대에서 발생한 아라리 사설들입니다. 이 사설들은 한치뒷산 육백마지기를 배경으로 하며 발생되는데, 그 가사들중엔 해방된 이후의 가사도 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가사 하나를 인용해 봅니다.
"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죽이 님에(나즈미) 맛만 같은면 ~ "이라는 사설을 예로 듭니다.
이 사설에서 정상적으로 "님에" 라고 불러야 되는 단어를 어떤 사람은 "나즈미"란 단어가 운치가 있다고 님에대신 사용하는데 나즈미란 "님에"란 뜻의 일본어입니다. 여기서 이런 용어로 참작해 볼때 나즈미로 불리던 가사의 아리랑은 일제하에 우리나라에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유행할때인 1930년대(김열규나 황헌의 매천야록, 그리고 가장 객관적인 헐버트의 아리랑이 기록되던 시대에서..) 이 당시에 아리랑이라고 해석해 볼 수있으며, 그 시기가 최소한 일제하란 점에서 화전민들이 청옥산에 올라 경지를 개간화여 농사를 짓기 이전의 시대로 근자에 화전민들이 청옥산에 올라 육백마지기를 개간하여 생긴 명칭의 이해는 아니라는 점이고 또한 마지기는 논의 경작단위이고 밭의 단위는 두락이란 점으로도 청옥산의 육백마지기란 용어는 밭농사와는 관련이 없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위에서 보듯 "나즈미"란 가사를 지금도 간혹 사용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친일파란 점입니다.
화전민들이 오르기전엔 육백마지기란 아무런 이름이 없었고 화전의 경작지를 일궈 농사를 짓자 육백마지기란 단어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는 아리랑 가사에도 나타나듯 옛 선인들이 부르던 노래에서도 쉬이 찾아 볼 수있는 단어로 화전민들이 이곳을 개간하자 어느 사람들이 이곳이 옛날에 육백마지기란 명칭으로 불리었다고 말하자 화전민들 사이에 이 용어의 의미가 와전되어 육백마지기는 밭이 크다는 의미의 단위로 사용되었다는 본인의 가상적 이해를 제시합니다.
예전에 본인의 남부권 개발안이란 글에서, 육백마지기는 한치뒷산으로 평창아라리의 보고이며 또한 금성을 바라보는 무대이기에 이곳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평창아리리의 문화궁전과 천문대가 있는 오토 캠프촌을 마련하자고 제안했습니다만,,
옛부터 한치 뒷산은 아라리의 사설이 가장많이 발생된 지역이었고, 또한 별빛을 바라볼 수 있는 "육백마지기"란 지역의 이름이 전래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육백마지기란 아직도 고형 그대로 보존되고 오늘도 살아 숨쉬는 평창아라리의 진원지이고 또한 별빛을 바라보는 장소란 의미 두 가지의 뜻이 담겨있는 곳입니다.
이것이 남부권에서 가장 큰 자원이란 점입니다. 이 자원이란 우리 시대가 지나도 언젠가는 육백마지기에 민족 아리랑의 전통성을 그대로 간직한 평창아라리의 상징적 메카로 이용될 수도 있으며, 지난해에도 이곳에 꽃을 심어 꽃과 별빛이 어우러지는 축제의 한마당을 개최한바 이곳은 평창 정체성을 표출하는 스토리텔링의 여러 아이콘 개발이 가능한 지역인 것입니다.
평창아리랑 보존회는 몇 해전인가 미탄에 공연 연습실을 마련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유네스코에 등재된 평창아리랑 보존회의 상징적 스토리텔링이 없다면 이또한 말이 되겠습니까?? 평창아라리의 상징체는그 역사 보존과 제반 기념비적인 평창아리랑을 보존, 전시하며 영상으로도 상영할 수 있는 평창아라리의 메카니즘을 만들어야 하는 곳으로 좋은 위치란 점입니다. (* 평창아리랑의 고형적 전통성과 제 이론의 성격들은 본인의 게시물에 많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욱백마지기가 어느 시인의 시어처럼 금성과 별빛을 바라보는 "별빛마루"로서, 이곳에 천문대를 설치한다면 영월 봉래산의 해발 800여m 높이의 천문대와는 질적 개념이 틀린 해발 1,250여m로 만약 이 계획에 환경평가 보고서가 작성된다면 이곳은 고도도 높아 별빛이 잘 보이지만, 또한 토산으로 많은 숲들사이에 습기가 억제되어 습기 밀도라든가 이러한 전문적인 평가에서도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지역이란 예측입니다.
또한 세부적 평가로 이 산은 정상부도 고원으로 이루어져 많은 주차시설에 제한을 받지않고 오르막길도 경사도 20도 내외의 넓고 평탄한 오르막길이라 야간 운전에도 보다 안전한 도로망이 구축되어 있으며 천문대는 물론, 산 정상의 시계의 경관도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담기에 전국에 가장 큰 오토 캠핑장으로도 유리한 조건을 갖고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육백마지기에 대한 현재의 인위적 충돌의 경고문 하나 제시합니다.
청옥산 산마루 육백마지기엔 10여년전 풍력발전기가 10여개가 하늘높은줄 모르고 우뚝 세워졌습니다. 이 풍경은 보기 좋을듯 하지만 기실 문명사회에서 잡다한 일상을 잊고 자연으로 레져의 휴식을 취할때 청정하늘과 맑은 숲의 공기를 만끽하려 이곳을 찾아오면 쇠 파이프와 철조망애 소리까지 끊이지않는 풍력발전기는 레져에 시각적 공해란 점입니다.
엇그제 오후에도 이곳을 오르니 팬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이것 또한 육백마지기로 본다면 하늘에 날벼락 소리란 점입니다.
육백마지기는 평창 남부 자원의 보고로 지금도 이곳 육백마지기에서 유네스코에 등제된 미탄의 평창아라리 보존회의 산상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아라리 한마당에 이런 소리가 잡음으로 끼이는 것이다. 또한 이 소리는 밤이면 대류가 아래로 가라앉는 호이겐스 현상으로 윙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리며 아마도 한참을 듣고 있노라면 윙윙거리는 연속성의 소리는 답답한 마음에 귀신소리처럼도 들릴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간혹 이곳에 올라 캠프를 하지만 이것이 활성화되어 오토 캠프장을 세운다면 이 바람가르는 소리는 공해로 큰 문제를 야기시킬수 있다는 점이다. 풍력 발전기는 공사금액에 비해 발전량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공기의 대류의 순환이란 점에서도 이론은 이것이 없는 옛날에는 모든 식물군락이 스스로의 환경에 잘 보존되고 있는 청정지역이기에 이러한 이론을 여기에 도입할 필요도 없다고 보는 것입다.
다만, 이 시대에 이곳이 본인이 제시하는 남부권 개발안이 형성되지 못한다하여도 후손의 시간대에서라도 이 지점은 평창의 차별성을 가진 스토리텔링의 아이콘 개발로 레져산업이 가능한 지역인만큼 그때엔 이러한 풍력발전기의 방해를 받을것이면 우리시대의 우둔함을 탓할 것이라.
또한 지난해엔 현지 주민들의 주최인지 산악 답사와 민들레 꽃의 축제행사가 열렸다.
어느 시인의 시어처럼 육백마지기의 별빛마루에서 꽃 향기와 어울러지며 이를 예찬하는 시 낭독회까지의 자연의 싱그러움을 만끽하는 즐거운 축제였으리라.
하지만 문제의 하나는 이 청옥산에는 민들래가 자생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축제에 핀 민들레는 외래종 꽃씨로 혹시나 이는 육백마지기는 물론 청옥산 전체에 민들레 자생범위의 해발 고도 영역을 넘어서 퍼지면 자생종 20여개의 꽃씨의 행로는 불투명해진다는 의견입니다.
그러기에 당국은 앞으로 발전이 예상되는 육백마지기에 생태환경 평가 조사서를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자연보존에 근거를 마련해야 될 것입니다. 이번에 이곳에 올라보니 긴 비닐하우스 몇 동에 꽃을 재배하던데 그것이 어떤 꽃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외래종이라면 당국은 즉시 보상을 하고 이에 제동을 걸어 자생종 육성 보호 정책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점입니다. 혹간 이러한 이야기가 잠시적이나마 농민에게 피해로 돌아갈 수는 있지만 먼 후일로 본다면 더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리란 점으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이 시대는 육백마지기을 이용하고 개발하지 않는다 하여도 육백마지기는 미래를 위한 자산으로 깨끗히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또한 아름답지 않습니까??
육백마지기의 어원에 대한 문의에 답에서 일전 남부권 개발안의 상세 설명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래에는 평창아리랑의 이해애 첫 부분을 조금 올려서 평창아리랑은 정성아리랑의 하류라고 하는 생각과 재미도 없는 노래라는 점에서 이해에 아리랑은 재미의 가락을 넘어서는 이 고장 생활의 삶의 숨결이었기에 앞으로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잠시 올리며 앞으로 수 편에 걸쳐서 평창아라리의 재 논고를 할 계획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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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가지만 이해해 볼까요...
지난 동계 올림픽때 정선 촌노의 정선아리랑 한 곡조 멋있게들 들었슬 것입니다. 정선 아라리에 반기를 드는 본인도 그 영상은 멋있다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앵콜로 다른 사설의 아라리를 부르면 동일한 가락이기에 이미 들은 기억에 별거란 뜻으로 우리는 노랫말의 가사는 무언가하며 사설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은 동일한 가락의 번복이기에 금방 실증을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가락에 의존하여 천 여수 사설이 있다면 이를 가락의 기능성이 우수하다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요즘 젋은이들은 다섯곡만 들으면 다른 장르로 가야 하는 것과 비교하여보면 하나의 가락이 무던히 참고 견딘다 해야 하나요.
그러기에 아라리의 노래는 가락이 아닌 사설에 의미가 있으며 이러한 사설을 읇을때 동일한 후렴도 실증을 느껴 후렴을 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창 아리랑입니다.
그러면 정선 아라리는 예전에는 평창아라리와 동일한 사설에 동일한 가락으로 영서지방 산의 아라리란 이헤이다. 정선아라리는 개화기에 문화가 유입되며 이에 접촉으로 인하여 정선 아라리는 변질된 , 그리고 그 기능성에 탬포도 제 이론의 성립 요건을 파기하는 짝퉁인 셈이란 점입니다. 그러기에 이점으로 볼때 음반 수집가 이보형나 고숙경이 이야기하는 정선 아라리의 찬미론은 본인의 상식으로 볼때는 편견이란 점입니다.
아마도 다음해부터는 모든 것을 접고 이러한 아리랑의 이해. 아리랑의 의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부터 평창아리랑의 제 논조의 성격까지 써 내려갈것입니다.
정선 아라리는 두문동이 전오륜이고 아라리 기록은 모두 1985년 이후의 기록을 뿐이란 점입니다.
그러기에 이 아라리 기록들은 근자에 정선아라리가 확산된 뒤 계산에 의한 기록이기에 지금 이른 인용한다는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평창아라리 가사는 1930년대에 진부에서 5개가 채집되는것으로 우리나라의 최초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박달낭근이라는 아라리 가사들로 정선 아라리에서는 해학편에 분류되있지만 본인은 이 뜻이 오대산 박달나무가 목기로 사용되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라는 세밀한 해석도 해 놓았습니다. 이 해석의 증명은 이효석의 「산협」과 진부를 배경으로 하는 단편소설 「개살구」에 당시 진부의 시대상황속에 박달나무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평창아라리는 한치 뒷산의 평창아리리 사설이 제일 많으며 이는 미탄 일대에서 불려지던 아라리로 그 상징성이 한치뒷산의 육백마지기 (청옥산 제1봉)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산들은 봉우리가 뾰족하고 올라가기 힘들지만 이곳 청옥산은 토산으로 봉우리도 둥그런 모양으로 오르기 쉬운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선 아라리의 찬미자들 고, 박만일이나 김연갑, 강등학, 이창식 전산재등 무수한 학자나 연구자의 찬미론은 모두 인정할 수 없으며 또한 진용산의 뗏목 아라리는 모든 산간에서 산판을 하여 벌목하였지만 그중 해발 천여m가 넘는 산을 대여섯개 낀 오대천, 수항천이 아우라지등보다 가장 많은 목재의 산지로 땟목의 진용선은 이러한 점에는 정선만 일축하다 이를 놓치고 헛방만 찢는등,,
그리고 이러한 지류천에선 뗏목이 아니라 샛강에서는 보메기란 명칭의 냇물에 보를 막고 목재를 쌓았다가 장마물이 넘칠떼 막았던 보를 일시에 보를 헐어 떠내려 보내는 방법을 이용했는데 이러한 기록은 하지 못하고 있으며 뗏목이 가장 많이 필요햤던 점은 정선 탄광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과거 일제때부터 영월의 옥동탄광과 마차의 소리기차로 저 내리던 탄광에 합격품의 왕자나 축자의 도장이 찍히지 않는 도벌목을 야간에 돈이 그리운 옛 뽕쟁이들이 뗏목을 운반하여가다가 동강에 평창의 백룡동굴 아라 다섯개의 여울중 황새여울애 걸려서 뗏목이 파손되며 혼자서는 나오기 힘든 깊이의 여울에 흐트러진 등걸목으로 내리쳐서, 그도 때론 야간에 도벌목 운반중에 이름도 알수 없는 초자 뗏군들이 많이 죽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의 평창의 동강부분의 본인의 이야기에서 초보자들이 황새여울의 물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빠져죽는 이유도 본인은 적확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뗏목의 목재의 산판에선 여럿이 목도하여 운반하고 나르기에 이때는 아라리가 아닌 목도가를 오늘도 오대산 일원에선 채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정선 아라리가 미스한 이야기들 중에서 입니다, - 이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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