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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昌歷史 史觀定立

2019년을 돌아보며(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1)

1, 2019년을 돌아보며(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오늘은 2019년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사람들은 또 한 해의 종점에서는 좀 미묘한 감정을 가지듯이 본인도 일년을 회상해 보면 무엇하나 이룬게 없는 아쉬움만 남는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어렴풋한 기억속에 또, 일년을 헛소비한 기분만,,, 인간이란 속성은 지나고 뒤돌아보면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이 남듯이 한 해를 돌아보며 아쉬운 점을 토해보며 앞으로 갈 길은 어떤 길인가 예지해 보기로 합니다.

우선, 여기서 예전에 본인이 친구와의 대화를 한 토막 소개하면..

친구왈, 수학문제를 풀면 정답이 하나인데 향토사가란 어떠힌 기준도 없는데 평창의 향토사가님들은 각자의 이야기가 다르기에 누가 정답인지 알 수도 없으려니와 우리가 먹고 사는데 역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역사는 전부 정답인지 어느게 진짜 답인지 구분을 할 수 없는 것도 보편적 이야기인데 이는 물론 역사란 오류가 극심한 탓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래서 지금 평창의 역사 대부분은 잘못 조명하고 있는것이다.

 

 그럼 본인은 어떠할까??  본인 스스로는 평창의 향토사를 고증하고 기록하는 향토사가는 아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본인은 평창역사에  대부분의 역사에서 왜곡되고 변조된 역사가 정사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정정으로 옳바른 사관의 정립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러한 논지의 글을 무려 1~2백만자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인은 10여년전 임진왜란 당시 권두문 평창군수의 임란 일기인 "호구록'에 의해서 영월 고씨동굴의 역사이야기를 기고한 바 영월 문화원장님은 본인의 글을 세밀하게 분석 검토하여 역사글도 그 표현에 지적 소유권의 대상이 있기에 본인의 글을 보도자료등에 전문 그대로 인용하여 영월 고씨동굴의 역사를 밝히고서 지난해  8월 14일 고씨동굴 앞에 5m 높이의 임진 의병장비를 제막하였습니다.

 이에 본인의 13대 조 "고종경" 어른을 의병장으로 추모에 본인의 글 그대로 인용되었듯이 평창에서도 지금 당장 인지도도 없는 본인의 글이 큰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하여도 먼 후일 언젠가는 평창 역사의 올바른 역사를 찾아 가기엔 본인의 글을 돌아볼 것이란 점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본인의 글을 어떻게 해서 알리고 어떠한 식으로 보관해야 좋은가도 숙제이다. 본인의 평창 역사 글은 지금으로서는 본인의 블로그를 중심으로 여러 시중 사이트에 게제되어 있는데 일전 포털 사이트의 지각 변동에서 느낀 것은 사익을 추구하는 포털 사이트에서 과연 영구적일까 하는 회의적 생각과 「호구록」을 번역하신 권태하님의 블로그는 사후 3년에 어떠한 영문인지 블로그가 폐쇄되었듯이 이러한 점에서 글의 보존이 항구적이지 않을 것이에 올해는 최소한 두어 권의 책으로 출간할 생각입니다.

 

  본인의 역사글을 자비로 하여 책으로 엮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시시한 역사서가 먹고 사는데 무슨 대수냐 하며 등한시 하기에 책으로 출간하여 어쩌면 고물상 마당을 가득메울 사건은 아닐까 의구심도 듭니다만,, 본인이 논고한 평창 역사의 재 조명의 정립의 역사들은 개인의 사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평창역사의 줄기의 맥을 찾는 공적인 글로 이해하여야 하며, 먼 후일 1%의 사람들 손에 의해 역사는 재 조명될때 역사의 판도는 바뀌고 문화의 정체성은 올바른 역사를 찾아가기에 본인의 책은 참고적 문헌으로 자료적 가치를 가진다면 이를 공적기관등에서 문서 보존함에 비치할 수 있었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글들은 평창역사의 재 정립의 참고적 사료로 공공의 책으로서의 항구적 보존의 방법도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한 권의 역사책이 어떻게 사회 문화를 바꾸는가 의아해 하지만 석학 "E,H 카"는 역사란 과거가 현재와의 만남이라 하였습니다. 현재에 필요치 않다면 그 역사는 매장되고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전 평창의 어느 세미나를 주제어에  역사를 발굴하는 것을 콘텐츠라 하더만 그것은 언어의 의미적 어패이고 이러한 주제어에서 무엇을 얼마나 밝힐지 의구심도 듭니다만 역사를 밝혀서 정체성을 찾는다 하는 것은 옛 역사를 오늘에 살려 문화적 발전을 가하자는 여러 아이콘의 계발(啓發)이란 점이다.

 

  그러기에 옛 역사에 기인하여 현재의 정체성을 부여하며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문화발전을 기하자는 것이 콘텐츠화란 점을로 세계 어디에든 이러한 정체성을 부여받기에 우리 평창도 이러한 역사의 문화계발 아이콘으로 발전된 사회를 이루려는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는 변조되지 않고 퇴석된 점도 찾아내어 바르게 닦아 오늘의 잣대와 발전적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경주한 본인의 다수의 아마도 100여편의 평창 역사의 글에서 그 지향적인 콘텐츠를 계발 한다면 전국적인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는 역사도 서너 개쯤 있슬 수 있다.  

가령 평창이 이룩한 훌륭한 레져문화의 하나로 바위공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공원의 한계와 제반 문젯점을 이글의 제 2장에서 기고할 예정이며 또한 평창의 백일홍 축제에서도 이의 저변확대등의 앞으로의 발전방향에 대하여 이미 35p분량의 게시 글을 게제한바 있지만 2장에서 평창의 백일홍 축제의 다른 생각을 기고하여 백일홍 축제의 형 좌표를 점검해 보며 앞으로 더욱 알찬 레져문화로 가꾸기 위함이며  지난 각 개체의 역사의 게시글에서 평창의 역사속에 전국적 문화의 대상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게시 할 것입니다.

 

  그리고 평창의 일번지 노산성에 국행 성황사에 대해 국구사우 세미나 이후 현재 자행되는 이야기들은 역사 오류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이야기는 정확하고 정직한 증언의 사실, 진위 여부가 판단되어야 할진데 시중의 잡 역사 책들을 보고 그럴 것이다라는 개인의 극히 주간적인 편견의 생각으로 사설을 붙여 오류를 만들고 있는 점에 이야기들과 그런 오류들이 급기야 임진 노산전적비라는 허상의 비막을 제막하고 이제는 과거 임금을 대신하여 군수나 군수를 대신하던 제사장이 평창군민 모두에게 국태안민을 기원하는 제를 드리던 평창 일번지의 기상을 나타내던 국행성황사를 지금의 편리와 이 뜻을 모르는 무지때문에 노산 임진노성전적비 충의제당으로 명명되는 이야기들은 직시해 보시기 바라며, 평창아리링의 제 이론적 모습에 연구는 있었습니까?? 아니면 도마치골 산속에 잠든 김삿갓과 그의 아들 익균이 있다 하는 이야기에 참과 진위의 규명을 위한 실제적 노력은 있었습니까??

 

 평창문화원의 취지및 목적에 첫 항에 지방 향토사 발굴 운운하면서 그래서 조직표에 향토사 전문위원 명단이 열명이상 꼽히고 이러한 조직의 직제기구를 마련하여 군으로부터 예산을 받아 가는데 위에서 나열하는 평창의 전면적인 역사에 노력을 한점은 있었습니까??   이러한 부분을 2장에서 직설적으로 논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평창에 청동기 박물관 건립안에 누구도 찬동하지 못하는데  태백의 자연사 박물관이나 양구의 박물관, 아니면 워누의 역사박물관에 비해서 평창에선 어떤 역사를 가지는가?? 물론 오대산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원사 동종과 월정사 8각 9층 탑이 있다.

 

  이 두가지는 국보로서도 찬란한 문화유산인데 그 의미도 다음으로 미루며 평창 남부권의 청동기 박물관은  하리유적의 고조선식 청동검과 나란히 있던 고 인골,,이 부분이 왜 박물관으로 태어나야 하는가 지난 대여섯개의 글에서 쓰지 않앗던 이야기들과 미탄 기화리의 쌍굴에서 6만년전 석기시대인들이 살았고 그들이 먹은 코뿔니, 원숭이도 국내에 살았다는 잔해들,,, 이것이 연대 박물관 구석에 썩고 있는점도 게시한바 평창의 청동기 박물관의 구체적인 모습도 피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2018년에 전국문화원 연합회 논문 공모전에서 "수항리 탑의 원형을 찾아서"란 출품작은 특별상(국사편찬 위원장상)을 받았는데, 동일 공모전에 평창에서 출품한 "국구사우" 가 우수상을 수상 하였는데 그것은 우수상이란 전국 문화원장 상으로 다섯번째 상이다.

 

 그런데 평창문화원의 2019년 "평창문화"란 책에 맨 앞장에 우수상이란 타이틀 아래 "국구사우"에 관한 논문이 게제되고 본인의 "수항리 사지 탑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논문은 논문해제란 후기까지 70페이지의 부피로 수상 타이틀도 없이 책의 뒷부분에서 마치 책의 부피 땜방 작용하는듯 실었다.

 

 이러한 평창문화원의 형평성없는 처사와 또한 국구사우에 심혈을 기울이는지 평창문화란 책에서 같은 전국 문화원 연합회에 공모전에서 5등상이 맨  앞에 우수상이라고 논문을 실으며 본인의 특별상은 그보다 두 단계 위인데 수상작이란 타이틀도 없이 후미에 실었다. 이것이 본인에게는 올바르지 못한 눈감고 아옹거리는 차등적 대우란 점이다. 본인으로서는 심히 기분 나뿐것이  수상작이기에 싣겠다고 했으나 어디에도 논문 당선 수상작이란 말이 없이 국구사우 논문은 꼴찌를 했는데 책 맨 앞에 대서특필 하는가??? 이 부분에 형평성 문제에 평창문화원은 다음 책에서 정정하는 사과문을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평창문화원이 수상자의 인물적 차별을 하는 것이고 또한 평창의 국구사우에 대한 연구를 부각시키려는 모양새로 본인의 논문은 그 피해자가 된다. 그러기에  본인으로서는 글을 안 준것보다 더 손해란 점에 기분 좋을리는 없다. 앞으로 국구사우에 문제에 본인은 訴까지 당하는 자세한 내용으로 소상하게 직설할 것이다. 따라서 평창문화원은 대의적으로 범상치 못한 일을 자행하는 기관이란 점을 표현하며 이러한 개인적 표현은 그것이 피해에 대한 과보상이란 사람의 심리이기 때문이다.

 

  국구사우의 터 위치를 본인이 지목하고 어쩧든 본인에겐 訴가 걸렸다. 또란 국구사우의 논문에 상대적으로 본인의 논문은 그 피해의 대상자가 되었다. 물론 訴에 대해서 겁먹을리야 없었고 조사관에 조사 내용까지 적시해야겠다.

경찰의 조사관과의 조사를 마치고 마지막 인사에서 조사관의 인사는 감사합니다란 일반적 인사가 아니라 존경스럽습니다라는 인사를 받으며 헤어졌다.

 

  그리고 그 논문은 2년째 출품되어 심사위원의 논란에 심시당시에 연락을 받고 본인의 블로그의 국구사우 글들은 비 공개처리하는등 노력도 하였건만 돌아오는 것은 동 책에서 보면 차등적인 멸시란 점으로 그래서 5등급째의 우수상이 되며 나의 논문집은 타이틀도 생략된채 책에 실어서 만드는 피해자가 되다니.. 귀신이 붙었는지 본인으로서는 국구사우에 대하여는 재수가 없기에 그간 국구사우에 관해 나에게 있었던 사실들을 상당히 적나라하게 표출할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 또 하나의 문제는 문화원에서 일년에 한 번 출간하는 "평창문화"란 책에  본인의 수상 논문을  원고를 달라 하였고, 원고료는 소정액이란다. 그냥 평창 발전을 위해 원고료야 희사하는 것도 안되고 우선은 결재가 되어야 하니 원고료를 받으라는데 금액은 삼십 오만원으로 70p에 페이지당 천백여 자로 나누면 200자 원고지 1장당 천원꼴이 된다.

 

  시중 삼류소설의 값이 200자 원고지 매당 최하가 2천원이고 천원짜리 원고료는 없는데 이러한 논문은 앞, 뒤가 논리적으로 맞아야 하는 연구적 보고서로 원고료로서는 일반적 소설의 원고료 금액과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산이 부족하다길래 그럼 평창을 위하는 것이라 희사할 수도 있겠지만 결재는 되어야 한다면서 소설급으로도 최하 금액의 절반정도를 결재 받았다. 물론 다른 분들도 동일하겠으며, 여기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문화원의 차 상급 기관인 평창군청은 부족한 에산으로 꾸려나가는 것인가?? 정부는 혈세를 받아놓고 군민들의 헌신을 받는 것으로 사업이 연명한다면 참으로 측은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고는 본인의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평창문화원은 일반적인 평창역사의 연구는 무엇을 했는지는 일반적으로 잘 알 수 없으며, 국구사우에 대해서는 세미나등 몇 년째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더 이상 역사적 소명이 어려운듯 하며 이렇게 목조의 국구사우를 복원하여도 추존 임금의 극구이기에 수 많은 국구사우중 그 인지도는 약할 것이란 점이다.

 

  국구사우에 조선시대 국구(왕의 장인)은 약 5~60명 정도로 한그 중에 한명회는 양대 왕의 장인으로 아마도 1급 국구의 대접을 받을지 모르겠으나 평창의 국구사우는 정확한 명칭부터 " 이성계 4대조 추존 목조의 국구사우"라는 것처럼 정확한 명칭부터 있어야 한다. 물론 평창의 국구사우가 다시금 세미나를 준비한다던가 하는데 좀 더 구체성을 가진 역사를 고찰해보았으면 좋을듯 하며 이러한 문제의 생각들도 2~3부에서 토로하며 마지막으로 평창의 전국적 모토의 역사문화론에 대한 이야기를 피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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