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의 임진란사중 논고 (무순) >
◆ 기천록과 호구록의 차이점 문제
기천록에서는 호구록보다 정확도는 떨어지나 자세한 점은 원주 강원감영에서 탈출시 설명으로 고종원, 종경 형재는 새벽에 포승줄을 이빨로 잡아뜯어 끊고 탈출을 하고자 하니 권군수도 포승줄을 풀어달라고 애원해서 풀어 주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상부의 명이지만 동생 종경을 사형시킨 당사자이지만 그 보다 탈출은 생사를 건 모험으로 탈출에 대한 사전 약속도 없이 포승줄을 물어뜯은 일에 종원 형제는 두 사람만이 빠져 나오려 했는데 권군수와 그의 아들의 포승줄도 풀어주자 (여기까지는 기천록) 이때 힘이 좋은 권군수 아들 주는 벽을 헐고 탈출하개 된다(호구록)
◆ 조선침략에 나선 왜구 4번대 구성원은??
일본군 4군(4번대)의 총대장 모리 야스나리(毛利吉成)는 도꾸가와 이에야스(풍신수길)의 가신으로 큐수지방 뷰젠국의 다이묘로 자신의 병력 2천명을 데리고 규수의 최남단 사스마현(현 가고시마)의 "시마즈 가문"의 군사 1만명의 총대장이 된다.
시마즈 가문은 센코쿠(전국시대) 말기 큐수의 다른 다이묘들을 거의 제압하여 큐수의 통일의 목전에 도요토미의 중재를 거부하자 토요토미는 20만의 대 병력을 보내 큐수를 정복합니다. 큐수는 싸우기 전에 항복하고, 토요토미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대신 사스마번을 보장받게 된다. 이러한 관계로 도요토미의 가신인 모리 요시나라가 4군 총대장으로 지휘하는 것이다.
일본 최 남단 가고시마지방에 싸스마 번에 씨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1만군대와 그 주변에 아키즈키 다네나가(추월총장)와 이토 스케다키(이동우병), 시마스 타다토요등이 각 1천명의 병사를 대동하여 4번대를 구성하였다.
(모든 일본인 이름은 고유명사인 관계로 일어로 한문의 일어는 통용도고 부르는 것은 한글로는 안되고 일어로 불러야 한다. 毛利吉成(모리길성)은 한문 모리길성은 일본어로 발음해야지 한글의 모리길성은 아닌 것이다)
백봉령을 넘어 정선, 평창, 영월, 원주 강원감영으로 간 부대는 정원대는 모리길성과 이등우병 (이토 스케다카) 2,500명이라 하는데 이는 오류로서 아마 유재춘 교수도 2,500명이라 하는것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필자가 전해들은 이야기 하나에... 유재춘 교수가 일전 대화 서울농대 연구소에서 행한 평창의 임란사 강의에서 후세백작의 블로그에서 노산성에 임진왜란 전투는 없었으며 그 분석에 그 시간에 응암굴에 있었으며, 평창의 모든 장수는 응암굴에 있었다 하는 비교 분석의 글까지도 보신 모양으로 평창 사람중에 후세백작은 역사에 속지않는 사람으로 칭찬을 하신 것엔 감사합니다만 아마 2,500명이 평창을 쓸고갔다는 것은 맞지 않는점이란 이해입니다.
엄기종님은 6천, 동 강원임진란 책에서는 4천, 본인의 블로그에서는 아마도 4천이란 영원산성 아군이 3천이기에 그보다 더 많치 않았는가 하는데...
모리 야스나리는 4번대 총대장이고 그 휘하는 모리 가스노부를 대장으로 하는 모리부대의 병력 2천명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1만명, 중소 다이묘인 이토 스케타카(伊藤祐兵)이나 아키즈키 다네나가(秋月種長)등이 일천명 그 외 다카하시 모토타네(高橋元種) 시마즈 다다토요(島津忠豊)등의 다이묘들로 등 천명의 군사를 데리고 아니면 7~8백명의 군사를 데리고 온 다이묘들 함경도에서 아키즈키 다네나가(秋月種長)깅원도로 내려올 때에본국의 토요토미로부터 명령을 받아 모리부대 2천과 추월종장의 일천명 합 3천의 군사로 하여금 강원감영을 치라고 명령을 받는다.
만약 모리 가스노부 부대와 아키즈키 다네나가(秋月種長)의 일천명의 3천명 이외에도 군소 다이묘가 따라 붙었다면 3,700명이나 4천명으로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정원대의 인문지리 책에서 모리부대 2천명과 이등우병의 부대 500이라야 한다. 이 부분은 위의 논고애서 보면 맞지않은 것이고 또한 정원대의 인문지리에서는 모리 부대와 이동우병이라 했건만 그건 두 사람의 격이 않 맞고 또한 이등우병이 아니라 추월종장이다. 이로서 인문지리의 2,500명 설은 맞지 않으며 이등우병이란 설도 맞지 않으며 또한 동책에서는 이등우병을 이동우병이라고 기술한바 오자까지 연속 범하고 있다. 하지만 동 책은 무수히 많이 오자를 교정하였기에 오자가 아니라 잘못 서술처럼 느껴진다.
◆ 임란은 정명가도가 아니란 점이다.
임진란은 속설에 정명가도 즉 명나라 정벌을 정복을 위한 점으로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임란이란 당시 일본사에서 불거지는 일본 내부의 사정은 크리스쳔들의 충만, 팽배현상에 일본은 임란 50년전부터 포루투칼에서 화약 조총을 사들였다. 일본 돈이 교역이 될 수 없게되자 쪽바리들은 동네 처녀 잡아다가 유럽의 노예로 보낸 것이다. 그도 다년간 50만명의 처녀가 유럽의 노예가 되었다. 하지만 포루트칼은 화약 장사도 이제 이도 한계에 머물고 다 수익이 발행치 않게되자 포루트칼이나 네덜란드등,, 교역국들은 한국을 치라고 일본을 종용하게 된다.
이렇게 쳐들어오는 조선 침공은 우리로서는 임진 왜란이라 하는데 이는 세게사적으로 볼 때 페르시아 전쟁이나 청일 전쟁처럼 조, 일전쟁이나 아시아 전쟁등으로 우리로서 그 피해가치를 다른 개념으로 전환 해석하기 위해선 우물안 개구리로 머무르면 안될것이고 지금이라도 임진왜란을 다른 개념의 고유명사화 시켜야 한다.
◆ 4번대의 강원도 대회전의 무 목표란 점은
4번대의 강원도 대 회전에 대한 이해로 4번대는 3번대를 따라 추풍령에서 용인에서 서울을 경유하여 강원도로 들어오며 김화에서 춘천 조방장(지역 방위대장급) 원호의 목을 베 메달지만 4번대는 강원도배치에 큰 목적을 갖지 못한듯한 것은 함경도에 군인 모집차 올라간 순회세자와 임화군을 밥기에 2번대 가토 기요사마에 공격지원인 듯 철령위 회양까지 함경도를 올라가는중 다시 강원도로 유턴한 점은 아마 왕세자들은 현지인 국경인이 잡아 가토 기요사마에게 포로로 넘겼기에 왕세자 잡는데 목적이 무의미해져서 다시 강원도로 내려오며 島津義弘의 부대는 춘천으로 쳐 들어가고 毛利吉成의 부대는 강릉을 지나 두타산성 전투를 치르고 울진까지 내려가다 秋月種長 은 본국의 토요토미의 명을 받고 毛利吉成의 부대와 함께 3천명은 깅원감영을 접수하려고 백봉령을 넘어 정선, 평창을 지나 영월에서 원주를 가기엔 주천길이 빠르지만 복병을 만날까봐 두려워 제천입구의 장곡에서 주천, 신림길로 원주로 쳐들어간다.
이러한 과정중에 정선 군수 정사읍은 넙죽 항복하지만 평창군수는 왜의 항복 문서를 들고온자의 목을 베고 항전의 기치를 높인다. 본인은 이것은 군수 권두문은 목민관으로서 군의 신하로 죽음을 무릎쓰고 임금의 명에 거역치 않고, 또한 지역민들의 뜻에따라 군관민이 혼연일치의 항전하는 모습은 평창 제일의 기상이라 표현하고 있다.
권두문은 평창군수로서 부임한바 당시 영월군수는 어머니 상에 시묘살이에 들어가게되어 영월군수는 공석이 되자 강원도백은 평창군수로 하여금 영월군도 겸임하라고 한 것으로 사료된다.
◆ 권두문 군수의 호구록에서 중요한 사료는??
임진왜란은 정명가도 즉 명나라를 치기위해 도로를 빌려달라는 의미로 이해하기엔 좀 곤혹스러운 점이 만타.
물론 부산에 들어온 고니시 유키가와(小西行長)는 부산전투에서 승리하고서는 싸우든가 아니면 길을 비켜달라고 큰 글씨를 써서 걸었다 하지만 4번대장 모리 야스나리는 원주로 진입하면서 당시 포로로 끌려가던 권두문 평창군수에게 나는 토요토미로부터 강원감사 자리를 시드 배정받고 왔다 한다. 이것은 왜군의 조선침입이 정명가도란 사실에 대조되는 이야기로 구체성을 가지는 증언이란 점이다. 이 사실이 부각되고 알려져야 하는 점이 호구록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는 점일 것이다.
물론 4번대의 강원도 대 회전을 추론해보면 함경도로 간 왕 세자 체포에 지원으로 함경돌 오르다 이미 왕세자들이 체포되어 철령 넘어 안변에서 유턴해 동해안으로 내려오며 양양, 강릉등지의 약한 저항을 받고 삼화사의 두타산성 전투도 제압하며 울진으로 남하한다. 아마도 경상도일대에는 의병장들의 저향이 세어서 이곳에 지원차 가다가 본국의 도요토미의 명에 의해 일부는 다시 강원도로 유턴하여 백봉령을 넘어 원주 강원감영을 접수하러 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도요토미는 명나라를 치려고 19만 대군을 출정시키지만 임진왜란사 전체를 놓고 볼 때 130여회의 전투에서 조선이 60%의 승률로 이기듯이조선에서 저항을 가지지 못하고 시일이 걸리자 작전을 변경하여 이때 모리 요시나리를 강원감사 자리로 내정했슬듯도 하기에 모리는 포로로 집혀가는 권 군수에게 강원감사 내정이란 이 소식을 자랑처럼 발설한 듯 하다.
◆ 『조선징벌사』라는 책에 대하여..
임진왜란은 우리나라엔 역사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임진란사의 상하 두권의 1,400쪽의 책에서도 강원도 임란사는 찾아볼 수 없다.
위에서 잠시 필하였듯이 임진왜란이란 우리의 국내적 역사이고 세계사적으로는 아마도 조, 일 전쟁이라 해야 할듯하며, 그러기에 우리는 일본에서 서술하는 임진란사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조선징벌사』라는 책은 원 제목은 아니다. 이 책을 잠시 소개하면 예전에 본 책중에 부산의 화가가 사명당을 따라 임란의 종전 협상차 일본에 건너간 여러 사무관들중에 동래태생의 화가가 있었다. 그는 우리 미술사에는 알려지지 않는 인물이지만 일본서 솔나무아레 말을 그리는등, 일본사람들은 말을 존중하기에 이러한 그림들이 존경되고 유명화가로 그의 그림들은 여러 사찰에 모셔져 있다 한다. 그러며 작가는 우리나라엔 임란 역사의 책이 너무도 없기에 일본책인 『조선징벌사』를 참고한다고 서술하고 있었다.
『조선징벌사』라는 책이 번역 출간된 것도 아니며 제목은 그 소설의 작가가 임의적으로 붙인 것이다. 그래서 일어 원 제목도 모르지만 동 책은 우리나라에는 번역될 수 없는 책일테지만 영어로 번역되어 소련 사람들이 많이 읽었다 하는바 일전 아마존에 여러 영어로 번역하여 동 책을 검색하였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책들은 한국적 이미지를 저해하지만 당시 일본은 개화되고 포루투갈과 네덜란드 등과 통상을 하며 서양문화를 습득하기에 임진왜란시 일본군의 주 이동경로등 정확한 역사 서술이 있었슬 것이란 생각이며, 본국으로 돌아간 고니시 유키가와(小西行長)는 재판에 회부되어 서른 다섯 나이에 사형당한바 이러한 재판에서도 기록의 합리성이 있었슬 듯 하기에 우리는 상대방인 일본의 임진왜란사 서술에서도 정확한 역사를 유추해 볼 수도 있다는 점에 앞으로 넓은 이해로 이러한 연구 고찰을 통하여 평창 전사를 이해 할 수도 있슬 것이란 점이다.
적의 자료를 참고하여보다 이해력있는 역사를 추구함에 이 문제에 아직 풀리지 않는 예시 하나로 응암굴 전투에 권 군수의 후실부인 강소사(추증 강절부)는 서른 한 살의 꽃다운 나이에 왜군에 대하여 절개를 지키고자 응암굴의 천인 절벽에서 푸른 강물로 투신하여 자결하자 왜장은 조선에 이러한 인품있는 인물에 감탄하고 전투를 중지하고 시신을 건져서 화장을 하고 (우리는 매장 문화이지만 일본은 화장후 매장 풍습이다) 매장을 하고 제를 지내는 예를 갖추었다 전한다.
毛利吉成의 부대는 강소사의 투신에 전투를 중단하고 시신을 건져서 장례를 치러주는 예의는 세계 전사에 보기드문 예의로 볼수 있는데. 호구록에서는 본대와 같이 포로가 되어 잡혀가며 기록으로 원주 신림에 들어서자 선발대가 지나간 듯 주민들의 목을 베에 장대에 메달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응암굴에서 강소사에 대한 에의와 비교하여 신림에서 모습은 독같이 모리 야스나리의 부대가 한 소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 먼져간 선발대는 본국의 토요토미로부터 명령을 받은 아키즈키 다네나가(秋月種長)으 부대였슬 수 있다.
후일 4번대는 정유재란에서 전라도 지방에서 코와 귀를 베어 토요토미에게 충성심을 보이는 잔인성을 가진 부대이다. 이들은 모리 직게의 병격 2천이 아닌 가고시마 지역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1만명을 비롯하여 중, 소 다이묘들의 부대들이 잔인성을 드러내고 있는바 원 종족이 그러한 성격인지 아니면 일본 최남단의 변방 가고시마 지역의 시마스 번주등이 토요토미에게 불화되자 도툐토미는 20만 대군을 보내 시마스 번주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기에 이러한 잔인성으로 확실한 충성심을 보이자 함인지 알 수는 없다.
이제 평창을 쳐들어온 왜군은 과연 몇 명일까 좀더 분석적 방법으로 추론 합니다.
모리 야스나리의부대와 秋月種長의 두 부대만 백봉령을 넘어 원주 감영으로 갔다면 이는 3천명의 병력으로 이중 선발대처엄 보이는 秋月種長의 부대 천명은 미탄에서 율치, 마차로 빠져 영월로 들어가고 모리 부대보다 먼져 신림을 통과하며 잔악성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호구록에서 권두문 군수가 포로로 이송되며 영월에 들어갔슬때의 기록 분위기는 이미 사전 부대가 주둔햇던 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3천명중 秋月種長의 부대 천명이란 이야기가 성립되기에 평창을 들어온 왜구는 이들은 제외한 모리 야스나리의 직부대 2천명이거나 아니면 모리 야스나리는 4번대 총대장이기에 아직 갈라지지 않은 중소 다이묘가 따라 붙였다면 4천명이나 6천명도 될 수 있다고 보이는 바 호구록에서 권 군수는 응암굴에 피신 다음날 발각되고 3일째 체포되어 유동의 왜구들의 집결지에 하루 지내고 다음날엔 평창 관아로 이송된 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왜구는 산을 넘기에 한줄 종대로 이동하가에 많은 시간이 걸린 듯 4일간에 도착하였다 한다. 과연 2천명의 모리부대만 평창진입을 했슬까??
권 군수는 관아로 끌려와서 표현에는 왜구의 깃발이 약 30여개정도쯤의 느낌이 가게 많다 하였으며 왜장들은 동상방에 1~20명 모였다하였다. 만약 중대장급이라도 2천, 2천5백명앤 많은 수치는 아닌가,, 이러한 문제를 우리는 전부 파악하지도 못하며 자기 마음대로 떠들면 그건 역사학자의 소리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임란 평창전사는 일본의 책도 훑어보아 왜구들의 이동경로나 새로운 문제도 파악해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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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줄로 하룻만에 초고를 마치며 후일 다시 탈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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