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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꼬리를 잡아보며...

[ 3,1 운동이란,,, 숭고한 학생,시민 혁명이다 ]

 

( 이 글은 몇년전 특정종교에서 3,1운동이 손병희 선생의뜻으로 성역화 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3,1운동의 실체를 쓴 것입니다.

민족대표 33인이 3,1운동의 시발을  탑골공원에서 학생과 시민과 같이 했더라면...유림과 카톨릭의 세(勢)지원을 더 받았더라면 하는 아쉬움과.33인이 태화관에서 만세 삼창후 짜장 한그릇 먹고 주인 안사장을 시켜 일본 순사놈들에게 만세를 불렀다고 연락을 취하고 일경 순사가 인력거를 보내니 타고오라니 안타고 가겠다고 택시를 가져오라는..

 

그렇지만 이 33인은 약 3년씩의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손병희 선생은 1년만에 탈옥하었으나 지병의 악화를 가져오고 ,,33인 모두들 3년의 옥고 이후에고 힘든 투쟁을,,,

오늘 3,1절을 맞아 저의 블로그 하단의 이글을 다시 리바이벌하여 3 ,1운동은 진정 학생운동이란 점을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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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이란,,, 숭고한 학생,시민 혁명이다 ]

       

 후세백작       09.03.01 10:49

 

                                                                                                     

만물이 소생하는 춘 삼월의 봄이 왔다.    

90년전의 봄은 일제 강점기 하에서 윌슨의 자결주의에, 세계는 마치 신기운이 도래하는듯. 인류사의 기운에 편승한 삼천리 동포들은 거리로 나아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아 ! 아! 대한 독립만세 !!!

이것은 영국의 권리청원<권리헌장>이나, 프랑스 대혁명보다도 더욱 숭고한 祖國愛의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의 국권을 회복 하고자한 시민 자발의 대혁명인 것이다.

 

어느 컴에 보니 3,1운동 90주년을 맞아 대종교와 교수 몇분이 모여 3,1운동은 세계기류에 편류가 아닌 민족대표 손병희 선생의 스스로 자주적 생각의 발로이기 때문 더욱 숭고히 하여야 한다는 세미나를 3,1절에 개최 한다기에 이에 대항하여 곧바로 나의 의견을 정리하여 본다.

 

우선 3,1운동의 발단은 대종교 1대에 동학으로부터 이어온 자주정신이 암울한 강점기에 대종3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과 최린, 오세창, 최남선이 모여 일제강점에 자주적 독립을 건의 하자

제안하기에 이르렀고, 최의 소개로 만해선생은 손병희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만해선생은 이 의견에 적극동조하여 각계각층에 섭외하여 3,1운동의 거사를 준하는 집행처하였다. 만해 선생은 이런 대사의 독립운동을 조직화 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호응을 가장 널리 불러 일 있는 종교단체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기독교측의 이상재 선생과 大事를 논의하게 었다.

 

여기서 월남선생은 독립선언서를 하지말고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내고 무저항운동을 는것이 유리하다는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만해 선생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요, 타력에 의한 독립이 아닌 민족 스스로 결사적 행동으로 나가지 않으면 않될 것이라 하여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월남의 의견을 호응하는 기독교 인사들이 많이 참가하지 않게되자 월남 선생은 죽음을 초월한 용맹이 극히 귀하다고 한탄하였다.

 

이때 서명서에 기명날인이 이 부분이 잘되었으면 33인이 아니라 100명이 넘었으리란 예측이 무산되었다. 그리고 그 공작기간 동안 만해선생은 참정대신까지의 한규설, 박영효등 차례로 접촉하였으나 는 회피하고 적극적 언질을 하지 않았다.

이에 만해는 양반과 귀족은 모두 개인주의요, 국가와 민족을 도외시 한다고 “ 참 죽기 힘든게로군”하고 또 한번 한탄하였다.

 

그리고 만해선생은 다시 손병희에게 3,1운동에 천도교가 적극 호응해 주기를 부탁하니 손병희생은 월이상재가 찬성하더냐고 물었다.

이에 만해는 “이상재 선생은 반대하셨는데 손 선생은 이상재 선생 뜻에만 따르렵니까??” 이미 대사는 모의되었는데 만일 호응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다.“ 행사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어조에 놀란 의암 선생은 자기를 총대표로 써달라는 조건으로 강한 용기의 힘을 나타내며 33인의 대표로 서명하였다. 이리하여 의암의 승낙으로 그를 따르는 천도교 여러 인사들이 가담하게 되었다.

 

또한 만해 선생은 3,1 독립운동 계획엔 독립선언 서명자 중에는 儒林출신 인사는 없음을 개탄했다. 서울에는 유림 지도자들이 거의 일본에 기울어져, 만해 선생은 경남 거창의 대 유학자 면우 곽종석 선생을 아가 세계정세를 알리고 그 자리에서 쾌히 승낙을 얻었으나 거사당일 환으로 눞게되자 그의 아들에게 을 주어 대신 참석한 것이다.

 

또한, 민영위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협조해 달라는 요구에 거절하니, 만해선생은 권총을 끄집어 내니 영환 선생은 새파랗게 질려서 요구에 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장난감 권총이었다. 선생은 이렇듯 비장한 각오로 독립운동의 산파역을 하였고,  민영환은 비밀리에 협조 하겠소, 자금도 주겠소, 다만 내 아들과 연락하길 바라는 입장이었다.

 

또한 기독교 계통은 두 갈래로 평안도 중심의 장로교에선 남강 이승훈 선생의 합류와 서울의  감리교에선 청년회 중심으로 학생 청년단의 박희도, 함태영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 청년단중 수원 교회의 전도사인 이필주옹은 33인의 한분으로 옥사하였는데,  평창에 있는 그의 외손들이 훈장 수여자가 되어 있다.--- 이 필주 옹이 이후에도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고, 만주까지 독립자금 심부름했던 외동녀로 현 100살쯤의 할머니도 독립 유공자이다.그 할머니는 나의 선배의 어머니로 3,1절 기념행사를 TV로 볼때 맨 앞 중앙에 앉아 계신 분이다>

 

   

 

 

또한, 독립선언서는 비폭력 자주적인 성격의 골자를 합의, 최남선선생이 3주에 걸쳐 원고를 집필하여 공3장은 만해 선생이 주석을 달았고 2, 28일날 2만1천장을 대종교 인쇄부에서 비밀리에 인쇄하여 10개 도시에 배분 배포 하고는 3,1일날 정오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려는 각본으로 33인 대표중 약 20명이 3,1절 전날밤 재동의 의암선생 집에서 최종검토를 하고, 3월 1일 오후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한 당초의 결정을 인사동의 술집인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학생과 민중이 많이 모일것으로 일제와 충돌이 있을까 염려때문이다.-- 이런 쯧---기왕 하는것 배포냐고는 새가슴처럼---

 

그런 결정후 의암선생은 태화관의 안 사장에게 전화로 내일 점심에 30명 자리를 예약 하였다. 이리하여 거족적인 3,1운동은 비밀리에 태화관에서 그 도화선의 독립선언을 하게 된다.예정대로 3,1일 정오 33인중 29인이 태화관에서 간단한 식사후 독립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독립선언서는 모두 보았으니 생략하고 만해의 사회로 간단히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 삼창과 축배하고는 정된 시간이 다가오자 최린이 태화관 주인을 다시 불러 일본 경찰에게 여기 지금 독립선언을 한다고 알리라 하였다. 일본 경찰이 인력거로 실어 간다니  다시 전화를 해서 택시를 가져오라 하여 그에 나누어 타고 일본 경찰서에 이른다.

 

오후가 되자 탑골 공원엔 시내 남 녀 중학생 4-5천명의 모여 있었다.  심지어 경성의전 학생들은 무슨 일이 있을까 전원 결석하고 모였던 것이다. 오후 2시 정각에 10년만에 태극기가 내 걸리며 모인 군중들은 감격과 흥분이 절정에 달 하였다.  디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역사적 식전에 이르렀다.

 

33인 민족대표가 불참하자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낭말미엔 만세함성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리곤 탑골 공원을 나와 시위 행진에 시작되었다.광화문쪽 마포쪽 미 대사관앞, 남산쪽 어느 방향이든 만세소리에 시민이든 농민이든 대한민국 국민은 가담을 하고 특히 3월 3일 고종의 국장에 전국에서 올라온 인파도 가담하였다. 마포와 연희 전문 앞에선 자정까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는 전국 방방 곡곡으로 퍼져 나갔고 만주, 블라디 보스톡, 미국등 한인이 있는 어느 사회에서든 만세 소리는 이어졌던 것이다

 

실로 이 3,1 운동은 민족의 민중의 학생의 -- 모든 대한민국인들의 마음의 자발적 행위의 시민혁명인 이다. 운동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단어로 수정되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프랑스의 시민혁명, 영국의 권리장전을 있게한 권리청원보다도 더 찬란한 자유의 표상이리라.

 

여기서 보면 독립 청원서로 일제에 호소한다면 마치 때 쓰는꼴이 될게 아니었슬런지??영국의 권리청원의 압력은 국왕에 대한 도전으로 권리 장전의 시민 혁명이 되었지만 일본이란 조직앞에 조금도 나아질게 없는 청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3,1 독립운동의 33인이 태화관에서 만세를 불렀는데 왜 일경에게 나 잡아가란듯 스스로 신고한단 말인가?? 주체가 누구인가?? 우리가 독립이라 하면 잡혀가도 독립이 아닌가?? 엘리트, 즉 귀족적 무저항운동이란 말인가??

 

 48년 러일 전쟁에 러시아는 일본에 선전포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 광복군도 선전 포고 하였다. 러,일전쟁과 광복군의 가담으로 러시아에 항복한 블라디 보스톡의 일본은 물러갔다. 그래서 우리 광복군전승국이 되었다. 이 얼마나 주체성있었던가??  물론 러시아가 광복군에게 너희는 국가가 없으니 전승국이 아니라고 승리의 기념물을 같이 나누지는 않았다.

( 물론 48년 8월 8일 선전포고로 일본을 누르고 일주일후 소련은 미국과 연합국이 되어 8,15 해방이 되니, 우리는 미국과 소련에 양분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렇다면 만일 10일 전쯤 일본이 항복하였다면 우린 천추의 한이 되는 양분으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허나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과 시민들의 노도같은 포효는 진정 우리 국가의 최대의 혁명이라 함이 옳은 것이다. 이 점이 오도되는 어느 학자들의 세미나가 오늘 있을 것인데 있기도 전에 나서는 그런것을 거부한다.

 

3,1 혁명은 진정 민족 자전과 자유를 향하는 민족의 혁명인 것이다.

친구덜아!!

긴 겨울이 지나고 신천지 기운이 도래하는 이봄. 무언가 새로움의 봄이 되길 바란다.

<이 글을 쓰게된 동기는 몇일전 어느 종교계에서 3,1 운동은 손병희 선생의 주도하에 종교적 운확산 조짐에 나의 생각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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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1운동이후 일본은 싸이토 총독이 부임하는데 강의규 의사의 거사가 빗나가고 <서울역에 올라오는 싸이토를 수류탄 투척> 이 싸이토는 일제 강점기 최대로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탄압을 하게된다.

또한 이 시기에 우리의 역사서 51종에 총 20만권을 압수하여 분서갱유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카프등의 문예사조 단속과 조선 총독부에 내선일체란 흐름도 이 탄압시기의 일인 것이다.

 

과연 봉평 문인들이 조금에 젊은 문인들을 불러놓고 토론한 것이 고작 이효석 선생이 이 내선일체에 동조 했느냐 하는 의문만 제기 하였다.이는 계단의 중간에서 원치 않는 흙탕물이 내려 온다고 바로 윗 계단만 탓하는 행위정도가 아닐까?? 또한 봉평은 척박한 메밀꽃 보단 더한 봉산서재와 판관대에 이이 선생의 비밀은 못 캐내는 것일까??

 

나는 봉평 무이리 청소년 수련원이 율곡수련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는 봉평인들이 주도적 계몽을 해야할 것으로, 이는  무엇때문인가 하는 이유는 다음에 <봉평과 이효석의 조명>이란글에 게제 하겠습니다.

 

나로서는 일전 뉴스의 일제 청산 과거사위의 그러한 영향의 시각은 옳치 않다고 생각 합니다.일제의 강점기 하에서란 일본이 강점하기 위한 사전 기간은 포함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또한 나 개인적으론 서재필과 독립협회, 을미왜변의 유길준 이들을 찬양하지 않습니다.이들은 정미조약 이전에 시행착오로 일본에 별미를 던져준 시대의 풍운아란 인물들이기 때문이고, 그들은 그곳의 명단에서 제외되는 것 입니까?? 아니면 일제 강점기 이전이라고 역적이 아닙니까??

 

유길준은 명성왕후 시해후 내무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이것은 민비시해에 재판등 범인에 대한 밑딱게 여론이다. 이 자는 참말 어처구니 없는 바보자식이죠??명성왕후 시해를 우리는 그져 단순하게만 알고 있지만 이 쪽발 새끼들은 완전 똥개라 훈돗시만 차고 다니도랑가에서,,, 나무아래서,,( 똥개란 표현은 지어미하고도 막 해대는...)당시 쪽바리 나브랑이 깡패들,,그냥 죽었슬까요?? 아니면 국력을 멈추게 한다는 논리로 20여명 깡패새끼들이,,,국모를 시해하고 국권을 유린한... 그런새끼들은 이건 친일 매국노 아닙니까??

 

그럼 언제 독립협회와 그 회장 이완용, 그 독립협회의 창설 주역의 서재필,,, 총무에 이승만등이 독립협회에엇을 했냐...  소상히 밝혀 보이겠습니다. 또한, 부제로 우리의 편견적인 이미지의 역사속에 이들의  역사적 기준점과 이완용의 매국이 무엇인가도 게하겠나이다.

 

지금 우리는 국모의 시해에 대하여 역사적 재판을 하지 않고있다.그러면서 친일파만 가린다나...

난  2년전 가을날 동창 몇명과 검단산을 내려오는데 새로 조성한 묘 3기를 스쳐 지나가는데 언 친구가 그 묘역에 다가가 비석을 보고 오더니 왈,,, 유길준의 묘에는 비석이 없고 그의 동생은 구한말 직책등 구구 절절하니 필히 좀 이상하단다...

왜 그럴까요??

동창녀들도 후세의 잘난 답을 하나 어쩌나 테스트 하기에 딱 맞은듯...

이 후세는 겁 먹을 것 하나없이 설명하였다.

 

유길준은 우리가 잘 아는 서유견문의 저자이고 개화사상이 가득찬 신 유학파이다.

그런대 특이한 사항은 민비 시해이후 일국의 국모를 시해한 잡배들을 모조리 엄단하여야 할 내무부장관에 앉았다. 물론 일본의 콧김이지만,,,

그래서 유길준은 매끄럽지 못하게 시해사건을 마감하고 범인들은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갔다.

그러한 꼭두각시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그가 뭐 잘났다고 칠성판 위에다가 무슨 개나발을...속들 시원한고 하고 물으니 역시 후세백작이야...

후세백작은 미완의 영의정이야... 다음세상에 영의정이라도 한 자리 하시게...

............................................................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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