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있는 피라미드는??
글쓴이: 후세백작 07.07.09 11:38
위의 사진은 일전 어느 TV에 소개된 가람토 문자이다.이것이 한글의 원조랄까----그리고 역사에선 알파벳의 기원을 나일강에서 찾는데 이 가람토 문자가 인류시원을 엎을수도---왜냐면 이짚트 인들은 전형적인 스메르 인이고 인도 모헨조다로 문화도 스메르 인이다. 그러나 영국앵글로 색슨족은 아리아 인이다. 우리의 조상은 스메르 인이었지만 이후 아리아인이 혼합하여 재정일치의 임금이 통치하는 고조선을 창춣한지도 모르는 일이다.
역사에서 스메르 인은 일찍 이동하였고 이후 기후변동등의 이상으로 아리아인은 정착지를 버리고 후발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논지는 검색창에 <순환법칙>을 검색한면 영어와 한글이 합하면 고어의 이해를 알수있는 논제가 나온다.이 <순환법칙>의 가설속에 또하나 특이한것은 어떤 외계인도 지구에 올 수 없다는 논리이다.그것은 우주공간에 고온의 플라즈마도 있지만 암흑물질의 속에선 절대온도 1k 온도라면 모든 물체의 분자는 결합이 안되어 우주공간을 마음대로 다닐수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위 사진은 장안 일대의 피라밋이고 아래에선 항공촬영및, 60년대 미 공군이 촬영한것 또 3일동안 발굴조사시 한글과 신라 금관형이 나온 자료들이 있다 --- 다음 아래의 레포트를 보도록 하자.
위 피라밋은 이집트 피라밋 높이의 두배 300m이다 --- 이곳서 멀지 안은 곳에 소련학자들이 고조선의 거주지 발굴들이 한창이다 (중국학자들이 산이라 우기니 쏘련 학자들이 물증까지 집어 올렸다, 그리고 사라예보의 보스니아의 피라밋이 3개 있는데 흙을 긁으니 돌을 쌓은게 나왔는데 처음부터 위장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유로 피라밋을 동네 농부들도 산으로만 알았다나. 서안(시안)의 피라밋(엣날의 장안을 중국이 시안으로 개명)
시안은 옛날의 장안으로 고대 중국의 수많은 제후들이 성도로 삼았던 곳으로 우리의 관광안내 책자엔 남대문을 국보 1호로 이야기 하지만 중국 관광홍보책엔 시안이 제일 먼저이다.컴을 통해 구글위성지도에 검색란에 시안을 치고 시안반경10Km쯤으로 보면 사각뿔의 무수히 많은 피라밋의 사진을 직접 볼 수 있다.
위 ; 항공촬영의 피라및 --- 스퀘어(4각)에 들여쌓기가 선명하다
( 함양의 피라밋)
인터넷 구글 어스에서 서안(시안 또는 장안)을 검색하면 서안 지도의 위 쪽 우측 하 또는 좌측 비행장 부근에서 이와 같은 평면도의 피라밋 사진을 입체로도 검색할 수 있습니다. 이 피라밋은 돌을 깎은것이 아니라 1~2m 흙 벽돌로 조적하였으며 높은 것은 300m급이 3개 있다 합니다.
이집트 피라밋은 150m인데.. 중국 뗴넘들 핑신같은게 이 피라밋들을 오픈하면 만리장성보다 더한 관광이 되는데...피라밋이 동이족이고 고조선이라면 존심에 문제로 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서 동이족은 중국 짱게들을 만나면 무자비하게 내려쳐 죽였다고 기록하는것은 분서 갱유라도 해야 될게 아니오. 왜냐면 그것은 동이족은 먼저 청동기 문명을 가지고 검을 만들었는데 짱게의 한족은 몽둥이로 될 바다 아니었지...이께 빵꾸나는 애기 아니오??
함양의 피라밋 군들,
농부의 밭 뒤편에 산이 아니라 피라밋이 보인다. 진시황제의 능도 70m라는데....중국의 피라밋은 이짚트의 피라밋처럼 돌을 깍고 다듬은게 아니라 진흙으로 1헤배정도의 벽돌을 만들어 쌓아 올리는 수법이다. 그러면 우리가 잘 알고있는 장군총도 이런 피라밋의 하나이지만 장군총은 돌을 다듬어 쌓아 올렸다.약 280평의 면적에 돌 하나가 10톤 정도 되는것을 40여리 밖의 채석장에서 1,100개 정도 끌고와 쌓아 올렸다.왜 장군총만 힘들게 돌로 만드는 특색을 가졌슬까??
아마 그곳 땅의 흙이 점착력이 부족하다던가 아니면 영토확장의 고구려의 기상을 표출하며 이를 영구히 보존하고픈 이유로 단단한 돌을 재료로 선택하였슬까??이에 동원된 인력은 포로등 전리품이고 아예 아예 고구려 왕족의 묘를 가꾸는 평생 묘직이 포로들도 있었다 한다.
( 보스니아의 피라밋 3개 중 복원도)
( 실제 보스니아 피라밋인데 산의 흙을 파고 그 안에 계단식 돌을 발견---- 흙이 산처럼 덮여져 있음
1950년 미군 조종사가 하늘에서 본 피라밋의 사진과 현재 구글로 검색한 동일 피라밋. 이 조종사의 사진으로 중국 피라밋이 외부에 알려지지만 아직도 중국은 통제를 하고있다. 만리장성을 관광상품으로 팔아먹지만 실상 만리장성은보다 이 피라밋들을 오픈하면 관광수입도 더 짭찔할텐데..이 피라밋은 이짚트 피라밋만큼 관광수입을 올릴 수도 있슬텐데... 중국은 짱구가 아닐텐데...사실 만리장성은 한족이 쌓은 것보다 청나라가 쌓은게 더 많고,,,한족이 자랑할만한 것은 별로 없는 것이다. ( 당시의 가람토 문자 유물 ) 고조선의 시작은 BC 2,333 이니, 이 문자는 고조선 중기쯤인 고조선 483년 이후의 유물.
위...가람토 문자는 세종대왕의 한글의 모체임에 분명하다. 세종대왕깨서는 한글 창제에 이 가람토 문자를 차입한 것임에 분명하다그러나 이러한 고조선의 역사책은 현존하지 못한다.아마 일제말기에 우리와 일본의 합병을 위해 우리의 젋은이들에게 희망을 없애고져 우리의 상고역사인 고조선의 역사를 분서갱유한 것이다. 그래서 고조선이란 단어는 하나도 없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현존 최고의 역사서가 되는 것이다,
아래--- 60년대 중국 정부가 피라밋 발굴조사시 한글의 모체인 기림토 (가람토)문자와 신라풍의 장신구들이 출토중 마치 외계인 분위기 같았다는데, 이 지구상에 300기의 피라밋이 외계인이라면 우리의 먼 조상은 외계인이란 말인가 ----- 외계인은 지구의 중력을 알기전엔 지구를 들어오지 못한다----중력에 의한 탈출속도값(임계속도)를 알아야 하기때문. 이렇듯 각 행성의 조건 값을 알고 대처해야 드나들 수 있는데.,,,쯔 쯔 그럼 뭣땜시랑 외게인이란 표현을 썼슬까?? 아마도 투구등 녹슨 청동제들의 제품을 본 느낌의 감정들일것 아닐까??
처음엔 미군 수송기 비행사가 항공촬영했는데 --- 중국정부는 이를 함구하고 ,,그림의 휜 원내가 피라밋들이다. 중국이 피라밋 발굴을 다시 게재한다면 ----- 배달국과 고조선의 문화이리라.
여기서
외계인 같은 모습이란 사기에서도 나오는 말과 같다.이 시대에 청동기 문화를 이룩했고 중국의 최초의 국가 夏나라는 단군보다 150년 후에 세워졌고 그들은 BC2,000년 경의 진시황이 이전의 한족의 모든 역사를 분서갱유 한점으로 미뤄 볼때 그들은 청동기 문화를 우리보다 오랜 후에 이뤘슬 것이다. 위 레포트의 조사단장이 3일만 보고도 고조선 피라밋이라 단정함이 중요한 것이다. 아래의 사진은 오끼나와 해저 유적이다.일본 해저 거석문화엔 (오끼나와 해저 유적을 처음엔 바다아래에 큰 바위가 평면을 이루고 끝이 직각으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이 운동장같은 바위를 인공이니 자연적인 것이라는 등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그때 이짚트 피라밋 연구로 유명세를 탄 컬럼비아대 지질학 박사가 수중 잠수로 현장 답사를 하고 이 너럭바위 끝의 직각으로 떨어지는일직선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즉 해저 유속에 의해 바위끝이 직각으로 된다며, 그래서 이는 거석문화가 아니라 자연으로 생기는 바위현상이라고 일축하였다.
그 후 지오그라픽 사진사 수명이 해저사진을 찍기위해 수중 촬영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멀리 떨어져 잠수를 하는데 아래의 두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다.마치 일차대전 발발의 원인은 페르디난드 대공 부처의 암살에서 비롯되는데 사라예보 방문 퍼레이드에 A도로에 권총을 든 저격수 40명이 있었다. 그런대 이 퍼레이드 차량은 수많은 인파에 B도로로 접어 들었던 것이다. 그때 탕, 탕하고 페르니난드 대공 부처는 권총을 맞았다, 멍청한 저격수 한명은 A도로라는 것을 듣지도 못하고 인파속에 B도로에 잇다가 코 앞을 지나가기에 쉽게 저격하여 이것이 1차대전 발발의 도화선이 된다.이렇듯 원인과 문제 해결은 귀결이 않 되는 부분에서 찾을 수도 있다.
뭐,,, 굉부 잘 한다고 돈 많이 버는건 아니지...돈이 인생의 전부를 대변하지는 않지만... 또,또 삼천포행인데...칭구들 까페에,,,논문형식을 탈피하는것도,,우리 핵교시절 수업시간에 선상님이 수업만 하디...잡담을 더 많이들 하쟌나....
본론으로 돌아가면 그래서 미국의 지질학 박사는 큰 오류를 범하였다.박사에게 가장 모자라는 부분은 거만한 자세이다. 즉 역사의 단정이다. 역사는 추론은 좋치만 감정이 아닌 객관화 기록자체로만 성립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후 어느 일본학자는 아마 오끼나와의 이 거석문화는 대륙과 붙어있던 ,,연대로 8천년전쯤이고 주장하였다. 8천년 전이라면 BC 6,000년 전이란 말씀이신데 이는 이짚 피라밋이 BC2,500년 전이고 모헨조다로 문화도 BC 3,000년을 넘지 못하는데 이 오끼나와 해저문화는 역사시대 이전의 선사시대 문화이란다.
이집트 피라밋은 당시 철기시대가 아니라 청동기 시대에 임호메트는 구리로 정을 만들어 돌을 쬣다 하는데, 글쎄 오끼나와 해저유적의 조각은 청동기 훨씬 이전시대라 나무로 쩡을 만들어 바위를 다듬었슬까??
나는 조각을 전공했다.아래의 두상은 한눈에 북방계열의 스키타이 문화임을 알 수 있다.따라서 그 옛날엔 오끼나와가 대륙이었고 지금의 난류가 아닌 한류의 바다였다는 가설이 성립될 수도 있다.
스키타이 문화의 조각에서 특징은 눈을 파내고 그림자로 눈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남방걔열의 문화에서 눈은 제주도 돌 하루방처럼 퉁방울로 눈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고대엔 이곳이 난류가 아닌 북방의 한류의 바다였지만 이후 제주도 돌 하루방은 난류의 바닷물을 타고 올라온 문화인 것이다.
이상 중국의 수백개의 피라미드를 언제까지 봉쇄할 것이가?? 언젠가라도 역사의 세월앞에선 그 문이 열리고 찬란했던 고조선과 배달국의 역사를 다시 보이리라.
위 서안의 피라밋은 구글어스를 통하여 서안 주변에서 많은 피라밋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구글어스는 위에서 내려보는 평면도이기에 피라밋은 사각형안에 엑스로 음영차이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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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 죄고의 역사서 규원사화 정본에 북애노인이 역사서를 쓸때----과거시험에 세번 낙방하고 북쪽 탐방에 나셨다가 아내의 죽음을 받고 돌아와 서원을 짓고 세상살이에 실패한 노인네가 책상에 앉아서, 명예와 부귀는 그것이 다하였을때 빈 것이되고 나의 현실이 이토록 비참하고 암담해도 이 천지의 운행과 땅과 하늘 사이의 구만리엔 바람뿐인데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서문에 인간적 고뇌의 진실성을 보도록 하자. 뚜여사,,, 내가 왕년의 " 똥자루"역사선생 보다 더 났지 않은가??
평창중고 22,25 동창회 高柱浩
앞으로 어린구슬의 부탁대로 광개토 태왕의 글을 쓰련다.
우리의 찬란한 역사와 우리 선조의 우렁찬 기상의 메아리를 보도록 하자.이 글을 쓰자면 배달국가와 고조선이 필요하리라. 이 고조선이 세계 문명 발상의 기둥 이니라.그리고 문자가 생겨난 역사는 4,000년 전이지만 우리의 역사는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선사의 (문자가 없는시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 고조선의 위치를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가 아닌가 쏘련 학자들의 의견에 물증까지 있다한다. 중국넘들 동북공정 어디로 갔는가?
동북공정 더 해보면 고조선의 실체와 물증이 생겨난다.이미 중국이 기자조선이니 위만의 성역화를 추진하는데--그렇다면 그들의 역사에 상응하는 고조선도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역사는 있으나 아직 물증이 미약한 단군 조선의 역사적 사실들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 동북공정이 주춤거리는 것인가?? 그리고 지난 겨울 이 카페에 내가 피라밋과 장군총 잉카의 유적의 스퀘어가(네모형)이 동일 의미인가 멘트한 적이 있는데 -
그래서 장군총의 건설에 관계되는 노역등 쓸가 하다가 저번 6월쯤 중국의 피라밋이 가시화 되는 기사가 신문에 나왔다. 나의 오랜 궁금증의 하나가 맞아 들어간다.아마 이집트나 잉카 그리고 장군총은 수메르인(아리랑 쓰리랑의 아리랑은 아리아 인이고,쓰리랑은 스메르 인이다)의 문화가 아닌가 싶다.
참고로 아리랑의 뜻과 기원에 대해서 여러 블로그에 제각기 떠드는 오만함을 볼수있다. 그러나 그것은 함부로 말할수 잇는 성질의 것은 아니고 다만 아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리랑이 우리 민족에게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민족의 정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한(恨)이다.이 恨의 기조는 아리랑인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부정할수 없는 공통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리라.나는 언젠가 친구 몇명이 미탄에서 막국수를 먹으며 한말인 정선 아리랑의 원조는 한치 아라리로 정선 아리랑은 구한말 개산된 즉 개칠을 한, 그래서 원음이 수정되고 세련화된 보잘것 없는 복사판이지만 평창아라리는 옛음 그대로의 보존으로 아라리 시원의 원조가 아니라 현존으로는 가장 오래된 원음의 아리랑임을 밝히고 싶다.
이 부분도 앞으로 하나씩 써 보도록 하겠다. 그러면 다시 원론으로 돌아와서....우리의 태백산은 스메르인들의 텃밭 = 태백이다.이해 국정 보고에서 지적공사가 정부에 보고하는 과정중 백두산은 지금의 백두산이 아니라 하였다. 또 영어와 한국어의 언어학적 유사점의 재밋는 부분도 다음에 한번 해 보자.조선은 JOY SUN 이다. 즐거운 태양 --- 우선은 해석이 안 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지금 중국의 서안이나 신강성 일대엔 피라미드가 300개 정도 있다.이짚트 피라밋의 두배 높이인 인 300m 정도의 피라밋도 다수 있다.
그중 하나 1960년대 중국 정부가 탐사 연구 중 3일 만에 문을 닫아 버리고 그 동네를 군사적 접근 금지로 베일에 쌓이고 있지만 항공촬영과 그 당시 학자의 양심의레포트 한장에 의하면 한글과 동이, 고조선의 유물 150점 파악 보고 되어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것인데...이 피라밋안에서 한글이 왜 나오는가?? 그건 한글이전의 고조선 시대의 가람토(혹은 기림토) 문자이다. 이 가람토 문자는 한글의 모체이고 영어 알파벳과도 비슷한 문자도 다수 있다.오히려 세종대왕께서 이 가람토 문자의 글꼴을 차입하여 다시금 음운을 붙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대왕께서 보신 가람토 문자의 책자는 오늘날엔 왜 전하여지지 않는가? 혹 싸이토 총독의 분서갱유때 이 책들도 모조리 태워버린건 아닐까??
이런 역사들을 알다보면 광개토 태왕이 평양에서 북쪽을 침공한 것이 아니란 사실과 장군총의 돌, 적석총이 훙노등 노예의 전시물일까?? 그리고 그 큰 피라밋이 개봉된다면 무엇이 그 안에 있고 과연 누구의 조상일까 ?? (도굴을 당하여도 피라밋 전체는 못 가져 간다.) 그래서 탄소 연대등의 측정으로 세계 4대문명 이전의 유물로 황하문명이란 개떡이 되어 버린다.
황하문명이 개떡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4-5천년 전쯤 황하문명의 탄생에 서막은 한문 天地日月의 출현이 중국 박물관에서 빛난다면 가람토 문자는 분명 그 이전의 문자임엔 틀림없기 때문이다. 4대 문명은 약 4,000 년 전에 비롯 되었다는 설인데 평양의 굴 속에 발견된 족장의 아들 미라는 7,000 년 전이라 판명 되었다. 단군 조선과 배달겨레의 동이족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보다 4,000년 그 이전의 문자가 없는 선사시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공자도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 하였다. 여기서 동이는 중국 동쪽과 한반도에 이르는 우리 조선족의 천혜의 좋은 땅을 말한다. 하기사 중국의 왕들도 배달국가 14대 치우천황의 손자들이 후직씨인데---중국의 역사 시원도 우리의 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라밋 개봉을 안 하고 군사보호시설이란 이름으로 비밀에 붙이고 있다. (너무 길다 하나씩 다음에---- )
백두산의 위치나 후직씨등 생소하다면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우리 조상의 이주경로와 고구려의 위상을 그려보도록 하겠다. 덧붙여 제일 나쁜 위인이라면 나는 김유신, 이성계를 꼽는다.재미있는 가설이지만 김유신이 소방정을 데리고와서 소방정 부하들 얼마나 잘 놀았을까??이성계가 공민왕과 최영의 명으로 조민수 다음으로 2군 사령관으로 요동정벌시 위하도에서 회군을 안하였으면 우리의 영토는 북 중국을 회복하였을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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