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각(西閣)의 밤
두 보
세모의 시간은 짧은 해를 재촉하고
하늘 끝 눈서리 개인 차가운 기주의 밤
새벽녘 북소리 피리소리 심상치 않은데
삼협의 수면 위에 흔들이는 별빛
들판에서 들려오는 통곡 소리, 전쟁소식을 알리고
어부와 초등의 노래 여기저기 들려온다.
제갈량, 공손술 모두 향토로 돌아갔으니
인간사 모든 일 될 대로 되라지.
(閣夜)
杜甫
歲募陰陽催短景 天涯霜雪霽寒宵
五更鼓角聲悲壯 蔘峽星河影動搖
野哭千家聞戰我 夷歌幾處起漁樵
臥龍躍馬終黃土 人事音書漫寂寥
* 臥龍 - 제갈량을 가리킴.
* 躍馬 - 漢의 公孫述을 가리킴.
西漢말 시국이 혼란할때 촉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 스스로 稱帝하고 白帝城을 세웠다.
*夷歌 - 소수민족의 가요로 기주에는 소수민족이 섞여 살았다.
*해설 -766년, 55세때 작품.북소리 피리소리가 비장하게 들리는 것은 두보의 심리 가운데 웅대한 포부와 영락한 현재라는 데비 구도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삼협에 담은 물에 별이 흔들리는 모습은 역동적이지만 동시에 불안감의 표출이기도하다.
그의 이러한 정서는 곧 급락한다. 자연이 주는 웅장하고 엄숙한 미감도 잠시, 그는 곧 황량한 현재에 눈뜬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
* 김의정 편저. [두보시선] 2002. 문이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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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의 이해>
10년전에 보았던 책이 어쩌다 책상 위에 이리 저리 굴러 다니길래 물수건으로 표지를 닦고 긴 겨울밤 다시 읽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위의 장중한 해설은 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詩聖이라 일컷는 杜甫의 詩이지만 이의 해설의 도식적 미사어구들이 이 詩의 대하여 나로 하여금 접근과 본질적 이해에 더욱 어렵게 만들었으며 일반적인 우리의 이해로 이 詩를 접해보면 금방이라도 위 시인이 옆에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이 詩를 읽고 1,300년전의 사람들의 고뇌와 갈등이 우리가 살며 근심하고 걱정하는것과 동일한 생각임을 느꼈다.
우선 위 시를 이해하여 보면 세모의 겨울날엔 해는 짧고 구름도 없는 맑고 차가운 추위의(인적이 끊긴) 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오면 전쟁의 북, 피리소리들이(당시 당나라 현종이 정치는 실증을 느끼고 양귀비에 정신이 팔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는...) 심상치 않게 삼협의 산골짝인 이곳 기주지방의 서각에도 간밤의 전쟁소식에도(즉, 피란을 가야 하는지 등의 관심이 쏠리는 소식등,,,) 사람들은 부던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전쟁이 어찌되든 사람들은 일터에서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는등 동이족의 (아마 묘족이 아닐까?? ) 삶의 노랫소리들이 여기 저기에 활기 넘치게 들려 오는데...
그러나 제갈량이나 공손술(이곳 쓰촨지방에서 백제성을 세운) 영웅 호걸들도 죽음앞엔 한줌의 흙으로 돌아 갔는데... 위 詩의 본문에서 "인간사 모든 일이 될데로 되라지..."이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똑 같은 마음이다. 두보는 이 시를 55세 겨울에 쓰면서 그 당시엔 요즘처럼 평균수명이 길지도 않을텐데, 또한 두보는 병약하고 이미 죽음의 문턱에서 신음하고 있는 터라 위 시의 마지막 어구인 "~ 될데로 되라지"". 이 표현은 마믐되라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영웅호걸이 죽음을 외면하려 안간힘 썼겠지만 한 줌의 흙으로 돌아 갔듯이 두보의 생의 애착도 이미 인간의 의지의 한계를 넘어섰기에 자연의 법칙에 순응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어떤일에 노력여하와는 상관없이 잘 풀리지 않을때 "될데로 되라지' 하며 쉬이 이런 표현을 한다. 이것은 마치 개판이 되어도 좋타는 식이 아니라 이미 나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이치적인 속성에 따르는. 즉 하늘의 뜻에 맏긴다는 이야기로 두보도 폐병과 당뇨와 여러 통증등의 병약에 시달리며 이제 죽음의 문턱에서 이 어려운 문제를 팽개치는게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르겠다는 순응의 심사로 生의 의지력과 집착력이 덧보이는 우리네와 같은 마음의 표현을 하였던 것이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위 본문의 해설과는 전혀 기분이 틀려지게 이 詩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두보는 이백과 나란히 중국 2대 詩聖의 한 사람이라 한다. 이러한 詩聖의 詩가 무엇을 찬미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슬쩍감추고 두둔하고픈 삶의 번민들을 들춰서 더욱 고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러한 두보의 詩인 것이다.
위 詩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두보의 일생을 들춰보면 두보는 낙양에서 태어나 30살에 방랑생활을 접고 수도인 장안에 정착하고 어려운 생활고에 10년만인 40에 관직을 얻었 처음으로 벼슬에 나갔으나 미관말단 종 8품직이라 생활이 어렵긴 마찬가지 였으며 48세에 사천성으로 이사하여 생활이 조금 나아졌으나 54세에 다시 유랑의 길을 떠난다.
이 유랑은 생게의 픽박속에 당시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을 떠난 것이며 766년이미 55세가 된 두보는 폐병과 당뇨가 좀 나아지자 기주(夔州 : 쓰촨 성 펑제 현[奉節縣])로 갔다. 약 2년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두보는 기주에 온 이래로 2년동안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는데 이는 전체 시1,400수의 2/7에 해당한다.
그 시는 점점 율격(律格)이 엄격해지고 자구(字句)도 단련되어 정연한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에서는 더이상 이전의 시에서 나타났던 혹독한 사회비판이라든가 격렬한 분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비장함은 밑바닥에 가라앉고 다만 무거운 우수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절실하게 배어 있었다 한다.
이백(李伯)이 시선(詩仙)이라는 별명을 가진 반면 두보(杜甫)가 「詩史(시사)」라고 불리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회성 때문이다.
詩仙 杜甫 두보의 친필
이백과 두보
중국의 2대 시성은 한 시대의 인물로 당 현종의 방탕 생활과 그로 인한 안록산의 난의 피해자들이다.
이백은 겨우 궁중 시인으로 천거 되었으나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이 귀양길에서 두보와 처음이자 단 한 차례의 조우 속에 같이 詩를 짓기도 하였다.
이백도 두보와 마찬가지로 평생을 방랑생활을 하며 詩를 읊은 것이다.
두보는 안록산의 난에 피난다니며 평생을 가난하게 궁핍한 생활에 찌들면서도 시를 쓰고 탈고하였다. 마치 이 두 시성은 우리네 김삿갓처럼 갖은 것도 없이 평생을 가난하게 방랑과 유랑속에 시를 읊조린 것이다.
<빈 주머니>
두 보
덜 익은 잣은 쓰지만 그런 대로 먹을만 하고
아침 노을은 높이 떠 있어도 먹을 수 있네.
세상 사람 모두 이익 좆아 서두는데
나의 길은 고난으로 뻗어 있구나.
밥 짓지 않으니 우물물 새벽에 얼어붙은 그대로
옷이 없으니 밤엔 침상이 오싹하구나
주머니 비면 비웃음 당할까 저어하여
한푼 남겨두고 간수하고 있다네.
두보는 자신의 체험적인 이야기로 당시 전란 속의 비극을 그려내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고고한 성품에 춥고 배고픈 고난의 길이라도 이겨 나가리라는 의지의 힘이 있다.
아래의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를 보자. 이 위대한 시인들은 자신의 궁휼한 처지를 감추려 들지 않고 그 궁핍과 가난을 현실 그대로 직시하며 소화하여 詩로 나타내고 있다.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고 천리를 떠돌다보니...
남은 돈은 엽전 일곱 푼이나 아직도 많은 것이네
그래도 너만은 주머니 속 깊이 간직하려 했건만
황혼지는데 술집 앞에 이르니 이를 어이할꺼나.....
이 詩에서도 동전 한닢에 느끼는 서글픈 위안..그것이 한 줄의 詩가 될 수 있슬까?
어찌보면 천재시인들은 가혹스러울 만큼 가난하였기에 그에 한맺힘이 오히려 인생의 詩를 쓸 수 있었던가?? 풍요가 아니라 갈구하기에 쓰는 위의 인용 詩들은 그래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랑을 해 보지 못한 사람이 사랑의 詩를 쓸 수 있는 역설이 아닌가 한다.
어찌보면 두보나 이백보다 김 삿갓은 더욱 가슴 저미는 애절한 마음일 것이다.
처자를 남겨두고 목적도 없이 길따라 바람따라 떠도는 방랑이란 아무나 할 수 없슬 것 같다. 한술의 식사보다 굶기가 끼니일 것이고, 죽는 그날에도 방랑의 길에서 죽었다. 그것은 얼마나 처참하고 고통 스러웠슬까?? 방랑길에 돈은 무슨 돈인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때론 배 고플땐 가난한 주막에 신세지기 보다는 이런 저런 노잣돈도 필요할 것이다.
김삿갓의 방랑을 이해하는 어느 사대부들이 찔러 주었슬 듯한 몇푼에 남은 것이라고는 술 한잔 값의 몇푼,, 그것을 고쟁이 속에 넣고 다님도 큰 위안이겠지만, 쌈짓돈 몇푼 아끼고 아껴서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가?? 김삿갓은 그 돈을 한잔 술에 애써 쓰려는 고민... 그것은 고민이 아니라 처참함이다. 한잔 술의 낭만이 아니라 춥고 배고픈 허기를 면하고 잠시라도 얼어 붙었던 창자를 녹이고 취중을 그리워하는 이 절박한 순간들,,,
이 순간을 숨기지 않고 아낌없이 한줄의 탄식으로 고뇌하는 ...이것이 이들의 시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두보는 지금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디며 버티기에 안간힘을 쓰며 또한 스스로 비웃고 있다, 우리도 내가 없고 또 무엇이 잘 않되면 "내가 병신이지"" 또한' 내가 바보이지"" 하고 말하지 않턴가??끝을 맺음에 두보의 이러한 詩 한수를 다시 보자.
출세한 친구들은
소식이 끊기고
아이들은 노상 굶어
낯빛이 핼쓱하다
구렁을 메울 이참에도
멋대로 호기만 부리는 나
미친놈이 늙을수록 더 미쳐가는 꼴을
<미친사내 狂夫 중에서 하단의 詩>
늙고 지치고 병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 이것이 오늘 두보의 詩를 낳게한 것이다.
미친놈이 더 늙을수록 더 미쳐가는 꼴을,,, 이것은 두보의 마음으로는 아무렇게나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스스로의 행동양식이 자기 가치 기준의 범주에 속해야 되기 때문이다.
------------------------------------------------ 終
다음편으로 詩仙이라 칭송되는 이백의 詩를 구경 갈까요??
이백과 두보, 그들의 차잇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동양화를 그릴때 두보는 세묘법의 북종화처럼 자체의 격식과 룰을 엄중히 하며 詩를 씀에갈고 다듬었지만 그에 비하면 이백은 남종화의 왕희지 필체처럼 그의 감탄이나 말 자체가 詩가되는 즉, 한번에 내려긋는 즉흥성이랄까??
이백은 현종때 궁정시인으로 뽑혀 정치의 입문의 야욕을 갖었으나 임금을 칭송하는 시만 지어 바치다가 그것도 모자라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해금이 되고나서 그의 인생의 파격은 찾아오고 방랑생활을 통하여 주옥같은 詩를을 남겼다.
궁정화가 램브란트는 어느 연회 그림에 왕의 인물들이 빠진 풍경화를 전시하고 밥줄이 귾겼다. 그때까지 모든 그림은 인물이 꼭 있어야 하고 풍경은 빽으로 존재 하였는데 왕의 연회그림에인물이 빠진 풍경화만 그려 보이는 사건이후 렘브란트는 궁핍한 생활을 하지만 인간만이 이 자연의 중심이 아니고 우리가 보고 선택하는 것은 자유라는 인간들의 사고 방식을 전환 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이백도 궁정에서 나와 방랑의 길에 대자연과 호흡하며 그들을 찬미하는 시를 지었던 것이다. 파격이란 뜻은 동양엔 시인이 따로 없었다. 우리의 가사문학이 귀양지 문학인것처럼 이백도 실직이되고 안록산의 난에 어수선한 정국에 마땅히 할일 없이 방랑의 길에 詩를 지었던 것이다.
위 시인들은 그토록 궁핍한 현실속에 그를 숨기지 않고 詩로 승화시켰다. 아마 詩란 갈망하고 고뇌하여야 조은 작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그러면 詩란 배부른자는 쓸 수 없다는 가정의 역설이..
나, 후세백작도 이 시인들처럼 역경의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다.
부귀영화는 나의 것은 아니더라도 나는 사선(死線)을 몇번인가 들락거리며, 그때마나 나의 친한 노친은 너 죽이지는 않는다라고 위로하시지만, 그러면 왜 그렇게 나를 심판하는가?? 나에게 한평생 따라붇는 그 행위자가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神인가?
후세는 죽으면 위 거장들처럼 이름 석자는 남지 않는다. 마치 울 동네 부자들처럼...그러나 후세의 블로그엔 이 사회의 생각과 틀리는 글들로 곽 차 있고, 이러한 나의 생각들이 정의에 한발 더 다가서는 글들이라.
먼 후일 나는 갔지만 힘있는 역사가, 평론가들이 나의 글들이 옳음을 입증해 줄 것이다.
그에 비근한 예를 들면 월정사 8각 9층 석탑은 13층 석탑이었다는 문헌의 예에서 나의 그러한 이론들,,,또한 정선아라리에 관계하는 모든 아라리 연구자들은 이 아라리(아리랑)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정선 아라리의 시원을 600년전 고려 충신들이 불렀다 하며 또 어떤 이는 융의 정신분석학까지 끌여들여서 아라리의 님은 임금님이고 국가라는 점이라는데...아라리 가사 천여수를 아무리 다시 훑어 보아도 그러한 서사적 가사는 하나도 없다.
600년전에 전오륜등 거칠현동이 불렀다는 기록도 또한 없다. 여기에 김연갑의 "정선 아라리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책은 책 그 자체가 오점이란 점이다.
평창중고등학교 22,25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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