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흥망성쇠]
후세백작 2017.11.16 02:06
한 나라가 창건과 멸먕의 흥망성쇠는 어쩜 우주의 순환과정과도 같다.
무수한 별 속에 제 수명을 다하는 별은 주변의 압력으로 당겨져 폭발하여 초신성의 재를 뿌리며 하늘을 잠시 밝게하지만 이내 수 많은 먼지로 분해되어 다시금 서로 당겨지고 서로 화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별로 생성되는 것이다.
저 밝은 태양도 언젠가는 가스로 부풀어지고 외부로 분출되어 흩어지고 다시 어떤 새로운 별이 될 것이다. 이렇듯 역사에서 한 국가는 망하여 또다른 국가의 출현을 위한 무수한 전쟁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삼국지를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럼 우선 여기서 평창출신 역사작가" 황원갑"님의 삼국지 평 중에서 조금 인용해 본다.
"중국의 '삼국지'는 잘 알아도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잘 모르니, '삼국지'를 읽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삼국지'를 읽더라도 그것이 우리 젊은이들의 역사의식을 좌우하는 길잡이가 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본다.
첫째 위ㆍ촉ㆍ오 중국의 삼국은 모두 단명한 나라였다.
위나라 46년, 촉나라 43년, 오나라 59년으로 중국 25사 가운데 단명한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기록도 많지않고 또 중국인들도 별로 자랑스러운 역사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엔 천년사직을 자랑하는 신라와 700년의 고구려와 백제를 가지고 있다.
둘째 '삼국지'의 내용은 배울 것이 없다.
전쟁과 권모술수로 이어진 '삼국지'는 교훈적 가치가 없다. 중국에는少不看水滸 老不看三國)'는경구가 있다(젊어서는 수호지를 읽지 말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에는 수호지를 읽고 강도가 될까봐 겁나고 나이 들어 '삼국지'를 읽으면 더욱 음흉하고 교활해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셋째 '삼국지'에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 없다.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아마도 제갈량(諸葛亮)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의 실력은 별것이 아니다. 자기 나라가 50년도 못 가 망할 것조차 예견하지 못했다. '후한서' '진서' '위서' 등 정사에 따르면 제갈량은 유비가 죽기 전까지 군권을 장악하지도 못했다.
또한 유비도 인내심이 깊고 너그러운 인물이 아니며 친아들 유선의 왕위계승을 위해 양아들 유봉을 죽이고 처자식을 언제든지 갈아입을 수 있는 의복에 비유하는 등 냉혈한이었다. 이처럼 '삼국지'에 빠지면 권모술수에 능한 기회주의자가 되기 십상시이다.
그럼 삼국지의 흥망성쇠로 이해해 본다면...
<삼국지>는 後漢이 멸망하고 진나라가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시기속에 출몰하는 제국들을 기술한 역사서이다. 후한말 정부의 헛점을 이용한 환관세력의 전횡으로 후한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데....이때 황건적의 난과 십상시의 난을 거치며 군웅할거 시대를 맞는다.
이러한 십상시의 난 이후 관도대전, 적벽대전등은 3국 구도를 고착화 시켰으며 오랜기간 위나라를 위협한 촉나라는 국력소모로 멸망하고 위나라의 권력구도가 조씨에서 사마씨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오나라는 이궁의 변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촉, 오나라는멸망하고 위나라는 사마씨로 변환되는 삼국의 최종 승자는 위,촉, 오가 아닌 서진이 된다.
그러나, 서진은 폭정으로 인해 팔왕의 난이 발생하며 서진은 분열되어 패망하여서, 이어 오호십육국 시대로 전환된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에서 본다면 삼국지의 위, 촉, 오나라의 삼국도 결코 야망을 가진 대망의 국가는 아니고 이 국가들은 後漢이라는 대 제국의 붕괴에 따른 지방적 군웅할거의 무인시대란 점이다.위에서 비유한 자연계 현상으로 본다면 초신성 폭발이후 다시 하나의 큰 항성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상에 소행성들의 문제이지 스스로 큰 별(항성)은 아닌것이다.
아래에서 쓸 송나라의 창건에서도 당나라가 멸망하고 약 50여 제국의 주유천하의 명멸을 가지듯 위, 촉, 오나라의 어떤 장수도 스스로 야망을 가지고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서 대 제국을 만들고 이상적 국가를 창건한 것은 아니다. 군사막부란 쇼오군의 오다 노부나가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더 현명한 군주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고려의 왕건의 훈요십조의 그 스스로의 정치적 이상향을 그리고 있으며, 조선의 방원의 무시무시한점은 세조와는 다른 개념이다. 세조는 스스로의 왕위찬탈의 노력이지만 방원이 정몽주에서 정도전까지 무수한 유혈혁명을 하기엔 그 스스로의 권력게임이 아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질까 걱정이란 점에서 출발이듯 무릇 재갈량이나 조조, 유비등 삼국지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삼국지를 픽션화 시켰어도 이들의 행동과 머리엔 치세(治世)라는 한 국가의 가장 큰 명분을 추구하지 못한 졸장들로 역사에 큰 파장을 남기지는 못한 위인들이다.
마치 지난 탄핵시 본인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하려는가 하고 외친적 있는데, 일부 정치인들이 어느 당을 출당하는 비유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그리스 패권전쟁으로 스파르타가 강하니 아네테 정치인들중에서 자기네가 아닌 스파르타편을 들었고 스파르타가 승리하자 그의 대리인으로 아테네 통치하기에 그들은 정적 1,500명을 사형시키는등 아테네에 탄압의 공포정치를 장식한다. 하지만 그들 자신들도 처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네 현실에서 그 펠로폰네소스를 지향하던 정치인들은 이제 원대복귀나 또 한 무리는 타당의 이념과 경제논리에 아주 똑같다하는등,,,그들의 분당의 의미는 무었이었던가??
이렇듯 삼국지의 위인들은 스스로의 국가를 창출하지만 그 국가가 백성을 위하는 이상적 국가로서의 지향점이 없었기에 과연 그들의 노력은 존경의 발로는 아니란 점이다. 어쩌면 위, 촉, 오 삼국도 소행성 시대의 화석으로 굳어졌지 그들의 포부와 포용력은 큰 별이 되기엔 너무도 먼 시공의 개념이었슬듯 하다.
나의 친구들도 나이가 좀 되어서 그런지 그들도 예외는 아닌듯 삼국지 이야기를 자주 들춘다. 그래서 어느 친구는 이 대화에 낙오자가 될까봐 삼국지 책을 몇 번 읽고 비디오 테입을 팔십여회 보았다는,,, 그래서 삼국지 속의 詩도 줄줄 내리꿰는데..노력이야 좋은 일이지만 괜스레 자격지심에 지나친것 아닌가 한다.
아마도, 본인은 삼국지보다도 우리 한국의 6,25 동란의 전쟁이야기들을 더 중시 여긴다. 중공군 6차공세는 서울 공격이 아닌 방태산을 넘어 밀고 내려와 국군은 진부로 후퇴가 아닌 도망정도로 벤플리트는 횡계에서 앞으로 3군단은 폐지하고 군사 작전권은 회수한다 하였다.
물론 7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으로 피난가면서 미군이 효율적 전쟁을 수행하기위해 이승만은 작전권 이양서를 써 주지만.. 그래도 한국군은 자체적 작전을 하는 범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중공군 6차 공세에내 밀린 3사단과 9사단, 즉 아몬드의 미 10군단 배속으로 긍극적으로는 아몬드의 작전의 편린에 기인한다.
여기서 편린이란 화력이 약한 한국군이 전방에 서고 화력이 우세한 미군은 측방과 배후라 이 문제에 기인함을 말함이다.
우리는 삼국지 보다 6,25 전사를 더욱 알고 또한 나아가 가장 명석한 미 대통령 루즈벨트는 어떤 생각이었슬까?? 또한 중국과 소련의 입장과 태도는..이러한 주변의 배경들, 이것이 오늘의 미국과 대비적으로 분석도 해 볼수있는 진정 6,25는 우리에게 필요한 전사이다.
이제 이 글" 제국의 흥망성쇠"에 望과 쇠(衰)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함에 그 표본은 송(宋)나라로 송나라의 출현엔 삼국지의 이야기와 같은 유형의 무수한 제국들의 난립인 5호10국 시대를 거쳐 송나라도 천하 통일을 하게 된다.
<송나라 건국배경>
당(唐) 왕조의 멸망은 양귀비에 빠진 현종이 정치를 팽개치자 이에 픽밥된 사회에 불만으로 안녹산의 난과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는 멸망한다. 제국보다는 여인네 치마폭에 감긴 현종은 세상에 상 병신이...왜냐면 제국엔 수 없는 여인이 줄을 서고 있는데..
정말 탄핵이란 잘나갈때보단 이럴때 팔요할텐데..아마도 이 시절엔 탄핵이란 낱말은 없었던듯 하며 이러한 단어는 모두 일본식 단어인데...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친일파로 분류되어 일제 청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네 자신의 문제가 더 크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아리랑 책을 뒤지다보니 한국을 정말 사랑한 헐버트의 아리랑 기록 이면에 조선은 정치, 경제, 사회 모든명의 열악성에 차라리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면 하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지난번 일제의 1910년대 강점기 초의 전 국토의 측량사럽과 20년대의 제방사업에 신작로라는 도로가 생겨나고 관게수로에 힘입어 전답의 확대가 풍요를 가져오는데.. 조선시대엔 도로가 없었다 한다. 우마차길도 만들지 않은 이유는 침략자들의 이동이 용이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도로를 만들지 않았다 하는데...정말 장 못담그는 이유,,,이것이 한 국가의 정의에 속할 수 있는가??
제방공사로 도로는 물론 논의 확장은 부의 원천을 가져온 것인데 아마도 조선시대 평창의 논은 얼마만큼일까?? 물을 가둔 관계시설이 용이치 못해 천수답으로 아마도 방칫골이나 지난번 증언에 전해주는바로는 평창중학교를 관통해 흐르던 샘물옆등,, 그리곤 밭벼정도일 것이다.
이 제방공사를 통해 도로가 생겨나고 생활용수이 수로가 생겨나고 논이 생겨나 일시에 세로운 세상이 되었슬 것이다.평창을 바라보면 그 당시 생겨난 논이 지금까지의 경작지 대부분이라면 당시 이러한 관제사업에 얼마마한 부를 창출하였던가...
물론 일제 강점기의 일제 청산보다 이 기간을 통해 가장 큰 득이라면 양반, 노예의 구분이 없어진 것이라..그래서 일제 청산이란 남탓만 하지말고 아직도 이러한 과정속에 스스로의 문제도 재 점검해봐야 옳지 안켔냐만은,,,
아마도 임진왜란때에도 왜구들의 만행보다 원정군 중국의 폐해가 더 컸던듯도 하다. 그러지만 일본넘들의 꼼수를 보면, 근자에 발표된 어느 논문엔...과거 우리 조상들은 시신에 베옷이 아닌 비단옷을 사용했다 하는데...우리는 베옷이 제일 좋은 것으로 알고있지만 원래는 제일 나쁜 옷이고 비단옷이 제일 좋은 것이라 한다. 일제 강점기시 일본넘들 심통이 제일 나쁜 베옷으로 바꾸었다 한다.
그런데 우린 아직 그것도 모르고 국산 베옷이 중국제 보다 더 좋고 기백만원이라도 국산 베옷을 선호하지.. 만약 이를 본 일본자석들이 뒤돌아 화장실가서 속빈넘들이라고 얼마나 웃슬까... 친일파 청산이기 전에 엇그제 신문 사설에서 작가 "복거일"씨의 "박정희론"을 보면 박정희는 왜 일본과 통상을 해야 했는가를 잘 이야기하고 있다.
본제에 너무 멀어지는듯 합니다. 괜스레 죄회전인척 하지만 우회전 해야지요.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당나라가 멸망한 후 주전충(周全忠)이 후량(後梁)을 세우자 각 번진의 절도사들도 앞다투어 나라를 세우니 황하유역에는 오대(五代) 왕조가 차례로 세워지고, 남부에는 오월(吳越) 등 십국(十國)이 세워져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가 되었다.
황하와 양쯔강 사이의 중원을 기반으로 907년 세워진 후양,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여러나라들이 명멸끝에 당나라가 서기 907년에 멸망한 지 53년만인 서기 960년에 드디어 송나라가 출범한다.
오대 십국시대에는 무인시대로 마치 삼국지처럼 제후들의 소행성 시대를 거쳐 대 제국을 이루는 패턴이다.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은 과거를 통해 문신관료를 선발하여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도록 중앙집권제를 강화해 갔으며, 학자적 관료가 사회를 주도해가는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확립하였다
송나라는 1,000년경에서 남송으로 내려가면서 1,200년경까지 약 200년간 중원을 차지한 나라로 화약, 나침반, 지폐등 각가지의 도구들을 세게 최초로 발명하며 또한 바람개비의 풍로도 발명하여 숯을 생산하여 풍로로 화력을 올려 용융점 1,580도의 주철을 생산하여 실크로드로 금은보화보다 주철의 교역이 많은듯 하다.
우리 역사서엔 송나라 하면 정치적으로 왕안석의 신법당, 구법당 하는데 이는 그리 배울것도 없는 역사서들이고 인터넷 어디엔가는 교고 강사 한 사람만 좀 이상타는 표현이 있건만,,, 그것도 송나라는 각종 무기를 잘 만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은 싫어했다는 멘트뿐인데...이 말은 아이러니할게 없는 말이다.
송나라는 외국에서 만들어 달라는 무기의 생산을 제품으로 취급한 것이지 자기네가 쓸려는 무기가 아닌것이란 점이다. 그들은 무기가 아닌 주철의 기술로 돈만 벌었던 것이다.
송나라는 문치주의를 표방하면서 중국 최고의 문명과 문화를 이룩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우리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1) 요나라의 침입
송나라 때에는 북방의 거란족의 요(遼)나라, 여진족의 금(金)나라, 몽고족의 원(元)나라가 호시탐탐 송나라로의 침략 기회를 였보다가 서기 1004년 요(遼)나라는 20만대군이 송나라를 공격함에 따라 송나라는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냥을 요나라에 바치는 것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자 북방민족들이 송나라를 노리게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2) 서하의 침입
중국 서북쪽의 티벳계 탕구르족의 서하(西夏)가 두번째로 송나라를 쳐 들어가자 송 황제는 이번에도 전쟁을 회피하고 매년 비단 13만필과 은 5만냥을 조공으로 서하에 바치고 이를 중재한 요나라엔 매년 비단 10만필과은 10만냥을 바칠것을 약속한바 돈 많은 송나라도 경제적으로 픽박을 받을 수 밖에.. 그러면서도 이제 송나라는 국제적 봉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3) 금나라의 침입
만주에서 여진족의 아골타가 1115년 금(金)나라을 창건하고 요나라 진압군을 처치하고 세력을 넓혀 부강해진다.송나라는 요나라에 주는 조공의 부담을 덜으려고 금나라를 신흥세력이라 만만히 생각하고 연합하여 요나라를 정벌하기로 협약을 체결하였고, 이로서 금나라는 요나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송나라는 때마침 발생한 양산박, 송강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요나라 정벌전투에 참여하지를 못했다.
금나라는 독단으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연경(북경)을 송나라에게 반환하는 대가로 매년 은 20만냥과 비단 20만필을 받기로 약속하였으나 송나라는 한번도 지불하지 않고 오히려 잔존해있는 요나라 세력과 손잡고 금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뿌락지가 난 금나라가 쳐들어오자 싸움을 겁먹고 실어하는 송나라 황제 휘종은 금나라에 강화를 이제는 시시한 은이 아닌 황금 5백만냥, 백은 5천만냥, 비단 백만필등 조공을 바치며 송나라 황제는 굴욕을 당하지만 이도 몇개월 지나지 않아 금나라는 송나라를 쳐들어가 1127년 북종시대를 마감한다.
힘의 논리에 균형이 깨지면 제 아무리 알록달록한 내용을 가지는 국제적 조약도 필요가 없어지고 통째로 삼키는 극단적인 에를 보여준다.
4) 남송의 멸망
북송이 멸망하자 휘종의 동생은 남쪽으로 도망가서 항주에 수도를 정하고 송나라를 계승해 1127년 남송을 세우고 고종으로 즉위하지만 금나라가 쳐들어오자 고종 역시 위종, 흠종과 마찬가지로담력이 약해 전쟁을 겁을내고 용기가 없어서 맞서서 싸우자는 용기있는 대신 이강을 파직시키고 금나라와 협상을 시도한다.
하지만 금은 남송의 협상을 받아주지 않고 남송을 공격하니 사방에서 백성들의 반란군이 대항하였는데, 고종은 협상만 추구하여 금나라와 강화조약을 체결하였지만 다음해 이를 무시하고 남송을 공격하자 남송군의 악비는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중원을 회복하는등 스스로 군대를 조직하여 금나라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또다시 화친을 시도하자 화친조건에 악비를 제거해야 함에 악비를 소환하여 모반죄로 죽여버리고 금과의 굴욕적인 협상을한다.
송는 금나라가 황제책봉을 하며 송나라는 금나라의 신하로서 예를 다해야 하며 이번도 어김없이 매년 은 25만냥, 25만필을 바치는 속국이 되었다.
이때 금나라는 몽고의 테무진이 징키스칸으로 추대되자 그에게 금나라의 조서를 받들라 하였다.
하지만 징키스칸은 1211년 대군을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하여 금나라가 몽고에게 조공을 받치는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라고 금나라는 남송에게 연합하여 몽고를 쳐부수자고 제의하지만 남송은 이미 그간 굴욕적인 금나라를 없애기 위해 몽고에 조공을 받치는 조건으로 금나라를 함께 치기로 약속했던바 그 결과 금나라는 패망한다.
남송이 잔꾀를 내어 몽고와 짜고 금나라를 쳐 부순 결과 몽고가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 금나라가 멸망하자 몽고군은 협약의 동반자관계인 송을 쳐들어가던중 몽케 칸이 서거하자 후게자 권력투쟁의 암투가 벌어지자 남송을 공격하던 쿠빌라이도 권력을 잡기위해 철수하여 귀국한다
이로서 남송은 평온한 시대를 구가하지만 20년후 쿠빌라이가 칸으로 선택되자 쿠빌라이는 금나라를 칠때 협약한 은과 비단을 받치라 한다.남송은 이를 무시하자 쿠빌라이 칸은 국호를 원나라로 개칭하고 남송은 원에 항복하지만 끝내는 멸망하기에 이른다(1279)
우리는 이 역사에서 국권을 유린하고 전전긍긍하며 조공만 받치고 왕조의 안락함만 일삼으려는 송왕조의 허약함이 패망의 원인이란 점을 볼 수있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는 지금 동북아 골짜기의 불투명한 국제정세의 회오리속에 빠져있다. 우리는 지금 국권을 보존하려는 미국과의 동맹도 중요하지만 또 한편에선 중국과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다.
우선 미국과의 관게는 자유 우방으로서의 동맹이다. 여기에 누구나 잘 알고있는 북한의 핵폭탄 실험의 제재와 또한 이에 방어에 있어서 고고도 미사일 사드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지금 현재로서는 미군병사들은 사드의 범위에 들지만 전국토 2/3는 사드에 무방비 상태이다. 그러나 꼭 사드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에 의존함은 물론 좋겠지만 그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큰일일
것일까??
북한의 핵이 얼마큼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들의 제스추어는 대화의 장에서 높은 지위를 보장받기를 희망한다면,,사드가 우리에게 필수적 필요의 전제는 아니란 점이다. 만약 북한이 핵을 쏜다면 그것은 사드 이전에 북의 컨트롤에 상당한 문제를 갖고있다는 것으로 해석해 본다면..북핵은 충분히 컨트롤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정부는 미국이 보는 충분조건을 다 채우지는 않았지만 한, 미,일의 MD방어전략에 이상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라도 동맹관계를 다시 두드려보고 위의 송나라의 예처럼 묵사발이 되는 일이 없도록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아무리 자유 동맹이라 하여도 지난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을 가장 힘있고 위대한 나라로 만들면서도 또한 금세기 가장 훌륭하다는 애치슨 국무장관도,,그들은 동북아 골짜기 협곡의 한계선으로 애치슨 라인을 만들었다.
이 애치슨 라인은 미국이 태평양을 앞마당으로 삼고 문가엔 세파트 집에 쌈 잘하는 일본 똥개들을 배치하고 남한과 대만은 이 라인 밖으로 당시로선 호랑이같은 공산주의 앞마당에 내동뎅이 친 것이다. 한반도와 대만을 지켜주기엔 희생량이 너무 크다는 뜻이다.
물론 지금은 북한의 핵을 통제하기위해 남한이 필요한 상황이겠지만 그래도 한,미,일 MD는 잘 되간다고 믿고만 있어야 한다면 큰 오산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 과정에 인접국가들은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바쁜데, 우리는 사드에만 신경을 쓰고잇지나 않는지...중국은 사드만 문제삼았지 그 외의 우리도 군사력의 증강은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 기회에 준비를 하지 않으면 일본과 중국의 군사력 확장에 중,일의 협곡은 상대적으로 높아만 갈 것이다.
또한 중국을 바라보면 인접 대국으로 지리적이나 교역, 정치적으로 모든 문제를 그냥 간과해서는 않될 나라임엔 틀림없다. 아마 오랜만에 중국의 꼬장한 빗장을 풀기까지엔 많은 노력과 많은 고생도 감수해야 했다. 여기서 안주할게 아니라 근본적 대처 방안은 무엇일까 노력의 경주는 있어야 한다.
중국사람들의 속성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시련의 가장 힘든부분은 임진왜란시보다 병자호란때였슬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시 왜넘들보다 원정군 중국군들의 수탈이 더 심한듯 하다.
고려의 왕건부대 5,000명이 신라 침공시 왕건은 쌀 한톨도 빼앗아 먹으면 사형에 쳐한다고 정말 예의바른 군인들이었다.하지만 견휜이 신라 침공시엔 경애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하고 난잡하게 굴었다..
그러기에 쓰러져가는 천년사직의 신라의 운명을 고려 왕건에게 위임하였던 것의 미덕이라면 중국 전체의 역사는 전투를 통하여 죽고 죽이는 마치 백제의 의자왕이 패전으로 죽으며 백제문화는 이어지지 못하고 거기서 끝나듯 중국역사는 왕조의 출몰에 의한 왕조의 역사이다.
이러한 왕조는 위의 송나라 역사에서도 보듯이 자기가 제일주의이고기때문에 옆 인접국들은 속국으로 치마속까지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나,당 연합군 이래 무수한 외래의 수모를 당하며 명나라는 세자 책봉의 문제까지...그들의 요구도 있었지만 영창대군이 적장자라고 광해군을 폭군으로 만들어버린 서인들,광해군이 서얼이라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하여야 한다고 중국에 고하는 서인들,, 중국보다는 우리의 문제가 더 크다하지만,,,
중국 짱게들에 습성은 모 아니면 도이다. 즉 내가 일인자면 모두들 빤스속을 후려버리는 속국이란 뜻이다. 이 점이 중국을 경게해야 하는 첫째 사항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근본적인 중국의 태도를 이해하자면 한가지 방법의 예시를 이해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가상적으로 지금 북한이 붕괴되었다고 생각할때 우리는 남북 통일이란 즐거운 비명을 자아낼까?? 아니면 일전 본인의 글에서처럼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알려주는 코리아 패싱의 문제에 중구은 대동강 이북은 중국땅이고 고구려는 읍루의 상족으로 고구려가 망하자 그들은 다시 여진족내 읍루의 유민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보는 견해로 대동강이북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면,,,
여기서 이 문제의 결론이 아닌 중국이 북한에 대하여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점에서..우리는 이러한 다각적 이해속에 중국과의 입장을 보다 더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위해 한가지 프레임 방식이 아닌 두개의 아니면 열개의 방식이 다른 올로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위의 송나라 역사처럼 외세만 믿는것은 큰 오류를 지닌다는 것을 교훈삼아 어디까지나 우리가 할 수있는 ]최고의 점까지 힘을 축적하여야 함이 기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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