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글은 임진왜란 당시 군, 관민을 통솔하셔서 왜구와 대항하여 싸운
당시의 권두문 군수님과 평창의 선인들에 대한 저의 작은 소묘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임진왜란 당시 평창군수이셨던 권두문 군수님의 직계 12대 후손인 아이디 "나무귀인"님의 방문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어릴 적 노성산에 올라 역마차 달리던 성벽에서 뛰어놀며 이곳이 노성장군의 싸움터라 불렀지요. 그리고 노성장군이 무슨 역사인가 늘 궁금했었답니다. 그 궁금증에 해답의 일부를 일전 엄기종님의 카페에서 권두문 군수님의 임진왜란사 <호구록>을 읽으며 조금이나마 궁금증이 해결되었습니다.
나무귀인님의 글을 보면 평창에 왜구가 침입한 시기는 선조 임금님이 의주로 피난 가고 명의 도움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조선정벌의 마지막 땅 평안도에서 후퇴하는 그런 상황에서 태백산 줄기로 내려오는 왜구들의 퇴각전이라 할까??
당시 선조 임금을 잡지 못하니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미움을 받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부하 장군 11명과 3만의 병력으로 뼈저린 각오로 서울을 공략하리라 굳게 마음 먹었습니다. 이것은 임란의 마지막 승부처, 서울 함락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목숨이 걸린 한판이란 점입니다.
임란 7년사의 이 마지막 행로에 권율 목사는 도원수라는 자격으로 임금님으로부터 서울을 사수하라는 명을 받고 조그만 방어선을 고민 끝에 행주산성을 수비의 성으로 택하고 방어준비를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그만 성 하나 함략하면 서울을 거저 먹는다고 생각하고 도요토미의 미움을 해소할 기회의 회심의 미소를 품은 전투였죠, 그러나 2,600명을 거느린 권율 도원수는 행주산성의 배수 지진을 이용하여 2만 5천의 왜구를 죽이고 승리하여 퇴각하는 왜구들로부터 마지막으로 최대의 공격으로부터 서울을 사수하였다.
<행주산성에서 대패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이로 서울입성이 실패로 돌아가고 후일 본국으로 돌아간 고니시는 일본 내부의 동서 전쟁의 패자로 사형에 처해진다>
<아마 평창의 관군들은 조정의 차출로 총사령관 신립장군이 문경새제를 막게 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임란사에 가장 큰 작전 실수였다고 저는 아래 어디에 적었지만... 내륙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앞을 딱 가로막는 큰 산.. 문경새재,,, 일반적으론 빗장의 새재는 전략적 요충지로 가장 공격이 용이한 지점이지만 신립은 보병이 아닌 기병 출신이라 문경새재의 빗장을 풀고 탄금 벌에서 기마전의 일전이,,,,처음부터 탄금벌에서 왜구를 막게 했다면 조총 유효 사거리 50m 보다 활의 사거리에 더욱 빛나는 전사(戰史}가 되었슬 것일 수 도 ..
<왜구 본대의 이동경로>2014, 12, 08 첨부 입력,
임란 당시 20만의 왜구가 대명 정벌론을 앞세우고 조선을 침입 하였다.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왜구는 9번대까지 총 20만의 대군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1번대는 고니시 유키나가 왕을 쫓아 신의주까지. 2번대는 가토 기요사마 번대로 왕세자를 잡으러 함경도로 4번대는 일본의 전라도인 최 남단 규슈의 스미즈 가문 군대와 규수 중소 다이묘들의 군대를 모아서 1만 4천명병력으로 총 사령관에 1번 군대 4,000명의 요리 모시라이 장수 휘하의 부대로 이 4번대는1, 2번대를 뒤따라 한양까지 올라가서 강원도로 우회하여 김화에서 춘천 조방장 원호의 목을 베고 춘천, 화천을 손에 넣고 고성,간성에서 4,000명의 모리길성의 1번 지대는 삼척까지 접수하며 다시 유턴하여 백봉령을 넘어 정선을 싸움도 없이 항복 시키고 평창에 다다른다.
평창에 항복문서를 들고온 사신의 목을 베고 왜구에 항전하였으며 이 모리부대는 영월을 접수하고 도영인 원주에 입성하여 3,000명의 왜구는 영원산성(치악산)에서 결전을 기다리는 원주목사 김제갑 옹의 4,000명 군대를 굴복시키고 강원 도영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평창 전투가 발생된 것이다. 당시 정선에선 항복하고 이 본대는 성마령을 넘어 본대는 미탄에서 율치. 마차를 이어 영월의 직선 코스로 영월로 먼저 간듯하며 모리 휘하의 장수 한 명이 미탄에서 평창으로 진입하였슬 것이란 저의 예측이다.
평창에선 권두문 평창군수 이하 관군 70여 명중 조정의 명에 의해 왜구 주력부대의 한양 입성 루트에서 문경새재의 제재를 위해 반 이상의 군졸이 차출되고 탄금대 신립장군을 지원한 나머지 3-40며 명의 관군과 주민들이 세를 합하여 왜적에게 항전하였으나 응암굴 앞에서 서성이던 왜적과 충돌, 이것이 임란 당시의 평창전투로 관군들은 사망들 하며 군수는 체포되에 원주로 압송되는 것이다.
여기서 평창진입 부대는 노산에서 윗상리로 내려오며 본대가 종부→천동→유동(본대진영)으로 이어지며 당시 유동에서 도돈으로 가는 길은 천동내를 건너 응암으로 빠지는 길목에 응암굴에 피신하였던 것이 쉬 발각되는 원인이 되었슬 것이다.
------------------이상 입력 끝----------
태백산으로 내려오는 왜구들에게 강원도 각 고을은 떨고 있었다. 왜장이 보낸 첨병의 항복문서를 받고 그 자리에서 무릎꿇고 항복하였고 그래서 관헌은 왜장의 지휘소가 되고 현감과 현감의 부인들은 왜장의 시녀가 되었슬까요?당시 권두문 군수님 아래 평창의 우리의 선조분들은 그런 모욕스러움을 간과하지 아니하려고 적장이 항복을 권하는 문서를 가지고 온 사신의 목을 베고 왜구에 대항하였답니다.
지금의 노성산도 권율의 행주산성과 같은 배수지진의 산성으로 이곳에서 왜구와 한판의 승부에 그러나, 나무귀인님의 글대로 왜구는 병력이 4,000명, 우리의 관군은 고작 70명으로 상대를 할 수 없으니 후일을 도모키 위해 천동, 마지 지씨들이 지금도 많이 살고있는 응암리강 건너 앞산은 아마 마지 지씨의 지사함 장군이 그 지리를 잘 았슬듯, 그 가파른 절벽속의 동굴로 피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위 아래 굴의 연락 방법으로 매의 다리에 글을 적어 붙여 연락하다 왜구의 눈에 띄여 함락되고, 당시 강소사 부인은 그 험한 절벽을 뛰어내려 낙화암보다 더 푸른물로 투신하였답니다.
지금도 그곳 지명은 응암리이지만 매화로 불리워 집니다.,<호구록이 알려지기 이전까지의 구전으로..노성산에 뒷 절벽으로 가는 뾰족한 봉우리에서 장군의 부인이 투신하였단 이야기와, 호구록으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응암굴 건너편 매화라는 마을 지명이 매의 화를 입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봄에도 무식한 나의 친구덜은 철 이른 봄날 어느 골짜기에 매화꽃이 만발하여 매화라 불리운다.는데, 그것이 아니라 매의 화를 입어서 매화라 불리며 또한 그 산은 정개산 <솥뚜껑 엎어 놓은듯 볼록한>에서 이제는 공식지명으로도, 어느 산행의 기록에도 절개를 지켰다는 절개산으로 바꿔 불려진답니다
강소사 부인이 지조를 지키려고 투신할 당시 적장도 이의 죽음에 탄복하고 그의 시신을 거두어 화장하고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주고 떠났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서는 잊혀지지만 지금 평창엔 일본관광객들이 단체로 그곳을 찾아온답니다.
그 후손들이 임란이 지난 400년후에도 그 전쟁을 미화하고, 침략전에서도 상대의 제를을 올려 주었다는 전사의 한 부분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이곳을 방문하고 있슬까요.
아니... 그 보단 그 왜구들 , 그로 인하여 발생되는 한 여인의 슬픈 이야기에 넋을 기리는 그 왜구들의 후손들의 참회로 보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야속하게 그들이 강소사 부인의 넋을 비는 참회장도 마련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아직 몰랐겠지요.
물론 그보단... 이 사실을 가장 먼저는 우리의 역사교육의 장으로,,,가치구현의 한 장으로 활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절개의 가치관은 시대를 초월하고 지역을 넘어서는 우리의 존재의 이유의 하나인 올바른 가치관의 모럴로서 우리의 삶의 귀감이고 후손에 물려줄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 꽃으로 자리매김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전 추운겨울 강가에서 그 묘소의 위치 판독에 고생하신 엄기종님, 이경진 님, 그외 모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어떤 주관의 모체기관을 성립하여 강소사 님의 비와 그를 모실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비각으로 ,,,그 분의 뜻을 알았으면 우린 지역의 후손으로 이제라도 그 분의 이런 뜻의 모뉴먼트 하나라도,,, 정표 하나라도 세우고 멀리 후손까지도 그 얼을 기림이 옳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강절부님은 강소사라 불리는데 광해군때 '절부'라 추승되어 절부로 부름이 예의의 높임이란 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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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절부 님이시여....'"
후세백작
님은 꽃다운 청춘에....
못다핀 꽃 한송이련가??
낙화암보다 더 푸른물에
한줄기 연꽃으로 피어남을
후대인들은
뉘라서
그 꽃의 아름다움을 모르리요.
님의 연닢은
절개산 아래 감아도는 사천강에서
언제라도 다시 맺을 꽃봉우리로
우리는
기다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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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전 노성제때 참가하신 나무귀인 직계 후손님...
일전 천동주민들의 진혼제에 감사하지만 그래도 그분의 후손들이 맨 처음 제향을 올렸으면 더욱 뜻 깊었겠습니다만 아마 일전의 연락들은 이미 평창에선 잊은 건 아닐지요?? 혹 이후로는 공무원들의 자리이동이 원인이 되어 잊혀졌는지요??
이 단절의 원인은 ""평창인에게 부침""이란 글에서처럼 가칭< 평창역사 보존, 발굴 위원회> 있었으면 그것은 문제될 일이 없었슬 것입니다. 평창문화원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나는 알 수 없답니다. 물론 얼굴 마담은 아닌듯,,, 평창아라리등 다채로운 행사를 주관하는 곳으로 알고 있지만,,,문화원 내에 각개의 분야별이 미약하다는 것은 아닐는지요.
앞으로도 강절부님의 제향엔 주관은 평창의 어떠한 단체가 되더라도 강소사님의 종친회와 유대를 맺고 제향의 우선은 종친분들이 향을 사르고 작헌 하시고 예의 절을 드림이 우리의 유교적 해석에 옮음이라 생각되어 집니다.
또한 임란때의 권두문 군수 아래 우리 평창의 선인들의 곧은 절개와 그 기상은 적과의 병력수에서 본다면 중과부적의 수 이지만 당시 권두문 군수는 앞으로 유린당할 주민들을 생각하고 君과 백성의 臣으로서 목숨을 바치는 충정의 각오로 임 하셨던 것입니다. 이 기상은 우리에게 또, 언제라도 충분한 귀감입니다.
권두문 군수 이하 평창 군민들의 그 우뚝한 기상은 그의 댓가로 당시 상리 송기산 지금의 활공장 위에 자연 동굴이 두개 있다는데 그 하나의 동굴에 왜구들이 평창인 250명을 생매장 하였다는 기록은 지금 평창에서는 잊혀져 있습니다.(아마 이 생매장 기록은 일제 강점기시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놈 시끼들의 보복 행위였슬지도,,,)
아마 혹독한 대가 였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평창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분연히 일어선 기상....
우리의 역사에 제 몸 하나 편코져 탐관오리들의 사대사상과 아첨꾼들의 짓거리가 난무하지만 군민의 생존권 보호를 위한 권두문 군수님의 충정의 기상과 그에 화합된 평창인들의 단결,,,,,
여타 현들의 현감의 마누라가 왜장의 소첩이 됨보다는 우리 선조님들은 일어서고 나아가 싸우자는 이것이 우리의 평창의 선인들의 큰 자랑거리 입니다.
<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노성제의 '천동리 응암굴 전투장면'
< 평창읍 하리 노산의 '임진왜란 전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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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참화와 백성의 도탄은 저의 아랫글들에 좀 그려져 있습니다.병자호란 시 청태종이 꽝꽝얼은 탄천에서 천막치고 47일 기다려 항복 받았겠습니까??만약 당시 이 후세가 청나라 군대의 분대장 쯤이라면 서울 양반가문 아랫목에다 막사를 쳐야...않 그렇겠습니까?
10만 대군이 그 추운 겨울 청나라 본국으로부터 군량미를 가져왔슬까요? 요즘처럼 수레바퀴도 흔치 않었슬 텐데요. 그들의 전리품 중에 부녀자들이 많아서 양반들은 심양까지 올라가 쌀 몇 가마씩의 대금을 지불하고 마누라 찾아오며, 세검정에서 목욕 제게하여 능욕의 때를 벗겼다는..그리고 주화론자 최명길은 요즘 양반들이 부인들의 능욕이 수치스러워 이혼을 많이 한다고 상소까지 하는 이율배반의 양반넘들,,,
이보다 더 슬픈 역사는 몽골군에게 항쟁이었지요.왕은 요즘은 다리 하나로 건너가는 강화도로 피난 가고,,,90년간에 걸친 몽골 침입에 ...우리의 노산성도 당시의 성으로 이해해야 할 듯합니다. 사가들은 그때의 고려 인구는 400만으로 추산하며 남, 여의 비와 ... 얼마나 고생스러웠슬까요. 몽골군에겐 항복하면 신민국으로의 자율을 주지만 대항하면 잔인하게 대한다는 사실을 우린 익히 알고 있는데, 당시 200만의 남자들뿐만 아니라 200만의 여자들도 90년간 최고로 많이 시달림을 받았으리라...(그래서 노성산의 성터는 그 이전부터 축조되었다 할지도 모르지만 몽고군에 항쟁기간에 수시로 피난을 하는 생활공간이었슬 것이다)
이때 세계적으로도 찬란히 우뚝설 우리의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웠습니다.지금의 수치로는 67m의 목조건물,,,지금의 아파트 높이로는 대략 30층 높이의 규모 목조건물,,,90년대 역사의 가히 세계적 문화를 그 몽고군들은 자기 나라에서보다 더 큰 건물이라 불태웠던 것입니다. 어디 히틀러도 파리를 불 지르지는 못했답니다. 이런 야만적인,,,
또한 왜구들의 성적(性的)인 개념의 무식은,,,,원래 임란때 까지의 통일 전의 일본인들은 여자만 집에 거쳐하고 길 가던 나그네가 아무 집이나 들어가면,,, 그래서 성씨도 개판,,, 일부일처제의 생활방식이 아니라 남자는 떠도는 식의 생활상이...아직 가정이란 테두리도 희박한 생활들,,
대동아 전쟁때에는 전 일본 여자들 중 2/3의 40대 여성까지 전부가 매춘으로,,,그 숫자는 천 육백만 명이라니... 전쟁에 나간 남자를 기다리는 예비 규수들이 매춘으로 돈 벌어 옥 반지, 사기그릇의 패물을 장만하였다는 일본 여성들,,,구린내 나는 똥치 문화란 점입니다.
일본은 경학의 학자들도 많다던데,,, 우리는 여유당 정약용 선생님만 4서 3경에 주석을 다셨다는데,,, 그래도 그들은 우리처럼 유교가 생활에 배어 들어가진 못한 모양이다,,,일본의 경학은 실제 이용의 가치를 발하지 못한 헛것의 학문이랄까... 이렇듯 전쟁이란 상식의 수준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지배로 당하는 자는 한마디로 비참하다는 말 이외엔,,,,이런 관념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권두문 군수님 이하 우리의 평창의 선조 분들은 인륜도 없는 왜적들에게 일만 4천대 관병의 70명과 주민들의,,숫자적 개념을 무시하고 침략을 분개하고 당연히 일어섰던 것입니다.
어디 우리의 3,1 운동도 태화관에서 지도자들이 이만한 용기가 있었습니까??나의 글 < 3,1운동은 어느 교회 지도자의 운동이 아닌 진정 시민, 학생의 운동이었다> 라는 글을 참작해 보면 임란 당시의 평창의 분개함도 진주 시민 운동 못지 않은 자주정신의 발로이며, 또한 군수로서는 시민 생존권 보호에 그 직분의 사명을 다하는 한 장면이었습니다.
이는 세계 전사에도 그 유래가 없으며 아마 나폴레옹도 그 용기에 혀를 내밀었슬 것이고, 맥아더도 이 전사를 알았다면 격찬을 아끼지 않았으리란 생각입니다.
임란당시의 부분적인 전사이긴 하나 정의와 또한 臣民의 임금에 대한 충정과 백성의 평안을 위한 권두문 군수님의 불사정신은 길이 우리에게 잊혀지지 말아야 할 교훈으로 남는 것 입니다.
끝으로 임란당시 평창의 권두문 군수님은 君을 섬기고 民에 목숨을 걸고 봉사하는 목민관이기에 그를 따르는 군민들을 규합하여 세에 상관없이 왜구의 불의의 침략에 당연히 대항하셨다.
이 글을 통하여 저의 어릴적 셍각에 노성장군이 무언가 하던 그 훌륭한 모습의 해답을 얻었습니다.오늘 저는 이런 용기의 당시 권두문 군수님의 직계 12대 후손 나무귀인님에게 이에 감사를 표합니다.
이는 임란사에 충정의 용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할 전시하의 목민관의로서의 의무와 사명감의 귀감으로 시대를 넘어서 앞으로도 목민관의 좌표로 지향하여야 할 민족의 얼임과 동시, 강소사님의 굳은 절개 역시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 할 동시 먼 후일에도 전해야 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이렇듯 우리 평창의 선조님들의 용기와 그 기상은 우리 평창의 앞날에 희망으로 용기를 불어주는 우리들의 표상이며 힘찬 전진에로의 원천이 되길 기원드립니다.
이것이 오늘 후세백작이 먼 옛날의 권두문 군수님을 대하여 이해하고픈 것이고, 평창을 바라보는 이해인 것이다.
**** 배경음악**********
* 쌍독수리 행진곡,,바그너가 참전한 연대에 군가로 만들었다는 쌍 독수리여,,, 쥐 새끼를 잡아라.
* 경기병의 서곡
* 와싱턴 행진곡,,,,, 오바마 취임식장에서 듣던 곡입니다
*백학,,, 코카셔스 용병들의 용맹한,,,,, 전쟁에나가 백학이 되어 돌아오는 ..
세계에서 가장 용맹하여 스탈린은 일찌기 그들을 특수부대로 편성하여 혁명에 성공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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