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의 루즈벨트 미 대통령에대한 한국의 100년 유감은
후세백작 2013.10.03 10:21
박 대통령은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을 접견하며 "역사, 영토 문제에서 자꾸 퇴행적인 발언을 하는 일본 지도부 때문에 신뢰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고 일본을 비판했다.
이에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 쪽바리 왈 "일본은 지금도 역사 문제 등에 관해 제대로 대응하고, 이해를 구하도록 설명을 해 오고 있다"며 "이런 노력에 대해 이해해 주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한국은 중요한 이웃 국가이고, 기본적인 가치관이나 이익을 공유하는 중요한 관계라고 생각한다며 " 계속해서 대국적인 견지에서 양국 관계를 확실히 조절해 나가야겠다고 본다"고 언급하며서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개별 문제, 또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반드시 함께 노력해서 양국 관계를 진전시키기를 바란다"고 찌껄 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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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중에서 발췌
이 말만 가지고서는 어느 외국사람이 듣는다면 후미오 외상 쪽바리 말이 건설적인 말인것 처럼 느껴질 것이다.
후미오 자슥,,,이름도 뒷 똥구멍처럼 뻔뻔스럽게 바로 이걸 노리는 것이라...이것 또한 훈돗시 자슥들의 얄팍한 외교술이 아니라 할수가...이해를 구하도록 설명을 해 오고 있다. 대국적인 자세에서. 반드시 함께 노력해서 양국관계 진전을,,,,이러한 말들을 현실적인 이해로 본다면, 우리가 말하면 발전적이고 생산적인 말이 될 수 있으나 쪽바리들이 찌껄이면 이는 양심을 가린 미친넘의 소리가 될 뿐이다.
후지다(후미오) 쌍 !네넘들 쪽 자슥들이 근세 우리 100년 역사를 말아 먹은것 잘 알고 말하는가?? 몇 푼의 양심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자세일까?? 이 넘의 양심이란 후미에서 똥구만 긁어 파는 넘이로다. 근세 100년의 우리 한국사엔 일본의 이 쪽발 짜식들이 지대한 손해를 끼쳤다.
누구나 잘 알듯 일제 강점기 36년이후 해방을 맞으며 이 해방에 요인으로 일본의 항복이, 요즘말로 일본넘 짜슥들의 출구전략, (이말은 경제용어이지만 원래 미국이 베트남에서 발을 뺄때의 개판이 되는 뜻의 비유로) 일본이 무장해제하고 항복하는 수순에서 네넘들 욕심때문에 간발의 차이로 평화로울 한반도가 아니라 소련 공산당의 개입과 분단으로 이어졌고 이로인해 6,25 민족동란이라는 내란과 지금까지도 우리는 분단의 아픔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 한국전쟁이란??
"6,25 민족동란"을 점잔케들 "한국전쟁"이라고들 표시하지만 이 단어는 너무도 웃기는 이야기이다.
6,25 동란이 국가간의 전쟁이었던가? 물론 남, 북이 유엔 동시 가입을 했다고 두 국가간의 전쟁 이었던가?? 좌파들이 북괴가 유엔에 발을 들여놓자 격상시킨 용어인데 6,25 민족동란 당시엔 유엔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6,25당시의 상황에서 용어를 사용함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이라 하지 그것을 "미국전쟁"이라 표시하지 않는 것과 동일의 개념이다. 따라서 "6,25 민족동란"으로 표시가 되어여 옳을 듯 하다.
거시기 후지다 쌍!! ,,,똥나발 같은 소리 하지말고 앞으로 내가 가르쳐 주는 역사 공부 좀 하시게나.....38선은 누가 만들었는가?? 아래에서 이 물음의 한마디에 당시 역사상황을 전부 공부하여 본다. 지금까지 미안하게시리 38선은 내가 만들었오, 하며 손들고 나오는 역사서는 하나도 없으나 나의 이야기는 미국 32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얄타회담에서 2차대전의 승리로 독일 파쇼의 저지를 위해 소련 공산당을 끌여 들였던 점에서부터 시작해 본다.
얄타회담에서 처칠의 설득으로 스탈린은 소련군대로 하여금 독일 동부전선을 침공하고 이로서 서부전선의 연합군은 노르망디에서 벌지전투등 고전에서 구원의 손길로 5월엔 독일이 항복하게 된다. 또한, 일본 항복을 위해 스탈린에세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소련으로 하여금 일본전에 참가를 바라며 그 댓가로 러,전쟁당시 뺏긴 소련의 영토회복등 여러 사안중에 한반도는 북한을 나누는 통치하자는 언급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반도는 그냥 통일 국가로 정치에 고문을 두자 하면 될일을 나누어 가정교사를 하자는 식으로 루즈벨트는 한반도를 쏘련의 연합국 가담을 위해 약 발라 먹은 것이다.
<여기서 아예 루즈벨트란 이름의 미 대통령 두넘에 대하여 숙청을 하고 넘어가자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밸트와 32대의 플랭클린 루즈벨트 두명이 있는데 이들은 12촌 간의 네덜란드 계이고 루즈밸트 한 넘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하라고 나누어 먹기 한 넘의 대통령이고(데오도어 루즈벨트)또 한 넘은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공산당이 38선을 넘어 들어오라고 소련 공산당에게 길을 터주어 분단이 된 것으로 이 두 넘의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이 우리 근세 100년의 역사를 기울게한 장본인이다. 이점에 관하여 아래에서 기술한다.
물론 이 두명의 대통령은 정치성향의 가문에 하버드 출신에 수재로 엘리트 교육과 그들의 대통령직 수행에 미국인으로는 더 바랄것 없는 능력을 과시한 미국의 힘과 자랑의 훌륭한 정치가이지만 이 두 넘다 공히 한국 100년사를 물말아 먹은 넘들이다.
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0년 초에 우리 개화기 시절의 일본이 한반도를 요리하고 미국은 필리핀 구워 먹겠단 밀약의 까즈라 - 테프트 조약을 가지며 비밀 조약을 가지며 루트-다카하라 조약으로 까즈라-테프트 밀약을 재확인 사살한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일제 강점기 36년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32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2차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고 또한 V.T.A(테네시강 유역 개발 사업)등으로 대공황을 타계하며 미국을 초 강대국으로, 오늘의 패권국 자리로 부상시킨 자랑스런 미국인 이지만 그는 자유진영 라인에서 조선을 배제할 수 있는 등 일본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의 인물이다.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이 루즈벨트에 대하여 아주 대단한 인물로 배웠다.그에 비해 트루먼은 反한적이고 맥아더와 상반된 견해로 우리로선 중요한 시기에 맥아더를 보직 해임시킨 무능력한 늙은이로만 느껴 왔으나 우리의 역사교육이 편견적이랄까?? 트루먼은 반공을 기치로 공산화를 막고자한 노력으로 한국을 버리지 않았으며 6,25가 발하자 그는 곧바로 재빠르게 유엔군을 창설하며 선발대가 창설 이전에 들어와 공산군을 저지한 것이 낙동강 전선이 최후의 보루가 되었지만 만약 루즈벨트 같았으면 시기를 놓쳐 낙동강 전선의 워커라인을 형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한국을 버렸슬 것이란 가상의 이유를 아래에서 다시 쓰며 또한, 트루먼 독트린으로 한국을 샘플로 재건하려 하였다.
우리는 트루먼 독트린을 잘못 배웠었고 맥아더와 트루먼의 갈등에 우리는 맥아더에게는 아쉬움을 느꼈지만 나는 일전 어느 멘트에서 맥아더를 평가절하 하였었다. 그것은 좌빨과 같은 논지가 아니라 트루먼의 정치와 그의 입장에서 세계사 정책에 이해로 볼때, 즉 만주에 다시 핵을 던질 수 없는 난제등으로 보아, 그에 핵심으로 누구든 자기 이름으로 만주에 다시 핵을 쏠만한 명분과 그로서 중공군을 이기겠단 계산등으로 볼때 미국 정책에서 보면 맥아더는 이러한 맥락과 흐름을 이용하는 지혜는 없는 그는 용장이나 지장은 아니라는 해석이었지 나의 생각은 좌빨들과 동일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32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당시인 41년 진주만 기습 이후 독립운동가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승인해 줄것을 요청하며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제의 했으나 조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한다.이후 이승만은 여러번 미 국무성을 찾아갔으나 만나주지 않았으며, 45년 전후 유럽문제에 관하여 소련이 북 유럽 여러나라들을 통합 하거나 지배할 수 있다고 주변에서 이야기 하자 루즈벨트는 스탈린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따라 그는 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나와 함께 평화를 위해 일할 것이라 하였다.그리곤 스탈린에게 "한국인이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 간의 수습 기간(apprenticeship)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이에 구두로 동의를 표하였다.
전쟁을 속히 종결시켜야 된다는 판단에서 반공주의 인사들의 반대에도 그는 소련에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8,10일 일본은 항복의사가 있음을 구두로 맥아더에게 전해왔고, 그는 소련을 참전시킨 것을 후회한다.... 인터넷에 이러한 문장이 수두룩히 있는데 이는 오류이다.
루즈벨트는 45년 2월 얄타회단이후 소련 공산당을 끓여들였다고 비난 받았다. 그리고 그는 얄타에서 소련의을 개입시킨 것을 후회하였다. 루즈벨트는 4월에 백악관 내에서 하인과 산책하다 뇌출혈로 사망 하였다. 위 인용문장을 보면 이를 마치 원폭이 떨어진 후 루즈벨트는 후회한 것처럼 애매모호한 글이기 때문이다.(그러니 원폭이 떨어지고나서 후회한게 아니라 원폭이 떨어지기 전에 사망한 것이다)
4선의 루즈벨트는 4선 재임 두달 반만인 45년 4월 지병으로 사망하였고 후임으로 부통령 트루먼이 33대 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승계 하였다. 대통령이 되고 5월엔 독일이 항복하였고 7월 17일 부터 13차 포츠담 회담이 열리는데 포츠담 회담 이전부터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물론 루즈벨트가 대 일본전에 부담으로 작용한 것은 아직도 만주나 중국에 500만 일본 정규군이 버티고 있기에 대일전에 승산에는 자신이 부족했고 그래서 소련의 연합국 가담을 원 하였지만,,
루즈벨트란 넘은 머리도 똑한 대통령이 무슨 근거로 우리가 40년간 수습기간이 필요하단 헛소릴 까는지?? 또한 그는 필요하다면 일본라인까지만 생각하고 조선은 버릴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이야기는 이로서 후일 모스크바 3상회의를 거쳐 신탁, 반탁의 싸움으로 번지는데 계기를 만들었던 점이다. 스탈린은 독소전쟁당시 스탈린은 독일군의 거점에서 반경 40km내의 모든 집들을 불태우고 후퇴하는 자는 사령관까지도 총살형등으로 오직 승리만을 위해 자국민을 2천만 넘게 죽이는 전쟁을 치르며 승리하였다.이렇게 그가 생각하는 대의를 위해 무자비하게 버리며 선택하였듯이 루즈밸트는 40년간 수습의 위탁정치가 필요한 미국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댓가가 많이 필요하단 생각이다.
소련과 중국에 인접한 조그만 반도에서 공산당과 대치해서 40년간 조선을 지켜주기보다는 그를 버리고 차라리 바다로 갈라서 그들과 대치해 공산당을 차단함이 쉬이 경제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 것 아닐까 유추해 본다그들은 위의 독소전쟁 당시의 스탈린의 행동의 인용의 예처럼 작은것도 존중하는 정의보다는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을 감수 하겠다는 자국의 실리만 챙기려는 매우 그릇된 발상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32대 프랭클린 대통령은 자국에선 우상이지만 우리가 보면 매우 이기적인 나쁜 넘이다. 위의 한국은 버리고 일본라인까지란 생각은 40년 수습기간에 미국으로서 그 지원은 비 경제적이지 않을까하는 혼자의 생각으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한 것이다.
우리는 이 넘이 조선에 대한 생각에서의 편견때문에 일제 강점과 얄타회담에서부터 해방과 6,25 동란등 오늘날까지 분단으로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넘의 루즈벨트란 이름의 똑똑한 미국 대통령들은 나의 뇌리속에선 우리나라로 볼때엔 좋치않은 기억으로 입력되어 있다.
46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극동 아시아의 대일전에 소련을 끄잡아내어 손을 잡음으로서 공산주의 출구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해 7 월엔 포츠담 회담시 루즈벨트다음으로 트르먼이 맨해턴 계획이 완성단계에서 소련을 배제하고 처칠은 노동당의 애틀리로 교체되었는데(영국사람들은 1차대전이나 2차대전때도 처칠을 원했고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해 5월에 독일이 항복하여 전쟁은 이겼으니 이제는 전쟁의 영웅 처칠은 뒤로하고 재건하여 먹고 살자는 영국인들의 실리에 보수당보다 노동당의 애틀리를 수상으로 만들었다)
일본라인까지만 생각한 점의 이해를 위한 나의 생각을 피력해보면,,
1900년 초의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플랭클린의 처 삼촌으로 프랭클린은 우리말로 동성동본 결혼자이다. 그럼 여기서 32대 프랭클린 루즈밸트와 2차대전 당시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기술해보면,,,
태평양 전쟁의 종전을 위해서는 소련의 대일전의 참전을 원했고 이의 댓가로 러일전쟁당시 일본에 뺏긴 소련의 영토의 반환등을 약속하고 또한 미,소가 38선을 분할하게된 원인을 아래의 글을 인용한다.
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
< 아래는 김구 선생의 증언이란 38선에 대한 아주 중요한 글을 그대로 스크랩 합니다>
http://blog.daum.net/mit_dol/1073
出典 :「북한 악마의 조국」(박갑동 저、구성?이따가끼 에이껭、KK베스트셀러즈)
<분할의 배경에 있었던 일본군의 생각 >
나는 해방후 중국의 중경에서 돌아온 대한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에게 왜 조선이 미ㆍ소 양군에 의해 분단 점령 되었나 하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대한임시정부는 1919년에 상해에서 조직되어 중화민국의 지원을 받아 항일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
김구 주석은 내게 분의 경위를 중국의 첩보부한테서 들은 이야기이지만 이라는 전제를 하고서 다음과 같이 설명 하였던 것입니다
전전조선군(일본의 조선 파견군)은 제19사단(나남)과 제20사단(서울의 용산)의 2개 사단으로 조선반도를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관동군은 훨씬 북쪽인 만주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얄타회담에서 소련군이 대일전쟁에 참가하여 승리한 경우 관동군을 소련이 조선군을 미국이 각각 무장해제 한다고 하는 밀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일본의 스파이가 냄새 맡았고 그것을 안 일본 육군은 관동군의 수비지역을 38도선까지 남하 확대시켰던 것입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고 나서 소련은 미국과의 조약에 따라 관동군의 무장해제를 할 권리가 있었던 연유입니다. 그래서 조선반도에 소련군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미ㆍ소의 대립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일본군의 전략은 매우 강력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어떻게 하더라도 질 수밖에 없었지만 미ㆍ소를 싸우게 하려 했던 것이니까 관동군이 수비지역을 남으로 확대한 것은 미ㆍ소의 충돌을 예견했기 때문이고 일본군의 참모급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 입니다 . 그러나 조선에 있어서는 다음에 올 불행의 실마리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항복하더라도 일본군이 일주일 전에 항복했다고 하면 소련군이 만주나 북조선에 침입하는 일는 없었을 것이겠죠
소련은 1945년 8월 9일 참전하고나서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8월 6일의 단계에서 일본이 항복했다고 한다면 소련은 조선의 통치에 관여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에 있어서도 나가사끼에 원폭을 떨어뜨리게 되지 않았을 것이고 조선도 불행한 50년을 걷지 않게 되었을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패전을 맞고 조선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북조선은 스탈린의 망령 그리고 김일성의 망령이라는 악마에 둘러싸여 고통받고 있는 것 입니다 .
(스크랩분 끝)
HHHHHHHHHHHHHHHH
위의 인용글에서 일본군은 얄타회담 정탐으로 관동군을 38선까지 남하, 자연 관동군을 접수하는 소련군이 38 선까지 점령하는 원인을 사서 만들어 준 점이다.
트루먼은 반공의 신봉자로서 태평양전쟁에 소련의 참전을 8월 15일 깃점으로 정한 얄타회담 이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으려 일본 본토의 약 6-70개 도시 전체를 매일 B29 비행편대가 공중강타,, 남아난게 없는 상황이라 항복을 전제로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속에 원자폭탄 개발의 미, 영, 캐나다 공동의 맨하탄 계획이 성공단계에 접어들며 포츠담회담에선 공산당의소련을 배제하고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 3인이 7월 17일 포츠담 회담을 개최하고 일본의 항복은 이제 시간문제라며 포츠담 선언으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항복의사가 있어 몇 차례 비밀 회동을 가졌는데 교조천황이 걸림돌이란 문제의 핑계로 시간벌이인듯,,그것이 문제라면 전범으로 사형을 못할때엔 사마천처럼 거세하면 될게 아닌감?? 아마 당시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를 받을때 맥아더대신 후세 본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면 천황을 불러눞히고 거세를 감행하였슬 터인데...천왕이라니...하늘에 왕이 아니라 게다짝 끌고다니는 쪽발들 왕이지...그런 언어도단이 또 어디 있는감??
군국주의의 종식이란 천왕에게 전범재판 이전에 사형이 가해져야 그것이 무리라면 파쇼의 국권의 상징을 거세라도 시키는 방안도 좋을듯 하나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폐허가 된 일본을 신속히 재건하여 소련 공산당에 태평양 가림막을 (방어선)을 형성하고픈 내막일지 몰라도 일본을 우방으로 만들려 하였기에 천왕을 똥강아지처럼 다루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반공을 모터로 트루먼은 소련을 따 돌리고 포츠담 회담을 하였지만 한편으론 일본 군국주의에 부담을 받는 것은 과연 이들을 제압하고 민주주의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슬까 하는 과제가 부담으로 소련을 포츠담 회담에 가담 시키고 이로서 소련은 일본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에 스탈린이 추가 서명하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어떤 글은 포츠담 회담이 미, 영, 중 3국이라하며 또 다른 곳들에서는 미,영, 소련의 3국이라고 정확치 못하고 베낀 이가 알지도 못하고들 베낀 것들이 대부분이다)
<일본에 한 방 떨구는 미국>
한방이란 당시로선 원자폭탄이란 이름을 모르기에 그져 한방이란 표현을 썼던 것이다.
쪽바리 일본놈들 블로그엔 원폭을 한방 먹던 상황을 어떻게 썼슬까?? 반성식을 써야 점잖켔지만,,,그넘들 아성이..나는 이 원폭투하의 역사적 사건 현장을 간략하게나마 그대로 스케치 해본다. 얼마나 통쾌한가 보자.물론 희생자의 뼈 아픈 통곡은 있었지만 오만하던 쪽발들,,
독일도 항복했지만 일본은 대동아 전쟁에서 패하여 축소되었지만 아직 만주와 중국에 500만의 훈돗시를 찬 일본군이 아직 남아 있기에 프랭클린도 희생의 감수에 소련을 끌여 들였고 조선의 희생정도야 대의를 위해 버리겠다는 생각과 트루먼도 이 500만의 정규군이 상당히 거북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마 이점이 트루먼으로 하여금 자기 이름으로 원폭을 투하하게 한 투루먼은 진정한 용기 있는 자란 생각이 든다.
얄타회담이 13차 까지 가는 동안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자폭탄이 개발 되었슴을 사석에서 알린다. 이것은 후일 소련의 항의를 무마키 위한 포석이었으며 그 사이 미국은 원폭 투하도시까지도 선정하는데 1위 도시인 도쿄는 배제된다. 이는 종전후 일본을 우방으로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계산이었고 그외 6개 군수도시들이 선정이 되었고 8월 6일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란 60Kg의 원폭이 B29의 에놀라게이호외 2대의 편대가 서 태평양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달러를 벌기위해 다랑어잡이 원양어선이 나갔고 박통께서 현지시찰까지 다녀오던 서사모아의 마리아나 군도의 티니안이라는 작은 섬의 기지를 출항하여 6시간만에 이른 아침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하였다
히로시마 방공망에 적기 출현 싸이렌이 울리고,,, 허나 매일 공습이 있었는데 오늘은 3대의 비행기가 출현하였는데, 이렇게 작은 편대가 공습하려는게 아니라 그냥 지나갈려는 모양이다라고 판단하곤 기름도 아까우니 전투기 출격을 자재하고 공습경보를 해제하였다.
이때 B29편대는 목표물 1만미터 상공에서 원폭을 투하 40초 정도 떨어지며 지상 500m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300도의 고온으로 그 자리에서 7만명이 죽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후폭풍과 낙진등 합 20만명이 죽었다.그런데 그러고도 일본은 항복을 하지 않는다. 그런놈들이 천왕이 하고 운운하긴...
이런 알지도 못하는 폭탄 큭개 한방 떨어졌는데도 그 독종 쪽발넘들은 항복을 하지 않았다.( 당시는 원폭이라 알려지지도 않아서 징용갔던 분들의 말을 빌면 큰거 한방이란 마치 놀음판에 쓰는 말 같은 표현을,,)
물론 이때,,, 히로시마의 원폭이 투하되며 히로시마의 방송은 꺼졌고 토쿄에선 무슨 일인가 영문도 몰랐다 한다. 그러나 첩보질 잘 하던 쪽들이 상황파악을 했으면 재빠르게 7일날 무조건 항복을 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지금과 크게 바꾸어 졌슬 것이다.
쏘련은 이를 눈치채고 재빠르게 대일전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일대의 일본군을 공격했다는데 해봤자 그건 진지상에 원님 젓가락 들기 전에 먼저 파리가 입맛 다시는 격이었다. 왜냐면 소련은 아무것 한것없이 대일 선전포고로 일본이 무장해제하자 조선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는 젓가락 질만 먼저 했던 것인데. 이때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오끼니와 전투에 주민들 9만을 희생시키며 일본 본토에도 진격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가상은 7일날엔 대일 포고문을 띄웠었으면..
" 나, 트루먼은 어제 8월 6일 히로시마에 큰 선물을 보냈는데 일본 천왕은 부랄을 까고 무조건 항복치 않으면 다음은 토쿄 시민들에게도 그동안의 고생스런 전쟁에서 이제 편히 쉬게 하노라"라는 협박을 했으면 쪽발들속에 항복파는 이유를 근거로 거세게 천황 빤쓰를 벗길 수 있는 구실을 만들지 않았슬까 라는 생각이다
<그넘들 말로 천황이라 하는데 황제란 전여, 왜곡, 황제의 3황 5제의 중국 전설속에 신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마지막 하늘의 인물이 황제인데..쪽들은 인간들의 왕이란걸 배제하고 천황이라고 신의 아들이라고 푼수떠는 것이다, 자석,,기모노 베게아래 성씨도 구분없이 맹글어진 인간들이 일본 아닌감??...>
이로서 곧바로 다음날 히로시마에 도착한 군인들의 보고를 받고 곧바로 7일날 항복했으면 8일날 소련의 대일전 선전포고와 연합국 가담으로선 38선 이북의 요리의 명분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겐 38선이란 분리는 없었슬 것이다.
원폭을 투하한 것을 아는 스탈린은 잽싸게 소련군을 연합군에 가담 시킨다.그리고 쪽바리들은 한방에 영문도 모르고 어안이 멍멍할때 9일날 나가사끼에 또 큰거 한방 맞게 된다. 이는 미국이 소랸의 가담 방지가 한발 늦은 것이다.나가사끼의 원폭은 쪽바리들의 오만으로 항복을 하지 않았기에 이에 댓가이며 그렇기에 나가사끼는 미국이 아니라 쪽바리 동족을 탓해야 하는 것이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시 버섯구름 나가사끼 원폭 투하시 버섯구름
(그럼 나가사끼 원폭투하의 장면을,,)
일본은 6일날 히로시마에 원폭은 원체 타격이 큰지라 미국은 다음 타격까지에 항복을 기다리는 사이 8월 8일날 소련은 서둘러 대일선전포를 하였으며 이로서 태평양 전쟁에 연합군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숨쉴 사이도 없이 미국은 두번째로 팻맨이라 명명한 플루토륨 6kg의 원폭을 나가사끼에 투하한다.
원래는 고쿠라에 투하할 것이었는데 기상악화와 또한 이로 인해 한대의 비행기는 육지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재 집합이 지연되어결국 합류를 못한채 이미 고쿠라는 70%의 시계가 가려지고 대체지인 나가사키로 선회. 여기도 구름이 가려지면 결국 돌아가다 오끼나와 바다에라도 버려야 할 상황도 생기는데,, 나가사낀 예비 후보가 원폭을 맞았으니 참으로 재수없는 곳이었다.
나가사끼는 대체지로 결정되었는데 그곳도 구름이 조금 더 끼었더라면 나가사끼도 목숨부재가 되었슬텐데..이로서 히로에 14만 나가사끼에 6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일본은 14일에 항복의 소식을 전하며 15일에 천왕이란 자가 앵무새같은소리로 항복의 전파를 흘려보낸다.
그래도 사무라이라는 그들의 왕이라면 항복할때도 왕실앞에 훈돗시 복장으로 나가 무릎을 꿇는게 얼마나 멋질까?? 삼전도와는 다른 영상을 재현 하였슬텐데,, 쪼다리 왕, 아쉽게도... 쪽바리 이 자석들,,, 항복하랄때 항복 했으면 소련은 포츠담의 약속에도 아무런 한 일없이 무슨 댓가가 있슬까..
8일날 대일 선전포고뿐,, 그넘들은 파리새끼처럼 날라와 진지상에 젓가락 먼저 들고 앉았을 뿐... 쪽바리 새끼들이 한 방 맞고도 질기게 끝까지 버텼기 때문에 결국 소련이 차고 들어와 그때서야 항복하니 소련군은 만주 관동군이 38선 섹터까지 주둔한 지역을 몽땅 관리하게 된 것이다.(위의 김구선생의 증언)
만약 쪽 자슥들이 히로시마에 한방맞고 다음날 즉시 항복하였으면 38선이란 생기지 않았슬 것인데 독종넘 새끼들,,히로의 원폭은 떨어질때 한 자리에서 6만이 3,000도의 열과 파편등으로 몰살되고 다음날 핵진의 방사능등으로 계속 죽어가는데도 항복을 하지않고 버텨볼려다 소련군이 참전으로 우리는 지금껏 분단의 역사를 가지게 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북한과 전쟁을 한다면 공산당 핵심 주류만 눌러 이기면 될 것이지만 이 일본과 전쟁에서 이기자면 한넘도 남김없이 이 잡듯이 싹 쓸어야 이긴 것 아닐까? 이 쪽 자슥들의 이런 승부근성의 속성이 오늘 우리의 대일의 정치, 경제등 모든 부분의 수면아래서 내제하고 있다는 생각을 잠시라도 잊으면 않 될 것이다 .
이것이 지난 역사에 대한 후세백작의 생각 입니다.
박정희 대통령깨서 항상 말씀하시고 언제나 준비 하시던 자조, 자립, 자주국방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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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중, 고등학교 22,25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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