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내리 마현마을,,, 정약용 생가에서,,,]
이곳은 정약용의 생가로 뒷산에는 그와 부인의 합장 묘와 마당엔 실학박물관과 그리고 그 앞들엔 팔당호반으로 넓게트인
호수 주변은 다산 생태공원으로 가꾸어져 있다.
사람들이 위인을 꼽는다변 세종대왕, 성웅 이순신등을 먼저 꼽을 것이다.
세종대왕의 업적과 그의 한글 창제는 감히 흉내도 못낼 백성을 위한 사명감에 이룩한 업적으로 길이 명군으로 남아야 하지만,
또한 성웅 이순신의 세계 전사에 찬연히 빛나는 그의 업적, 수와 세의 열세에서도 하나하나 준비하는...
세가 열세이라면 그저 나,당 연합군처럼 남의 힘을 좀 빌면 되지 않을까??
우리의 이러한 사고의 첫째는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군대와의 합작인 나,당 연합군이 신라의 붕괴를 막기위한 것이라면 그야
호구지책의 방어라 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백제를 치기위한 계략이었기에 김유신의 사대적인 사고는 나쁜 것이라 지적한다.
얼핏 우리는 가끔 이러한 나른한 사고를 유발하지만 성웅 이순신에겐 그런 예외는 없다.
아니, 그의 일생에 예외란 조항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준비하는 것, 그것이 이순신과 우리 범인과 차이인듯 하다.
우리가 그에게서 본받아야 할 첫째 항목인 것이다. 이렇게 이순신에겐 위인으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품목도 많다 하겠다.
그러나 위의 위인들에겐 시대적인 난세의. 또한 만 백성을위한 군주로서의 과업으로서의 명제가 전제된다면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러한 조건도 명제도 없는 가장 불우한 시기를 통하여 그의 업적이 지금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담이
아니라 우리에게 미래로 가는 희망의 등불을 비춰주고 있다는 점이다.
정약용에게는 사방에서 죽음이 엄습해 들어오지만, 귀양지에서도 정적에 대한 원망보다는 부지런함과 근면함으로 학문을
대하고, 또한 이러한 시름속에서도 그가 위인의 대열에 오르기까지엔 그로서는 특수한 업적이나 특이한 행동, 또한 그 어떠한
동기부여의 조건의 명제도 없었다.
이렇게 그에겐 위인으로 가지는 그 어떤 특별한 행위의 목적도 없었고, 또한 우리에게 그 얶떤 특별함을 선사하는 것도 아니다.
귀양지에서 할 일도 없었겠지만 그는 그저 한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고 평상심으로 대한 점이다.
어찌보면 당시 사회는 학자보다는 과거의 패스에 의한 벼슬만 치중하던 사회에서 기타 여러 학문이나 문학은 귀양지 문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에게도 귀양지에서의 행동의 억압과 많은 시간이 주어지는 시간적으로는 행운같은 요소도 따랐지만 범인으로선 이러한
소화력을 갖지 못하는 것이 그의 특별함으로 어려운 환경과 시련의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먼 후일, 오늘까지도 그리고 먼
미래에까지도 영원한 등불로 우리의 지표를 밝혀주는 진정한 모습이 나에게는 한번쯤 만나고 싶은 위인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사진들은 오늘 날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올해엔 지금까지 약 2천km 자전거를 탔다. 어제도 중앙선의 마지막 전철역 용문까지 가서 돌아오는 편도 라이딩을 하려는데
날씨가 흐려 비를 만날듯하여 양수리에서 유턴하여 능내리의 실학박물관으로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 마현마을에선 산줄기가 우측으로 굽는데, 위 사진에서 보면 운길산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용이 정약용의
생가 앞에서 멈추어 입수되는 형상이다. 바로 이 지점인 집 뒤에 동산에 올라 그의 묘를 잡았는데, 후일 지관들은 이곳이
명당과는 무관하다고들 한다.
아마도 지관들의 논리엔 이 묘는 사성에 입각치 못하는 묘소라 할지는 모르겠으나, 운길산에서 내려오는 용이 바로 그의
집 뒤에서 물을 만나 멈추는 형상으로 이를 측면에서 보면 마치 능의 봉분을 쌓아올린 형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칭들,,, 살구실 상규네집 윗 산에도 마치 묘의 외곽선같은 산 자체가 이러한 작은 봉분의 형상을 볼 수 있다.
또한 선생의 묘소는 마치 수덕사 뒷산의 남연군 묘처럼 입수되기전 뱀의 또아리첢 힘을 주며 봉긋 올라온듯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어이.. 칭들,,, 아마도 평창에 명당 풍수에 대해서 나 따라올 사람도 없슬듯하지만 이 묘의 풍수적인 견해는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삼가하나, 명당이란 음택의 길지로 꼭 4성에 입각해야만 하는 지관들의 명당론의 풍수 이론서에 적혀있는
교과서적 명당론만이 명당만은 아닌듯 하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지고 풍수의 명당론도 바뀌는듯 하다.
어느 시인은 자기 생가 한편에 묘소까지 있어서 이곳의 방문객은 이 시인에 대하여 더욱 애정의 사랑을 보낼 수 있다한다.
아니, "메밀꽃 필무렵"으로 잘 알려진 가산 이효석 대 선배님은 그의 유해가 다시 봉평으로 옮겨진다는데...
물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지만 이제는 우리도 서구방식을 따르는듯 하다.
옛날에는 개마고원지나 갑산에 군수라도 한 자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 그는 죽어서도 칠성판에 군수 누구누구 하고
쓴다. 그러나 칠성판 속에 쓴 글귀를 후일에 누가 알아주고 반겨 줄 것인가??
서양에서는 죽어서도 그의 고향보다는 군수를 하고 선정을 베푼 고장에 묘를 쓰고, 후일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정약용 선생의 묘를 쓴 지관은 풍수를 모른다는 것보다 오히려 풍수가가 풍수 이상을 넘어서는 행위를 하기란
참으로 신선한 일이라 하겠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실학사상과 정약용 선생의 노력의 일대기와 아울러
그의 묘소까지 방문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한 즐거우랴...
그러기에, 이렇게 묘터를 잡은 풍수가는 먼 후일의 안목을 가진 풍수가임엔 틀림없고 또한 이곳이 명당임엔 틀림없는
것이다.
선생께서는 시대를 넘어서는 사상과 교육관으로 우리의 앞길을 밝히고 있다.
한 나라의 기강과 모범은 대통령이 아니라 대 학자가 우선하여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겐 학자들도 많치만
근대를 지적하고 앞길을 밝히는 선생의 가르침은 여러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또한 먼 후일까지도 꺼지지
않는 등불로 우리의 지표를 영원히 밝혀 줄 것이다.
-----------< 아래의 사진 한장>--------------------------------
실학박물관 둘레에 명문으로 새긴 조각들을 지나다 언듯 본 글귀 한 점을 사진으로 찰깍.
선생께서는 가족으로 두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이미 그들은 대역죄인 아들이라 과거를 응시하는 출세의 길은 막혔지만
학문을 외면치 않아 첫째 "학연"은 명의가 되어 아버지를 귀양보내던 당파의 수장들의 목숨을 구해주는등 소문이 자자하자
정약용은 아들에게 이를 별미로 그들에게 구차하게 나의 구명운동은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지만 유배 18년만에 그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사망하고 유배 20년째에 그는 가까스로 그의 구명의 영향인듯, 항소가 받아들여지게되어 해금되어
귀양살이 2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또한 둘째아들 "학유"는 우리가 익히 아는 "농가월령가"의 저자이다.비록 관에 입문하진 못하지만 그들의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이러한 노력들,,, 멀리 유배지에서도 두 아들에대한 교육을 게을리 하지않은 탓이라 할까??
아래의 어떤 조각의 명문에 보면...
"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햇으니, 오직 정신적인 의미의 두 글자 근(勤)과 검(儉)을
물려줄터인즉,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고 일생을 다 써도 닯지 않을 것이니. 이제 이 두 글자를
마음에 지녀 가난에서 벗어나고 잘 살기위해 이제 이 勤과 儉을 물려주겠다." 라는 동암에 기거시 쓴 편지를 볼 수 있다.
서양의 르네상스를 출발시킨 메디치 가문도, 우리의 만석꾼들도 부자 3대 못간다는 말을 넘어서지는 못한듯 하다.
하지만 선생의 말씀대로 이 勤과 儉은 富의 가장 원동력 아닌가 한다.
위 사진은 정약용 생가앞 팔당 호반의 "다산 생태공원"이다.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아래의 사진들은 양수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끝부분의 공원으로 이 두 공원의 특징은 한강 상수도
보호구역내이기에 지극히 제한적 시설만 가하고 자연 친화적이다.
쑥부쟁이와 조팝낭그 꽃이 산개한 아래의 들판엔 버드나무의 능수버들 아래 벤취엔 꼭 선남 선녀들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인가??
나도 한번 벤취에 앉아 쉬고 싶지만,,, 끌씨... 난 따라지 땡이라서,,,
남 부럽지 않을만큼 자신있는 칭들 있으면 한번쯤 놀러오시게나..
아이... 물빠진 마누라면 어때??
쑥부쟁이 숲속의 쉼터에 자리펴고 하늘을 천정삼아 한잠 때린다면,,,,
천정 제일 높은집에 세상에 무엇이 더 아쉬울까 하노라.
옛날 제천역에서 밤 한시반 완행열차에 오르면 청량리행 본 열차는 출발 합니다.
열차는 덜그렁 덜그렁,,,봉양을 지나 원주, 간현, 용문을 거쳐 새벽 동이 틀무렵에 어느 이름모른 간이역에 도착하였다.
아직 까만 마을엔 새벽 온돌 달구기 위해 굴뚝엔 하얀 연기만 피어오르던 그곳이 능내리 역이었다.
지금은 전철화로 역이 폐쇄되고 역실 그대로의 기념관과 화장실만 업무된다.
그런데 이제는 아마도 이곳 능내리가 우리나라 싸이클 명소중 제1메카인듯,,,
일욜이면 싸이클족들의 간이 휴식처로 잔 막걸리 한사발이 젤 인기있는 돋떼기 우시장만큼이나 복잡한 거리가 된다.
그렇다, 싸이클은 차에 해당되면서도 막걸리 한잔 음주를 할수있다.
또한 스포츠이면서 하이킹이란 장점들....
위 사진의 도표에서 보면 부산 을숙도 국토 종주 종점까지는 550Km이라는데 규정속도 시간당 20Km로 환산해 보면
하루반의 시간이라 아마 3일이면 쉬어서 가는듯한,,,,
인생 육십갑자 한바퀴 돌아드는데 얼만큼 더 살라고 운동하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숙명적인 대 명재는 죽음이다. 인간 역사상 어느 누구 단 한명도 이 명제에 예외는 없었다.
과연 지금 죽는다면 이의는 없는가 스스로 자문해봐라...
운동이란 장수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그것은 천수라,,,
하늘에 뜻에 따른다 치고 운동이란 사는 그날까지 건강하게 살자는 것이다.
벼름박에 똥칠하고 사는 인생은 사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죽는게 무얼까?? 나로서는 이 죽음의 두려움이란 없다.
다만 그간 내 생각을 집대성해야할 월정사 8각9층석탑에 관한 나의 다른 생각들,,,
그리고 평창아라리의 의미와 제 문제들,,,
이에는 아리랑의 원류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선행되어 표현이 되어야 하는 어려움도...
아마도 근대 서양의 의심학파들처럼 기존의 인식과 실상의 허구에 가려지는 원론을 탐구하려는...
엇그제 어느 댓글 멘트에 나에 정선 아라리의 원류를 이해 못한다나??
코묻은 소릴 하시는데?? 아마도 그치는 나만큼도 정선 아라리를 이해하고 있슬까??
그럼 다음 글에서 정선 아라리의 이론적 근거 7현이 불렀다는 "도원가곡"의 제문제에 관하여 의문의 문제를 드릴테니
그에 답을 하시오,
.다음 글에서 분명 정선아라리의 이론적 근거중 하나인 도원가곡이 아리랑의 시원이라 하는데 분명 이 "후세백작'은
그를 속 시원하게 성토해 줄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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