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악의 비로(으뜸)은 뭐니해도 십이선녀탕 아닐련가?? ]
지난 휴일 새벽 경춘고속도로로 강원도를 향하였다.
중첩된 산 자락 사이로 빗장을 꿰 뚫는 느낌의 산간 고속도로로 밀려오는 안개속의 산세들 속의 드라
이브는 또 다른 맛이었다.
설악산에 들어서자 용대리에서 미시령쪽으로 백담사 아래에 있는 12 선녀탕으로 들어갈려니 오늘은
선녀들이 백담사에 불공드리려 갔단 메세지가 찍혀 곧장 백담사로 향하였다.
위 글씨는 백담사 경내의 편액에 "설악산"이라는 현판인데 글쎄... 좀...운치가 떨어지는닷.
원교나 해강선생이나 추사체라면 어떤 글씨체 멋일까 하는??
또한 아래 현판은 그냥 볼륨 굵은 석봉체이고...
아마 가야산 해인사란 편액글씨의 해강 김규진체 비스므리한데... 어쩜 어느 고승의 필체일지도...
글자 몇자 가지고 균형 맞추기란 쉽지 않은듯.
신흥사에 차우 김찬균의 편액 글씨 이외엔 김충헌이나 모두들 영,호남지방의 사찰에 편액글씨를
남겼지, 설악산 심산유곡의 사찰에 편액의 글씨엔 유명인이 없는듯.
평생을 두고 글씨써도 이 몇자 않되는 글씨에 이름남긴 사람들은 조선천지에 다섯 손가락 꼽을듯.
우리 범인은 평생을 써도 이 3자를 못다쓴다.
백담사 하면 만해보단 일해의 위력의 유명세가 관광객을 더 몰아주는듯.
만해박물관에 걸려있는 위 액자의 글은 만해스님의 친필이라는 소개만....
영어보다 더 어려운 한문인데 혹 돌도사인듯 하지만 옥산도사님에게 물어봐야 할까??
만해 !!
누구나 다 아는 애국자이다.
그가 없었다면 3,1운동은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
월남선생의 독립청원과 의견차이로 기독교인들이 다수 불참 하였지만, 만해는 누구에게 요구하는
청원이 아니라 스스로의 국가임을 알리는 독립 선언으로 가닥을 잡고 호국의 길엔 종교적 차이도
하위개념으로 , 오직 조국독립의 일념으로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을 강압으로라도 종용하여 3,1
운동의 민족대표로 모시고 주도면밀한 거사 계획을 전담 하셨고, 독립선언서의 기초와 탈고, 독립
선언서 공약 3장을 첨부하셨다.
나의 머릿속에 뇌까리는 단어는 불교 유신론이다.
그 유신론중엔 스님도 스님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신체적, 생리적 억압으로 부터 벗어나 성적욕
구의 해결이 더욱 완전하다는 논리로 그 스스로의 실천으로 50대의 간호사를 아내로 맞이하는,,,
어느 유명 작가분 은 이때 장가들은 스님의 아들이라고 직접 얘기한다.
그 당시 만해선생은 우리나라도 출산을 장려하여 1억명의 인구를 만들어야 왜(倭)에 굴하지 않을것
이란 말씀도... 당시로선 엄청난 파격의 생각 아닐련가 하는...
본전엔 없던데,,,, 혹 선방에 들어갈리도 만무일텐데. 선녀들은 어디로 갔슬까??
선녀는 보지도 못하고 백담사를 나오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인파는 서너줄씩 그 길이가 다리건너
입구까지 약 1-2천명은 족히 기다려야 하는데, 왜냐면 일행중에 둘을 서지않고 그늘속에 기다리는
사람들을 3배이상 잡으면...뙈약볕 아래서 콧잔등에 땀구멍 늘리며 줄을 서 있는 사람에게 물으니
두시간째 기다린다고 한다,,,줄을 보니 그 사람 앞으로도 한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할텐데...
그럼 난 3시간 줄서 기다려야한다. 그러나 난 그런 위인은 되지 못한다.... 누구도 모르는 새치기
하면 되잖가..
마눌에게 자리구했다고 폰을 하니 새치기는 싫다고 딸래미와 줄이 벌써 일주문을 빠져나가 걷기
시작한다.
주차장까지 7 km라면 두시간이면 될텐데,,, 그래 혹시 개울가에 선녀들이 쉬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수 없이 터덜 터널 길을 걸어 나섰다.
아래의 사진에 보듯이 맑은 시내가 흐르며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백담천을 버스로보다 걷기를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건데 등산객들은 그 무거운 베낭을 메고 왜 버쓰 줄을 서서 땀을 뻘뻘 흘리
는지 이해가 좀,,,
선녀들이 물장구치고 놀만한 시냇물이죠.
아래의 사진 바로 이곳에 기다리면 밤이면 나타날거야...
왜냐면 모의 밤의 현장을 만들어보니 그 아래 사진처럼 안전하게 놀만한 곳이 되니까....
옥산님!!
내년엔 회원을 여덞명 모집하여( 12선녀탕이지만 실은 여덞개 탕만 존재하니)
난 용탕,,, 옥산님은 복숭아탕,,, 자스맨님은 자스맨탕 ....
그래서 밤샐거 없이 초저녁만 기다려 봄직도,,,,
아마 요즘은 나뭇군이 없는 세월이라 우리를 더욱 반길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이 사진은 나의 딸 作>
사진기 렌즈로 선녀들 찾느라 두리번 거리는데 우리회사 CIA요원에게 찰깍,
" 아빠~~ 여자들 보고있지?? "" 이 사진 증거를 내미는데, 내 무어라 변명을 해야될지...
허기사 하늘나라의 여자를 구경할려고 그랬으니까...누명 쓴것은 아니니..어쩔꼬.
**************************** 나의 초교 2년 시절의 설악산 방문기 *******************************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강릉서 출발하여 물치에서 내려 바로 홍례문 아래서 한시간 기다려
속초서 오는 마이크로 미니버스에 올라 설악으로 들어갔다
이미 해는 기웃해져 어둠이 깔리는 초 가을,,, 숙소를 고르고 할것없이 크라운 맥주홀이 달린 골 함
석지붕의 여인숙 하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가이드 팜플렛을 보신 아버지는 육단폭포를 가고자 하였다.
시내어귀에,,, 신흥사 다리 입구쯤에 초등학교 책상과 걸상 하나씩 내어다 놓고 길을 가로막은
동사무소 직원 둘이서 하는말...
" 오늘은 그쪽에 무장공비가 나왔으니 다른곳으로 관광하라고 설명한다"
어구 무쇠라,,, 귀신도 잡어먹는다던 무장공비가,,,
일정을 바꿔 오전엔 가까운 비선대를 향 하였다.
바위옆 난간에 세워진 샵에서 고급스런 카스테라 빵만 팔기에 난 좋았다,,, 고급으로 먹으니...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지금은 단풍나무 숲이지만 당시로선 어른들 어깨까지 올라오는 갈대숲으로
저만치 앞에서 군모를 쓴 군인의 얼굴이 다가오니,, 앞서가던 다른 일행들이 삽시간에 풀숲으로
숨으며 손짓으로 우리듯 숨으란다.
한 10 여 m 따가운 풀숲을 헤치고 그 군인인지 오랑캐인지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지나고 보니 한사람의 군인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안도의 한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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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의 진한 애피소드....
지금 내 기억속의 그 장소를 찾지는 못하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비룡폭을 오후에 다녀 오시던 길.
내려오는 길에 산 저만치 500m 아래 바위가 두 서너개 있는데 그 사이에서 연기가 모락 모락 올라오니...
앞섰던 어느 일행들이 하는 말은 무장공비가 밥을 해 먹으니 숨어 기다리자는 말이다.
돌아갈 길도 없고 하는수 없이 나무 뒤에 쪼그리고 한시간 넘게 기다렸다.
연기가 차츰 꺼지더니 지게를 맨 나뭇군 두사람이 나오더군,,, 그래도 속앗다는 분함보단 살았다는
안도감이 ...
사람들은 지겟군이 밥해먹었군 하던데... 난 지금도 그 생각엔 ,,, 초가을이라 산에 뭘 따서,,,
아니면 뱀이라도 잡아 궈 먹지나 않았슬까 하는 생각이.
다행히 무장공비와 정면 충돌은 없었습니다.
의상대 정자에서 아래로 가서 홍련암 마루 저만큼 네모 구멍속으로 철썩,,, 쏴 파도를 구경하던
당시의 모습,, 의상대는 수 없이 오르며 그곳은 언제인가 40년만에 다시 가 보았다.
어린시절의 기억을 충분히 살려보면 그땐 40년 후의 모습보다 두배쯤 크게 느껴진다.
어른이 되며 세상은 자꾸 작아지는 것일까??
다시 강릉으로 돌아와 새벽 4시반 버스로 평창 집으로 귀향하는중 대관령 2/3의 칠부정도의
중턱에서 버스는 손님들의 요구로 ( 아버님의 요구이지만) 정차 하였다.
당시는 직행이란 개념이 없었던듯,,,
정차 요구는 다름아닌 동해 일출 광경을 구경하는 것이었다.이글 거리는 태양이 바다에서 순산하듯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며 끌고 올라오는 듯한 바다에서의 이격 탈출....
지금껏 그러한 일출을 보고자 미시령, 한계령, 낙산비취, 의상대 모든곳을 다녀봤지만 바로 대관령
그 자리의 여름날의 일출과는 견줄바가 안 되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문명의 이기로 긴 터널속으로 대관령 정상에 오르면 아버님 세대에 버스를 정차하며
구경하시던 낭만은 우리에겐 먼 이야기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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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악기행의 장면의 기억은 10,1965년도 입니다... 65년은 월남 파병의 해 이죠.
가시는곳,,,머나먼땅,,, 월나아암땅,,,맹호부대 용사들아~~~ 님의 뒤를 따르리라...
안방의 큰 라듸오 소리를 더 크게 틀으시는 아버지...
아마 6,25 세대의 감격의 장한 대한민국 이였으리라.
라듸오도 귀한 그때당시 시내엔 신세기 소리사의 유선 스피커가 있었지만 향동, 주나루. 샘골,
도돈등의 나의 친구들은 동네 공회당 마당에 높이 세워진 망루속의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던
맹호부대 용사들의 노래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리라.,,, 또 삼천포야...
윗 글에서 초교 2년생이 크라운 맥주홀을 기억하는건 마이크로 버스 앞 좌석에 얘기를 건네던
사람이 그 맥주홀 직원 아씨들로 맥주홀 집이 아마 크라운 여인숙쯤으로. 그 직원들이 짐을
들어주었기에 기억도 생생.
한국판 머쉬모아,,,,설악의 큰 바위 얼굴
잘 놀긴 했건만 저 산너머 집으로 어찌 갈려 하나...
재는 높고, 길은 멀어,,, 해도 졌지만 그래도 집으로 쉬엄 쉬엄 가 봐야지.
굳드바이~~ 설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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