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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13층 탑의 예찬론》 《월정사 13층 탑의 예찬론》 오대산의 개산의 자장율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중국에는 4대 성지가 있는데 자장에 의해 수입된 청량산 (일명 오대산)의 문수신앙 단 하나만 들어와 오대산은 한국 불교의 성지가 됩니다. 따라서 오대산은 우리나라 불교의 원류이며 조선왕조에도 숭앙받는 사찰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조금 미루고 우선 저의 관심사를 조명합니다. 월정사 탑은 국보 48-1호 석조보살상은 국보 48-2호 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있는 현재 9층 석탑에 필자 단 한 사람은 십여 년 전부터 13층 석탑이라고 주장하며 문화재청에 이의 신청을 했었으며 아직 이 연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고려말에 민지가 13층 탑이란 기록의 문헌을 찾았으며 이제 실측을 통한 13층 가상도면을 만들면 논리가 정립된다아래에 ..
월정사 8각9층석탑이 13층 탑이었다 월정사 8각9층석탑이 13층 탑이었다(※ 월정사탑이 13층 탑의 기록)오대산의 개산에는 자장법사의 문수신앙의 성지로 알려지는 기록에 시발인 삼국유사 (권5) 자장 정율과 민지(閔漬) 의 기록을 다시 찾아보던 중 고려말 민지의 기록에서 월정사 13층 석탑의 기록을 찾았습니다.고려 말 민지(閔漬)가 지은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그 후에 명주(현 강릉 지역) 오대산을 찾아가 지로봉(地爐峰)을 올라 부처님의 두뇌사리와 정골사리를 봉안하고 가라허(伽羅墟)에 비석을 세웠다.(비석은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그 사적을 기록하고 이어서 월정사를 창건하고 13층 석탑을 세워 사리 37매를 탑심(塔心)에 봉안하였다 .(위 부분은 오대산..
《평창의병 6, 7, 8 종결편》 《평창의병 6》 ※ 평창의 정미의병 정미의병은 1907년 고종퇴위와 정미 7조약에 군대해산등에 항전하는 의병입니다. 평창의 정미의병은 김덕제 의진에 의해 대화. 평창에서 일어나지만 우선 봉평 의병을 이야기를 합니다. 1905년 원주에서 거의한 원용팔 의진에 평창의병장 이진용. 조맹선도 가담하였으며. 원용팔 의병이 해산되자 평창과 인제에서 해산군의 2차 의병이 일어납니다. 최돈호 의병부대는 봉평사람 150 명으로 구성되고 평창. 강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 1908년 5월26일,,,, 의병 최돈호등 80여 명이 강릉군 옥계면 천남리 부근에서 강릉경찰서 및 수비대와 교전하여 의병 19명이 전사함 * 1908년 6월16일.,,의병130여명이 강릉군 정착동에서 강릉수비대 토벌대와 교전하여 15명이 전사함 * ..
페북 5 《문향 (文鄕) 봉평 》 《문향(文鄕) 봉평 1》 봉평은 문향으로 조명되어야 합니다. 평창의 명가로는 봉평 원길리의. 영월 신씨 신교선님 가문입니다 가문의 선조로서 명종 때 신경진은 영월 신씨 로 부제학 신응시의 아들로 강릉 부사, 충주 관찰사, 대제학을 역임했으며 청백리에 녹선됨. (동시대 영의정까지 오른 신경진은 동명이인으로 신립 장군의 아들로 봉산 신씨이다) 원길리 신씨가문은 율곡의 문인인 신경진의 후손으로 구한말 신석우 선생의 해장집에서는 김삿갓이 20대에 과거공부에 한양으로 올랐다고 유일한 기록을 하였으며, 신석우의 자, 봉서 신범선생은 화서 이항로의 문인으로 김평욱, 유중교, 서응순 등과 교유하였다. 신범 선생이 회서 유림이기에 이후 봉평은 유학의 피난처로 많은 유림들이 몰려오고 후학들이 의병으로서 학문의 실천적 의지..
페북 4 《평창의병 3, 4,5》 《평창의병 3》 전 글 평창에서의 동학농민군 2차 항일 운동은 반봉건적 사회의 개혁에 의의를 가지는 혁명이지만, 한말 의병은 주자학 진영의 위정척사론을 이념으로 하는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충의정신으로 외세의 침입에 대해 유생들이 실천적이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구국 항쟁의 민족주의 운동입니다. 한말의병은 후일 독립군으로 이어지며 양반과 농민이 합세하여 나라를 구하려는 구국일념으로 민족이란 카테고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말의병은 당시 외세의 영향에 따라 시기적으로 전기의병. 중기 의병. 후기의병으로 구분됩니다. 1) 전기의병의 을미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항거하여 전국적으로 봉기가 일어납니다. 그 중 호좌(제천 지방)의병은 의암 유인석을 대장으로하는 화서학파의 의병이다. 화서학파란 퇴계 이..
페이스 북 2《평창의 시원 》 《평창의 시원 》 평창에 히늘이 열리고 이 땅에 처음으로 살았던 평창의 선조는 누구일까요? 수 년전 평창읍 하리에 청동기 유적을 강원 고고문화원이 시굴 조사 하였다. 여기서 청동검과 고인골이 출토 되었으며 동아대 고인골 학자 김재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2,400년전의 20대 여자의 인골로 판명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고조선 말기시대이다. 하리 고인골은 우리나라에서는 최고 오래된 전신상으로 이후로는 300년 후에 출토된 인골보다도 10cm 더 큰 장신으로 전신상 옆에는 비파형 청동검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우리는 좋은 집 짓고 살면서 조상의 묘도 잘 관리한다. 하지만 평창시공 의 최고래의 이땅의 조상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인골의 유품은 고향을 떠나 춘천박물관 창고에 전세살이를 하고 있다. ==..
일제때 평창군 지도 일제때 평창군 시내 지도 아래의 지도는 일제때 2차(1911년), 3차(1915년)의 강원도 측도시 평창군 지도를 부분 확대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중앙 박물관의 일제 박물관 문서) (1) 평창읍 (1911년 측도) 1) 대로(大路)는 영월서 도돈-약수- 하평을 지나 평창으로 들어오는 도로는 현 읍사무소로 직선으로 꺾어 올라 곡각으로 시루목을 넘어 대화로 빠진다. 이 도로는 주진교는 없이 주나루로 강을 건너고 또한 대화 신리에서 모치 재를 넘어 강릉으로 간다. 당시 신리에서 장평- 봉평은 간선도로이다. 2) 중로(中路)천변리에서 중리로 올라가 다리를 건너 상리천 종부쪽으로 간선 도로는 미탄으로 향한다. 3) 실선은 소로(小路)를 표시함. 4) 왼쪽으로 전선이 영월서 강릉으로 넘으며 군청으로도 연결했다..
「강원도 고적대장」의 평창 기록 (1부) 「강원도 고적대장」의 평창 기록 (1부) * 출처 – 국립 중앙박물관의 조선총독부 자료내에서 발췌함 ◆ 위 강원도 고적대장의 내용중 문서에 기록한 1)진부면 탑상리 탑 ,2)진부면 수항리사지 탑 5). 중리탑. 6) 상리 탑. 7} 하리 탑 9) 유동리 탑에 관한 기록. 그리고 5층탑이 아래의 문서에서는 3층탑이라 하는데 이러한 문제는 월정사 8각9층 석탑과 이 문서에서는 탑상리 탑과 상리탑이 3층, 5층으로 각각 기록된 바 아래에서 이 문제를 연구토 합니다. 이어서 마지막 장에서는 월정사 8각 9층탑이 원래는 13층 탑 아니었던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빈틈없이 연구합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10여년전 필자의 블로그에 남긴 게시글을 이번 한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 평창 지리 정보의 모든 것을 논하며 이 점의..
도깨비 이야기 < 나의 어머니의 해학> 도깨비 이야기 (어머니의 도깨비 이야기를 각색함) 난 초교시절 아침을 거르고 등교한 적이 있다. 그러니께로 한 50년 전의 일이라.. 어느날 아침 어머니는 조반을 하려고 부엌엘 나가니 도깨비들이 놀고 있기에 야단을 치셨더니 허겁지겁 꽁지 바빠지게 도망을 갔단다, 그래서 어머니는 쌀을 씯고 밥을 안치려 솥 뚜껑을 열려는데 어찌된 일인지 솥 뚜껑이 솥 안에 있더란다.세상에... 도깨비들이 솥 뚜껑을 솥 안에 넣다 뺐다 하면서 재미있게 한참 놀다가 아침이 밝는 줄도 모르고 어머니가 들어 오시니, 미처 솥 뚜껑을 솥 안에서 빼놓치 못하고 도망간 탓이라. 솥 뚜껑이 솥 안에 있다. 이건 참 말이 안되겠지만, 그게 도께비들의 일상이라, 그래서 난 아침을 거르고 등교했는데, 이제 새 솥을 사..
평창의 관문 용산정을 복원하자 평창의 관문 용산정을 복원하자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용산정(龍山亭)은 주진교를 건너며 용산의 비경 위에 용산정이 있었습니다. 용산정의 유래는 아래에서 서술하듯이 임진왜란 당시 우리고장 출신 이여림(李汝霖) 의병장을 추모하는 누정으로서 이제, 우리는 다시금 용산정을 복원하여 이여림(李汝霖) 의병장이 목숨을 받쳐 조국을 구하고 한 숭고한 충정의 의(義)를 기리고 얼을 살리며, 이로서 평창인의 기상과 자긍심을 높이는 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또한, 용산정은 뱃제(梨峙)를 넘어서 평창을 들어오는 관문(關門) 으로 평창을 내방하는 여행객에 용산정은 평창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고장이란 점의 상징으로 평창의 랜드마크를 만들어야 함은 좋치 않을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절개된 용산의 양쪽에 구름다..
송학루(松鶴樓)의 유래 송학루(松鶴樓)의 유래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평창읍 종부리에 있는 송학루는 1928년 당시 조선 관아의 문루였던 대외루(大畏樓)가 헐리게 되자 이 지방 유생들과 유지들이 한 마음으로 성금을 모아 현 위치에 당시 모습 그대로 이축한 것으로 정면 3칸(7m), 측면 2칸(3m)의 누각으로 팔작 지붕으로 운치 있게 보이는 겹 처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평창의 진산을 노산이라고 기록하기에 정자가 위치하는 남산은 시내를 건너 평창의 안산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푸른 송정의 숲에는 휜 학이 서산에서 날아들고 검푸른 사천(泗川)강은 더디소(沼)를 만들며, 휜 모래톱의 백사장을 돌아드는 언덕위에 세워진 송학정은 平昌 第一景의 자태의 아름다움을 드리우며 평창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사천강은 현 평창강..
송계산은 원래 이름은 여름산이다 송계산은 원래 이름은 여름산이다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평창읍의  장암산과 남병산, 청옥산을 잇는 삼각 트라이 앵글의 고원부에는 장바우가 있으며  장암산 능선에서부터 산등성이가 길게 이어지는 긴등의 산을 현재는 송계산이라 부른다. 하지만 송계산(松契山)이란 명칭은 일제 후기에 불리어졌으며 일제 초기까지도 동 산은 여름산(餘蔭山)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따라서 아래의 여름산과 송계산의 분석 연구에 의하여 원래의 여름산의 산이름으로 다시 개정되어야 한다.( 현 지명으로는 송계산으로 되어있다) ◆여름산의 고찰1) 「평창군 지명유래」에서는 "송계산은 상리에서 주진에 이르는 산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주;  「평창군 지명유래」  평창문화원 발간. (2,000, 12.) p 17.2) 「평창군 지명..
평창의 산 이름 바로 찾기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평창 산명의 재고 엄기종 ◆ 두타산(평청 수항리) ◆ 발왕산 ---------------------------------------- ◆ 국가 지리정보원 기록 평창군 도암면 용산리 발왕산(發旺山)의 왕(旺)을 왕(王)으로 정비해 2002년 12월 27일 발왕산(發王山)으로 변경 고시했다. 옛날 도승이 이 산에 팔왕(八王)의 묏자리가 있다 하여 팔왕산이었으나 일본강점기 때 일왕(日旺)을 우상화하기 위해 왕(旺)으로 왜곡한 것을 바로잡았다. 평창군 진부면 장전리와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에 걸친 가리왕산(加里王山)과 평창군 대화면 주왕산(住王山)도 같은 이유 등으로 정비됐다. 평창군 방림면 방림리와 대화면 상안미리의 중대갈봉은 우리 문화를 비하하고자 어감이 좋지 않은 단어를 사용해 ..
문수신앙의 성지 오대산 불교권에 수항리사지의 위치는?? 문수신앙의 성지 오대산 불교권에 수항리사지의 위치는?? 3) 월정사 8각9층석탑의 諸 문제 (본론 2) 월정사에 대한 나의 이해 2013. 6. 12. 오늘 필자의 블로그에 이 글이 검색되어 오래전의 글이라 기억이 희미해서 무엇인가 다시 보았습니다. 일반적인 탑의 이론을 넘어서 윗 글에서부터 출발하는 탑의 앙각의 개념을 도입하여 후일 수항리 사지 탑이 3층임을 증명하면서 논문을 쓰며 지금까지 탑에 이론들이 역사학자들의 각 탑들의 공통적 특성 즉, 팔부증상이나 삼산화 문양이나 안상등 여러 특징의 기록으로 동시 연대를 측정하는 논문만 많은데 필자는 수항리 사지 탑 논문에서 탑의 새로운 조형성의 공식을 만들어 탑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습니다. 지난해 장서각에서 왜정 때의 유적자료에서 수항리 사지 탑은 3층 ..
9회말 홈런을 친 동창녀석(후편) 08.11.14 15:44 아주 오래 전,,,,,우리들의 옛날시절, 그러니 께로 2-30년전으로. 오늘 장사는 완전 정복 쎅션 28-12장을 펴 놓게. 우리 28세때 12월의 어느 한 토막을 내 일거 볼거니.... 아침 햇살이 창호지 문틈 사이로 밝게 들어오는 어느 겨울 아침 날이었다. 새마을 운동의 대명사인 딸딸이가 울 집 앞 신작로를 가로지르는 소리가,,,떨떨떨떨하다가 푹~멈춰서며 겨울 아침의 정적을 무너 버린다. 지금 들으면 정겨운 그 소리가.... 난 그 소리를 듣고, 문득 아~~ 오늘이 또 푱창 장날이구나. 그래,,, 그럼 오늘은 어데서 또 딱지를 긁어볼까?? ( 딱지란 촌놈들 장에 오면 한판 후려 먹기 하는 쉬운 말로 텃세 받는 거다.) 하평 미륵 땅 꼬까리 돌아서 내려가면 양지바른 동네,,,..
"平昌"이란 지명 유래의 분석연구 "平昌" 이란 지명 유래의 분석연구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평창에서는 지금까지 3종의 지명지가 발간되고 이에 기초가 되는 읍면지에서 평창의 각 동리에 대한 지명의 연구에서도 평창 지명의 제일 기조를 이루는 “평창(平昌)”이란 무슨 뜻인가 하는 점은 연구는 없었다. 그러기에 이 장에서 "평창"이란 지명의 어원의 출처와 그 뜻의 고증을 합니다."평창"의 어원의 뜻은 공자의 고향 "창평"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에 평창의 향토사학자 엄기종님의 선행 연구기록이 있어서 를 인용하며 분석합니다. 엄기종 07.01.13 02:51◎ 평창(平昌)이란 地名 由來平昌은 三國時代에는 高句麗의 領域으로 郁烏縣(일명 于烏縣)이라 불리다가 신라의 三國統一 이후 景德王 16년(서기757)에 白烏縣으로 改稱하여  奈成郡(現 영월군..
거슬갑산(琚瑟岬山) 의 위치 연구 거슬갑산(琚瑟岬山) 의 위치 연구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이 장에서 고찰로는 거슬갑산은 강원도 7대명산으로 평창읍 도돈리의 오도산이 거슬갑산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증적 고찰연구로 현재의 백덕산이 원래 거슬갑산이라는 점을 제시하며, 다음으로 수정산 조명시 수정산을 평창의 진산으로 보았슬 때 백덕산 (거슬갑산 )은 이에 대한 증조산이 되는 점으로 보아야 하는 문제에 거슬갑산은 수정산의 연구에 선행되는 문제이기에 먼저 거슬갑산에 대한 고찰을 합니다. ◆ 도돈리의 거슬갑산이란? ◎ 오도산이 거슬갑산으로 불리어지는 점의 이해 현재에 통용되는 거슬갑산(琚瑟岬山) 은 평창읍 도돈리 산 46번지로 해발 540m 이다, 산 정상에는 평창군에서 세운 오도산(悟道)이란 표지판이 있는데 오도산 아랫줄에 괄호속에 작은 글..
「평창지리지 총람」에 대하여 「평창지리지 총람」에 대하여 平昌 歷史硏究者 高 柱 浩 1960년대 근대 도시하의 경제발전 속에 도시로의 이촌향도의 공간적 재편이 급하게 이루어졌으나 이주한 산업도시는 그냥 살아가는 공간이 었슬뿐, 삶의 애착이 깊게 스며든 장소는 아니었다. 또한 이후 세대는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0년대에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80년대의 권위주의적 수동적 생활상에서 민주주의의 생활상으로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삶터의 인식에 다른 전환점이 되었는데(지방 자치단체는 ’50년대에 이승만정권시 실시되다가 이후 중단하였지만)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자기 권역의 역사와 문화적 상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첫째, 해당 권역의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군지(郡誌)의 간행이 되었고, 역사 유적에 대한 ..
평창읍 천동리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2022.05.10. (평창서 청동기시대 추정 매장시설 2개·돌화살촉 9점 등 발견) 10일 평창군에 따르면 지난 1일 한 주민이 옥수수경작을 위한 고랑 내기 작업 중 토사 아래 돌이 걸려 이를 걷어내는 과정에서 유물을 발견, 문화관광과에 신고했다. 발견된 문화재는 매장시설 2기와 돌칼 1점, 돌화살촉 9점, 대롱옥 6점, 붉은간토기 1점 등 유구 및 출토 유물로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군은 토지 소유주에게 발견 경위를 조사해 문화재청에 신고했다. 또 관련 연구소의 전문가를 통한 현지 조사와 유물 감정 평가 등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시균 문화관광과장은 "돌칼, 돌화살촉, 대롱옥 등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자료들이 함께 출토돼 의미가 크다"며 "문화재 조사와 진행 중 불편이 없도록 세심하게 살피겠..
평창 최초의 군명(郡名), 우오(于烏), 욱오(郁烏), 백오(白烏) 의 해석 후세백작 ◆ 평창 최초의 군명(郡名), 우오(于烏), 욱오(郁烏), 백오(白烏) 의 해석 위의 역사 기록들에서 평창의 최초의 지명인 고구려때의 욱오현(郁烏縣), 于烏縣(우오현), 신라때의 白烏縣(평창군 평창읍)의 고구려 때 평창군의 이름값의 고지명의 기록들이 나온다. 弓裔傳에 나오는 鬱烏城은 郁烏縣을 가리키는 것이다. 1) 지금까지 평창에서 이루어진 우오, 욱오, 백오에 대한 설명은 엄기종님의 글에 있다.*주 1) 우리 고향의 최초 이름이 우오(오!태양), 다음 욱오(광채태양), 다음 백오(밝은태양)로 고려 전에는 계속 삼족오*주3)(태양의 흑점)를 우리군의 이름으로 썼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이러한 우오, 욱오, 백오의 뜻의 해석은 평창의 향토사학자 엄기종님에 의해 강원대 사학자의..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 (증보판)책에 대한 비평> 지난해 출간된 정원대의“ 평창의 인문지리”책은 평창역사 조명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기에 이 장에서 동 책을 집중 분석합니다. 정원대의 책은 평창군 예산으로 증보판까지 발행했는데 동 책은 평창 역사책이 아니라 평창역사를 상당히 왜곡하고 있어서 평창역사를 저해하고 있다. 그것은 약 4~50개 오류및 오논술로 그러고도 자칭 향토사가라고 한다. 참으로 이러고도 평창이 발전하겠습니까?? 따라서 정원대가 떠드는 것은 평창역사가 아니고 오히려 평창역사를 저해하는 픽션이이란 점이다. 정원대는 그간 가 오류라서 도에서 군청에 하달된 공문에 지명지에 쓰인 한문의 오류를 적어 주었다는 등 하며 지명지는 법적인 문제가 있기에 폐간해야 된다는 등 몇 삼년 떠들었는데 정작..
두보는 멀리 악양에서도 기뻐서 미칠 지경이다 기뻐서 미칠 지경이다 요즘. 대선이 끝나고 피선거권자에서 항간에는 달변이라는 언변의 문제가 보여주는 비 논리성의 논리들이 이제 팬데믹보다 더한 썰데믹 시대를 만들기에 위의 이러한 문제도 그에 동승하는 웅변이 아닌가 한다. 요즘의 우리 사회는 달변이라 하지만 그것은 정의가 사라지고 비논리적 궤변이 판치는 사회인가 보다. +++++++++++++ ◆ 그럼 여기서 백신학회에 하나 물어봅니다. 오늘 뉴스에 백신 접종자 사망자에 백신주사 인과성의 발목으로 사망하였다고 비로서 처음으로 오늘 한 사람 인정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 '심근염'으로 인한 사망이 확인됐습니다. 백신과 사망의 연관성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 겁니다. 하지만 국과수의 부검 감정서와 달리 질병관리청은 '인과성 없음'을 결정했고, 유족..
"만수산" 사설의 아리랑은 미탄 아리랑이였다(1부) "만수산" 사설의 아리랑은 미탄 아리랑이였다.후세백작 2020. 02. 26. 02;50"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 사설의 정선아리랑은 600년전 고려말 충신들이 부른 노래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사설이 고려말 충신의 노래라는 점은 위증이라는 여러 문제를 2013년부터 여러편을 제시하였었다. 아래에서는 이에 대하여(만수산 사설의 아리랑) 정선인의 책에 글을 인용하여서 해부, 비평합니다.(1)  진용선의 책에서 만수산 아라리의 허상에 대하여.진용선의 책 p28. 발췌인용거칠현동의 발상지 문제는 칠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이들이 자신들의 심정을 한시로 지어 처음 불었을라는 "발상지"에 대한 지나친 애정때문이다, 이러한 애정은 정선 아리랑의 성립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시기적으로 본다면..
平昌歷史 定立 5> (4) 미탄, 남부권 발전방향 제안의 이해 平昌歷史 定立 5> (4) 미탄, 남부권 발전방향 제안의 이해 후세백작 1) 육백마지기 개발안( 오토 캠프장과 천문대/ 평창아라리 기념관 제안에서) 우리나라에서 별을 이야기하는 옛 지명은 이곳 육백마지기와 성마령이 유일한 듯 합니다. 육백마지기(해발 1,256m)의 육백이란 조선시대때 금성을 육백이라 불렀으며, 그 옆의 성마령(星摩嶺, 973m)의 摩자는 백과사전등에서는 높은 재를 넘기에 별을 만질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 닦을 摩, 갈을 摩자로 잘 닦고 갈은듯 반들반들하게 빛난다는 의미를 가지는 별로서, 이 표현은 금성을 지칭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평창은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10여년간 평창군 예산은 북부권으로 실린 바, 그간 준비. 실사 방문단 맞이할때 ..
11. 성마령과 육백마지기 고찰 11. 성마령과 육백마지기 고찰            「 平昌歷史의 理解 」p179~186      후세백작 1) 육백(六白)마지기 어원의 이해 평창군 미탄면 소재 청옥산은 해발 1,256m로 신생대 3기의 고위도 평탄면이 융기되어 고원을 이루는 지형으로 정상부엔 육백마지기로 잘 알려져 있다. (신생대 1, 2기는 없는 시기이다.) 청옥산 정상부는 이러한 고원부는 돌출된 산세가 아니라 평지처럼 느껴지기에 사람들의 느낌에는 익숙지 않은 산이지만, 평창읍 유동리에서 저 멀리 동쪽 하늘과 맞닿는 청옥산의 산세를 볼 수 있으며, 눈이 쌓인 청옥산은 더욱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청옥산의 고원부는 육백마지기의 고위도 평탄면의 형성은 오랜 침식 작용을 받은 평탄면이 융기하여 높은 고도에 평편하게 나타나는 고위도 평탄면..
< 平昌歷史의 理解 3> (2) 미탄면 역사 활용의 시대사적 의미는?? (2) 미탄면 역사 활용의 시대사적 의미는?? 후세백작 ◆ 미탄면 역사 활용의 시대사적 의미는?? 언젠가 육백마지기에 오르다 날이 저물어 돌아오는 길에 평창으로 넘는 멧둔재 중간에서 미탄을 돌아보니 아!하는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미탄시내는 가로등 하나도 없는 듯, 캄캄한 어둠의 정적뿐이었습니다. 미탄면은 산간 오지마을로서 시간에 비례하여 상대적으로 퇴락되어 가는 모습을 금치 못하는 바. 여기에는 두가지의 맥을 짚어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미탄면의 낙후 요인으로서는, 과거 평창군으로선 동계올림픽 준비로서 실사단등 관계자들이 자주 방문시 환영식이나 북부권 즉 영동고속도로 지나는 곳들까지 쓸고 닦고 준비하기에 10여년간 지방예산이 소모된 결과 상대적으로 남부권 ..
미탄면 레져관광 개발안( 평창군 남부권 개발 2案) 미탄면 레져관광 개발안( 평창군 남부권 개발 2案) 후세백작 2018.07.03 12:17 이제 평창은 동계올림픽을 성공리에 마치고, 이제 현안으로는 그간 소홀시되었던 남부권의 균형발전이 부상되고 있다. 남부권 개발안에 지난번 발표레서 평창읍 하리에서 출토된 고조선식 청동검과 청동기시대인의 유골 발굴에 힘입어 과학화된 자료를 통하여 평창의 옛날의 자연과 기상을 알리는 영서문화의 궤적인 박물관 필요성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자칫 아우라지 석기 문화 발굴에 힘입은 정선에게 태백산맥 영서 역사의 기수라는 선수를 빼앗길 수도 있다고 게시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제안은 아마도 평창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2~3천명의 미탄면의 발전을 위한 개발案입니다 그간 평창군은 올림픽을 위한 북부개발에 신경을 써야 ..
< 平昌歷史의 理解 2> 미탄면(1)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의 이해 미탄면 (1)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의 이해 후세백작 ◆ 평창역사의 시원은 미탄면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적 입니다. 본 유적은 연세대 박물관의 동굴유적 조사로 청원 두루봉동굴, 단양 상시바위그늘, 단양 금굴, 연당 피난동굴에 이어 2007~8년 기화리 쌍굴 조사를 통하여 신생대 4기 갱신세 동물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동굴유적의 체계를 마련하여 구석기 문화와 자연환경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인용합니다. ◆ 기화리 구석기유적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인류의 기원부터 조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류의 기원은 전기구석기 시대로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300~350만년전 오스트랄 피테쿠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여름에는 아프리카 동굴에서 185만년된 인간화석을 발견했습니다( 탄소연대 측정..
장평리의 < 無名塔의 報告 > 후세백작 보낸날짜 : 20.11.16 08:00 (가칭 장평리 탑) 위 사진의 탑은 지금현재 알려지지 않은 탑으로 이 탑을 소개합니다. 동탑은 아직 학계와 문화재청에도 보고되지 않은 탑이기에 이에 상세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탑의 현 소재지는 평창군 용평면 금송1길 27 (지번; 용평면 장평리 355-1번지)내 정원에 위치합니다(G.P.S상으로도 확인이 용이함) 동 탑은(이하 가칭, 장평리 탑으로 칭한다) 사각칠층석탑으로 상륜부는 유실되었으며 5층 탑신석만 새로 정비한 흔적이 보이는 바, 상륜부를 제외한 탑신부에서 기단부의 지대석 상층부까지 높이가 4,2m이며 탑의 폭이 가장 큰 부분으로 하대갑석의 가로 폭은 1,2m이다. 탑은 마치 맑고 깨끗하게 보여 그 자태가 단아하다. 그러기에 근자에 조성된 것처럼 ..
최홍원 화백의 작품 감상(2) 원주서 최홍원 화백 추모 10주년 전시회가 2022년 1월 31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으 앞전 게시글에서는 작품 감상이해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전시관 외부에는 작품을 플래카드로 제작하여 전시하고 있는 바, 집안 동생이 플래카드에 한점인 위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어서 설명을 부탁한다고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왔기에 아래의 바로 해석의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 21.12.29 20:14 이 그림의 일반인의 쉬운 이해, 감상으로는 근대 산업사회의 발전에 오히려 인간은 거대한 구조의 틀에 갖히게 되는, 즉 문명의 사회에서도 인식하지 못한 인간성의 절박함을 드러내고 있다. 앞전의 최홍원 작가의 평론중에서 렘브란트는 궁정화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