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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우리도 투사가 되어 일본함 갈래 ... .헤이,,, 칭구들.. 우리도 투사가 되어 일본 함 갈래. 우리 일본 한번 갈래.. 우리나라가 말이다 엘본에 대해서 과거 역사 바로세우기도 좋치만 문제는 지금이 더 중요하다. 그건 우리시대에 일본에서 받는 피해의 잔재를 먼 후손에게 물려주지는 않아야 된다는 의미일세, 그 중 하나의 큰 문제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하는 문제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란 바다에서 화산에 의해 쓰나미가 일자 발전이 멈추어 원자로에 전원 공급 중단되어 냉각시스템은 마비되어 핵 연료봉이 대기중으로 노출되어 고온이 되어 900°C에서 산소에 의해 수소 폭발이 일어났고 여기에서 방사능이 만들어지며 수증기에 포함되어 분출되었다. 이떼 전원 공급이 중단되자 공중에서 물을 투하하라는 미국측의 권고사항이 있었지만 4조엔의 원자력 ..
율곡의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서 이제 논문 2편을 재 탈고하여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세미나는 12월 3일 열립니다. 본 군에서는 만류하였으나 이제 계속적 지원아래 율곡의 문화는 탄생하게 됩니다. 2 평창에서 그간 학자들에 의해 판관대 세미나는 3번정도 열렸는데 전부다 바른 이해로 다가서지는 못했고 또한 평창의 주장을 펼치지도 못했습니다. 세미나는 일반적인 이야기들만 치중하지 10년설이나 4년설이 잘못 논고된 점이나 서울대 교수들이나 여러 학자들 모두 조운에 대해 깊이 알지도 못하고 남의 것만 베께 관서를 대동강이라만 하는 학문적 오류들,, 이런 오류들에 휩쓸린 판관대의 입지적 재 소명등은 일반 학자들이 주창하는 예는 없엇습니다. 그렇다고 평창에 향토사학자들도 전무하여 부득이 필자로서는 이에 연구를 하고 가장 평창..
평창의 임진왜란사 이해 ◆ 기천록과 호구록의 차이점 문제 기천록에서는 호구록보다 정확도는 떨어지나 자세한 점은 원주 강원감영에서 탈출시 설명으로 고종원, 종경 형재는 새벽에 포승줄을 이빨로 잡아뜯어 끊고 탈출을 하고자 하니 권군수도 포승줄을 풀어달라고 애원해서 풀어 주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상부의 명이지만 동생 종경을 사형시킨 당사자이지만 그 보다 탈출은 생사를 건 모험으로 탈출에 대한 사전 약속도 없이 포승줄을 물어뜯은 일에 종원 형제는 두 사람만이 빠져 나오려 했는데 권군수와 그의 아들의 포승줄도 풀어주자 (여기까지는 기천록) 이때 힘이 좋은 권군수 아들 주는 벽을 헐고 탈출하개 된다(호구록) ◆ 조선침략에 나선 왜구 4번대 구성원은?? 일본군 4군(4번대)의 총대장 모리 야스나리(毛利吉成)는 도꾸가와 이에야스(풍신수길)의..
평창 돌 체험관의 사색 평창 돌 체험관의 사색 평창에는 박물관이 두 개가 생겼다. 그 하나는 오대산에 오대산사고 박물관으로 일제가 오대산사고에 보관대되어 있던 이조실록을 밀 반출해가서 관동대지진에 불타 없어지고 학자들이 대여해갔던 40여권의 실록이 반환되어 규장각에 보관중이며 원 제자리인 오대산 사고에는 오대산 사고 박물관을 짓고 환수되어온 원본이 아니라 이미테이션의 복사본을 영인본이라 하며 가짜를 보관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것은 원본이 없다면 몰라도 원본을 프린트한 복사본을 보관하려고 국가 예산 70억을 들여서 오대산에 사고를 지었다. ​ 또 하나의 박물관은 올해 3월에 개장한 평창읍 중리의 돌체험관은 명칭은 체험이지만 그곳에서 돌에 관해 할 수 있는것은 눈으로 감상하는 수석 박물관이다. 수석박물관이라 하면 어감이 좀 이상..
세미나 논문 후기 1, 판관대 비석의 명문에서 (1) 비석의 명문 해석 "율곡선생의 어머님 행장에도 봉평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거니와 강릉땅에서 지내던 신사당이 용을 현몽하고 서기1536년 음력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 서울에서 수운판관직에 있던 부 군 이원수공이 말미를 얻어 이곳으로 귀가하니 그때에 율곡선생을 잉태한 것으로 전해온다" ◈ 봉평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거니와 강릉땅에서 지내던 신 사임당이 용을 현몽하고 서기1536년 음력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 라는 기록에서, ~ 이 보이거니와라고 표현하는것은 그 다음 문장엔 그런 행장의 기록이 아닌, 지금까지의 기록은 특히 율곡이 쓴 선비행장의 기록도 전혀 무시하겠다는 의도형 문장으로 그 다음 글들은 역사적 기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란 입장을 취하는 느낌이다. ◈ 또한...
"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세미나는 코로라로 인하여 연기 되었습니다. 이번 "율곡의 고향마을 가꾸기 "세미나는 박사님과 향토사가의 총 5명의 주제 발표로 계획되었습니다만 이번 코로라 사태 2단계로 인하여 연기되었습니다. 본인의 논문은 약 60여 페이지 분량으로 율곡과 신사임당의 백옥포리 판관대의 생활과 저변의 이해에 대한 과제로 오죽헌의 영역과 판관대의 영역이 구분되는 논제로 한평생 서울대 교수에서 규장각 관장까지 역임한 자가 백옥포리 집은 강릉에서 서울을 다니기에 힘들어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가 그 중간에 지어준 별서라는등 웃기지도 않는 놀리들이 난무하기에 백옥포리 판관대에 대한 기준적 정ㅇ의의 글로 이번 세미나 자료집에는 후기로 별첨하며 13페이지로 새로 구성한 논문으로 판관대 부분만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세미나에서는 이러한 본인의 판관대의 역사적 사실의 실체를..
월정사를 사랑한 유정 사명당 월정사를 사랑한 유정 사명당平昌歷史硏究家 高 柱 浩  조선 중기에 청허 휴정(서산대사. 1520∼1604)은 오대산에 주석하였으며, 그 문도들이 대거 월정사 및 오대산 불교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휴정의 제자 사명당은 왜구들을 이기는 많은 설화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국 각지의 사찰이 사명당의 업적을 기리고 있지만 정작 사명당이 임란 후 국서를 가지고 일본을 건너가 강화조약을 맺고 돌아와서 국가의 위상인 실록을 보존하기 위해 오대산 영감난야에 오대산 사고를 지은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정 사명당은 경남 밀양 생으로 1544(중종 39)에 태어나 1610년(광해군 2년)에 입적했다.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四溟堂)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四溟大師)라고도 부른다. 사명 유정(..
수다사(水多寺) 지명의 기록과 어원적 의미의 고찰 수다사(水多寺) 지명의 기록과 어원적 의미의 고찰 평창역사연구자 高 柱 浩 월정사 아래에 수항천을 따라 내려가면 12km지점에 위치한 수항리사지는 절터를 둘러싸고 수항천이 굽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물[水]의 목[項]이라고 한글학회 지명총람 2 (508쪽, 1967)에 서술되어 있다. 동 절터는 현재 두 기의 옥개석으로 결손된 탑만 남아있는 사원지로 강원도 기념물 제 49호의 평창 수항리사지(平昌 水項里寺址)로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에 수항천변에 소재해 있다. 수항리사지는 평창군 진부면 수항리 143번지에 위치하는 폐사지로 오랫동안 "수항리사지" 절터로만 알려지다가 1983년 명문기와에서 水多란 명문 기와가 출토됨에 이곳이 수다사지임이 밝혀지며, 또한 “태백곡 수다사”(太伯谷 水多寺)란 명문이 쓰여진 청동..
困 惑 !!!!!!!! 困 惑 !!!!!!!!!!!!!! 20.03.31. 23:32 당(정당)이 무궁화 뺏지 꿔주고 빌려주고.. 그래서 선관위 돈 더 타먹구,,잘한다. 의원 나리님들이 만든법에 지넘들이 춤추고, 선거철이라 궁민은 입틀어막고 지넘들 맴대로들... 이게 나라인가 법인가.. 똥이라 하지. 왜 똥이냐고.. 선관위 선거 보조금 가만 있어도 다 지넘들 것인디.. 괜스레 잘난 법 만들어서 이상한 구호 외치는 당들에게 똥가루 다 덜구고서 뭘로서 똥냄새를 풍길까?? 예산을 절감하여 궁민들에게 평생 현찰을 준다 하는데.. 볼세비키도 아니고 돈세비키인가?? 긋도 얘기는 얘기인지라 자꾸 뇌리속을 스친다. 여의도 국회 건물은 거대한 화장실. 중앙 돔 위에 환풍 퓐 설치한다면. 개인이 떠들어도 뉴스가 되는 빨강벌레 씨..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후세백작 평창 역사에서 시원이라 할 수 있는 평창의 상고사에 대해서 관내의 사료집 책자들에는 30여개의 고인돌과 임하리의 선돌, 그리고 주진강등에서 일부 선사 유물의 채집등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을 서술하고 있으나, 2,010년대 이후에 고고학계에 의해 새로 밝혀지는 평창의 상고시대(석기시대, 청동기및 철기시대)의 역사 유구와 유적 발굴에 의해 평창의 상고사는 당연히 수정되어야 하는바, 이러한 작업은 역사학회나 관의 주도하에 공적인 입장으로 발표하여야 하는 과제이며 그에 따라 평창의 역사서들에 새로 개정된 일관된 역사가 수록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평창은 세미나는 자주하고 있으나 세미나에는 향토적 색채에 대한 외부 학자들이 논지에..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원본게시글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 후세백작 ( 이 게시글은 문화재청의 자료 열람에 의해 강원고고문화원구원의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pdf" 조사 연구 리포트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Ⅰ. 조사개요 1, 조사경위 평창읍 하리(240-4, 240-12번지)일원에서 1986년 강원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문화재 조사에서 마제석촉이 수습되어 평창읍 하리 유물 산포지로 수습된바 있으며, 2004년 문화유적 분포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지표조사중 무문토기편이 수습되어 선사시대 유적이 입지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알려졌다. 건축주 지해영씨는 본 지역에 단독주택 신축허가를 평창군에 신청하였으나 동 지역은 상기한 바와 같이"평창읍 하리 유물 산포지"*㈜에 해당하는 이유로 ..
다시 서술하는 미탄 "육백마지기" 어원의 재고찰 미탄 "육백마지기" 어원의 재고찰 http://blog.daum.net/kkks1/1681 후세백작 세금을 계산하기 위하여 사용한 농토의 넓이단위 마지기(斗落)이 아니라 結,卜,束의 단위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종 26년(1444)부터는 6등급으로 나누게 되었는데 인조 12년(1634)부터 1등전 1결의 넓이는 10,809㎡가 되었다가 대한제국 광무 6년(1902)부터는 1만㎡인 1㏊를 1결로 제정하였다. 1등에서 6등으로 갈수록 1결의 면적은 일정한 비율로 넓어진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시인 1910년부터 약 10여년간 우리나라 전 국토를 측량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지번의 이름이 그때부터 처음 매겨지는 것으로 단위의 넓이는 현대의 평, 정보(ha)등으로 매겨집니다. 그러기에 경작지 이조때 세금을 거두기 ..
평창의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 평창의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 후세백작 2020.03.13 08:21 아래의 『평창상고사』 게시글을 사정상 본인의 임의로 삭제합니다. 하지만, 본 게시글은 아무런 문제나 제약을 받지 않기에 후일 원문 그대로 다시금 평창의 상고사를 조명하겠습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1) 1차 조사- 후평리 유적 2) 2차 조사 - 방림리와 주진리 유적 조사 3) 평창강 유역 철기시대 주거지 탄소연대 측정결과 평창의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 원본 게시글)平昌歷史 史觀定立후세백작2020-03-20 12:16 이로서 후평리, 주진리, 방림리 유적은 평창의 청동시대, 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였다 2,평창역사의 상고사 1)구석기 시대 유적 2) 신석기 시대 유적 3) 청동기시대 유적 ◆..
평창 하리 유적에서 발굴된 고인골의 그녀는 누구일까??(평창 하리 청동가 유적 - 부록 2) 평창 하리 유적에서 발굴된 고인골의 그녀는 누구일까??(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 부록 2) (이 글은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 픽션의 이야기로 사유적 사색의 가상치로 구성합니다) 2016년 강원 고고 연구원에 의해 평창읍 하리 240번지 일원의 석실묘 9호기중 2호분에서 古인골과 함께 매납되었던 비파형(고조선식) 청동검의 발굴되었다. 따라서 각 연구기관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바 하리 청동기 유적의 탄소 동위원소 시험결과 2,600년전의 유적, 유물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일전 게시글에 하리 출토의 청동검은 비파형의 곡선이 조금 완만해지고 봉부도 작아지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하부의 검엽이 조금 작아지는 비파형 청동검으로 날씬한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의 청동검으로 약 2,500여년전에 오차는 100년을..
문치의 문인국가와 무신 국가론에 차이(평창 하리 청동가 유적 - 부록 1) 문치의 문인국가와 무신 국가론에 차이(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 부록 1) 이 장에서는 과거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도 내일도 생산적이지 못한 역사 문제를 따져야 하는가에 대한 단펴넉인 단상을 그려 봅니다. 역사가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오늘의 대화라고 지적하였..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 평창 하리 240-4번지 유적(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 조사, 발굴 보고서) 아래의 『평창상고사』 게시글을 사정상 본인의 임의로 삭제합니다. 하지만, 본 게시글은 아무런 문제나 제약을 받지 않기에 후일 원문 그대로 다시금 평창의 상고사를 조명하겠습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위 연구 보고서에는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이 방사성 탄소 측정 결과 탄소연대 (ytsBP) - 2620년에 오차범위-30년, 즉 연대범위는 (4호분 주변 검사 기준) (BP) 2590~2565 전으로 BC590~565년 사이의 역사임이 밝혀졌습니다. 하리 청동기 시대 석관묘 내에서는 국내 가장 오래된 피장자의 전신상 인골이 발굴 되었으며 인골과 함께 매납된 비파형 청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비파형 청동검(일명 고조선식..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새로 써야하는 평창의 상고사 (석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 평창 역사에서 시원이라 할 수 있는 평창의 상고사에 대해서 관내의 사료집 책자들에는 30여개의 고인돌과 임하리의 선돌, 그리고 주진강등에서 일부 선사 유물의 채집등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을 서술하고 있으나, 2,0..
김삿갓은 죽어서도 세인들을 멀리 운둔하고 계신가?? 김삿갓은 죽어서도 세인들을 멀리 운둔하고 계신가??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蘭皐 김병연에 대한 영월의 김삿갓묘 전개과정의 이야기속에서 과연 무엇에 범실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고져 합니다. 김삿갓의 시는 형식에 얽메이지 않는 파격성에 풍자와 해학으로 삐뚤어진 이 세상을 풍자하고 양반들의 기성의 권위에 대한 희롱조등에 통쾌한 웃음을 선사하기에 인터넷의 블로그나 카페등엔 김삿갓에 대한 이야기에 무수히 많고 또한 김삿갓이 지은 詩가 아닌 논지를 지닌 詩임에도 유머와 해학이란 김삿갓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듯, 김삿갓의 詩세계로 끌려들어 둔갑되즌 것 또한 김삿갓의 유머와 풍자시의 독보적 세계란 위상을 나타낸다. 그래서 인터넷에는 영월의 노루목의 김삿갓의 묘를 관람한 수 천명의 기행문엔 한결같이 김삿갓의 노..
평창 후평리의 선돌백이 평창 후평리의 선돌백이 * 강원도민일보의 기사 내용이 글에서 후평리의 선돌백이는 옛  석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인공적인 선돌은 아닙니다. 따라서 정원대의 의문이나 강원일보 기사는 의미없는 이야기입니다.[강원도민일보 신현태 기자] 평창읍 후평리 노산 입구에 선돌로 추정되는 대형 바위가 발견돼 선돌여부를 확인하는 학술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자칭 평창지역 향토사학자 정원대와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평창읍 후평리 31호선 국도 옆 노산 자락에 위치한 이 선돌 추정 바위는 높이 10여m,폭 1.8m 크기로 국내에서 발견된 선돌 가운데는 상당히 큰 규모에 속한다.특히 이 바위가 위치한 마을은 주민들 사이에 선돌백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어 전국적으로 선돌이 있는 마을지명과 같아 주민들은 이 바위가 선..
4.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에서...(2019를 돌아보는 사유적 사색에서) 4. 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에서...(2019를 돌아보는 사유적 사색에서) 후세백작 2020.01.23 00:53 저의 모든 글이 그러하듯 하리 청동기 유적에 관해서는 4~5년전 당시에 몇 편의 글에 의해 역사적인 사안을 소상하게 언급하였으며, 이 장에서는 이러한 하리 청동기 유적(예를 들어 역사에서는 ..
3,평창의 바위공원과 백일홍 축제에 대한 사유적 사색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3, 평창의 바위공원과 백일홍 축제에 대한 사유적 사색 (평창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후세백작 2020.01.09 평창의 레져문화에 훌륭한 것으로는 노람뜰의 바위공원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노르웨이엔 비겔란의 조각공원이 있지만 평창엔 그 순수한 자연의 세계의 바위공원이 있다. 이 ..
2. 노산성의 여러 현안문제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2. 노산성의 여러 현안문제 (평창 역사의 바른 정립에 관한 회고 ) 후세백작 2020.01.06 07:32 제 1장의 평창역사 정립에 관한 회고의 의의와 개괄적인 이야기에 이어서 제 2장 이하 3장등 계속하여 이미 발표한 평창역사의 새롭게 정립하는 각 개뱔 역사의 게시글들의 이래에 관한 보층 설명을 ..
판관대 세미나를 환영합니다 판관대 세미나를 환영합니다 후세백작 2019.11.03 22:19 오는 11월 22일 평창에서는 판관대의 문화콘텐츠 계발을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한다. 우리 역사와 문화에 심사임당과 율곡에 관하여 평창으로 이 문화 콘텐츠를 계발함은 고무적인 일로 환영합니다. 우션 죄송합니다만 "문화 콘..
요즘 나의 생각은 기우[杞憂]일까?? 요즘 나의 생각은 기우(杞憂)일까?? 기우[杞憂]라 함은 옛날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봐 걱정을 하다가 급기야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다는 얘기에서 유래합니다. 바뀐 뜻 지나친 걱정이나 쓸데없는 걱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 출전은 《열자(列子)》의 ..
김삿갓의 바른이해 연구 [김삿갓의 바른이해 연구] 풍류시인 김삿갓 !! 이 몸 죽어 백년인데 풍류인심 간 곳 없이 아찌다 북녘 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 ---김삿갓 북한 방랑기---- 지난 시절에 정오 12시전 5분 드라마로 당 시대에 풍류적으로 북한의 괴수 김일성을 호되게 꾸짖는 김삿갓은 통쾌하기 이를데 없는 단막극 드라마였다. 장장 1만 천여회 방송으로 천재시인 김삿갓은 전 국민에게 친근하고 낯익은 인물이 되었다. 아래에서는 K.B.S 역사 스페셜에서 이야기를 인용하여 본다http://blog.daum.net/santaclausly/11793520 김삿갓 신드롬 방랑시인은 왜 슈퍼 스타가 됐냐?? ******************************** 엄응용 김삿갓 유족 보존회장 "가산군수 정시의 충성을 논하고또 선천부..
(1) 평창의 동학항쟁 <평창의 봉기 -1>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영월, 고씨굴이라 전해지는 슬픈 역사 이야기> 高 柱 浩 영월의 고씨동굴의 새로운 역사 이야기가 밝혀졌습니다. 지금까지는 백과사전이나 영월 역사에서도 고씨 굴에 관한 역사적 이야기는 자료가 없어서 임진왜란때 고씨 일가가 피난가서 고씨굴이라 불린다 서술되고 있지만, 당시 역사적 사료를 발굴하여 고씨 동굴의 역사는 의를 내세운 의병장의 모습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합니다. 당시 역사에서는 고씨굴은 3형제의 의병장으로서 나라를 위한 충정의 슬픈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현재 고씨동굴 안내판엔 근거도 없는 고씨만 살았다는 비 역사적, 동화적인 이야기를 꾸미고 있는데, 새로 밝혀진 고종원 3형제의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서의 역사 이야기로 다시 서술하기를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팔석정의 석각(石刻)의 제 문제에 대한 논고 팔석정의 석각(石刻)의 제 문제에 대한 논고  후세백작   2019.09.17 03:59  팔석정은 평창군 봉평면 평촌리 903-17에 위치하며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은 이곳의 바위에 팔 석의 이름을 새겼다 한다.바위의 모양에 따라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석대투간(石臺投竿) 석지청련(石池靑蓮) 석평위기(石坪圍棋) 석실한수(石室閑睡) 석요도약(石搖跳躍) 의  여덟 개를 바위에 새겨 八石이라 하는데, 여기엔 많은 문제점을 가지기에 이에 대하여 하나씩 분석합니다.◈의문 1 八石의 여덟개의 명칭을 石刻을 새겼다 하는데, 그럼 여기서 이 여덟 개의 명칭을 왜 八石亭이라 부르는지 어원의 이야기는 없다. 또한 석요도약(石搖跳躍)에서 도약(跳躍)이라는 단어는 그 음은 한문이지만 단어는 일본이..
광화문 현판 서체의 미학 광화문 현판 서체의 미학 후세백작 2019.09.15 05:06 몇 일전 어느 뉴스에 광화문 현판에 광화문이란 서체가 보이는데 뭐 저래 천할까 하는 느낌에 뉴스를 자세히 읽어 보았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으로 궁성의 정문이다. 조선의 제일의 정문에 걸린 편액의 글씨체는 그도 제일이란 소릴 들..
가산 이효석의 진부시대(4부) 가산 이효석의 진부시대(4부) 이효석은 평창 보통학교 시절 방학때 등엔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진부면으로 가는 전령편에 달구지에도 메달리고 산길은 걸어서 백여리 떨어진 봉평 집으로 당도하는 평창초교 시절의 추억과 경험이 그의 문학관에서 향토적이고 낭만적인 서정을 드러낸다. 「메밀꽃 필 무렵」 은 방학을 맞으며 평창에서 봉평 집으로 100여리 산길과 개울을 건너 걸어야 했고, 늦은 밤에 집에 당도하기에 달밤에 비취는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듯한 인상과 작가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겠지만 이효석의 문학관은 「영서의 기억」이란 자전적 글에서 보듯이 평창 보통학교시절 이루어지는 어린시절 정서속에 인간의 애욕과 자연, 도덕적 윤리의 모럴에 자연속에 인간의 문제를 심미적으로 다루는 원..